소설리스트

검신이 돌아왔다-55화 (55/175)

55.

흥이 달아오르던 흑천회주의 칠순 전야제가 피의 축제로 바뀌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흑천회주 어디 있어? 당장 나와!”

“자, 잠깐만 진정하시고…….”

“진정? 지금 우리더러 진정하라고? 그 아갈머리가 찢겨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닥치고 흑천회주부터 데려와. 지금 당장!”

십회의 차세대 주인들이라 손꼽히던 후계자들이 처참한 변사체로 발견되자, 당연히 후계자가 죽은 간부들은 눈이 뒤집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흑천회의 전력이 나서서 그들을 통제하는 상황이었지만, 마땅한 상황 설명 없이 시간만 끈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 뻔했다.

“지금 저희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곧 상황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흑천회의 간부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상황실의 CCTV와 현장을 모조리 수색하며 정보를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젠장!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님?”

왕명은 갑자기 반전된 분위기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흉악해진 사람들의 분위기에 깜짝 놀라 추현곽에게 물었다.

“그게, 연회에 참가한 십회의 후계자들이 변을 당했다. 그런ㄷ 사체가 꽤 끔찍하게 훼손당한 모양인가 봐.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모든 사체에서 심각한 고문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각 길드의 간부들이 미쳐 날뛰기 직전이라더군.”

“예? 그게 무슨……!”

왕명의 놀람은 연기가 아니었다. 윤수호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봐서는, 아무래도 처음부터 계획된 암살이었던 것 같다.”

“범인은요? 그래서 범인은 잡혔습니까?”

왕명의 다급한 물음에 추현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조사하고 있긴 한데, 아직은 밝혀진 바가 없다. 물론 유력한 용의자는 이미 나온 모양이지만.”

“유력한 용의자요?”

그때였다.

추현곽의 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은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 또 생긴 겁니까?”

“내일 오실 예정이셨던 회주님께서 급하게 오셨다는군. 본래라면 내일 자네를 소개해 드릴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네. 아우님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나는 회주님을 만나 봬야 할 것 같으니.”

“아, 예! 알겠습니다, 형님.”

* * *

“난 분명 도련님을 죽인 범인을 끌고 오라고 명령했을 텐데?”

“전 분명 저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 범인을 찾고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게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뿐이십니다. 부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시길 부탁드리죠.”

“그거야말로 부탁이 아니라 명령 아닌가? 너희 흑천 놈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고? 혹시 범인을 빼돌리려고 시간을 버는 수작질은 아니겠지?”

흑천회를 무시하는 발언에 소 대주, 소양찬은 눈매를 날카롭게 뜨며 기세를 피워 올렸다.

“아무리 중요한 손님이라도 회에 대한 부적절한 언사는 그냥 넘어가 드릴 수 없습니다만…….”

“바로 본색이 나오시는구먼! 그래서,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어쩔 건데? 이쪽은 도련님이 당했다고! 지금 네놈 따위를 찢어 죽인다고 분이 풀릴 거라 생각하나?”

소양찬에게 맞서는 쌍룡회의 간부 대설곤이 지지 않고 이죽거리며 기세를 피워 올렸다.

두 사람이 진심으로 싸울 태세를 취하자,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 모두 자기 길드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에서도 눈여겨볼 정도의 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쉬이이이익……!

콰우우우우……!

차갑고 날카로운 기세를 칼날처럼 피워 올리는 소양찬과, 거칠고 흉포한 기세를 폭풍처럼 피워 올리던 대설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쒜엑!

‘……!’

대설곤이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자신과 소양찬의 사이를 가로막고 싸움을 멈춰 세운 한 남자 때문이었다.

‘이 자는……?’

“더 할 생각이라면 지금부터는 내가 상대해 주지.”

“칫…….”

난데없이 끼어들어 자신을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경고에 불같은 성격을 자랑하던 대설곤이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아무런 준비 없이 흑천회주의 검이라 불리는 괴물과 싸울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괴물이 여기에 있다는 얘기는…….’

대설곤을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집중되었다.

흑천회주의 검이 이곳에 있다는 말인즉, 흑천회주가 이 자리에 도착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이 지긋한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옆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지만, 그의 주변으로는 일반인이 쉽게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졌다.

흑천회주, 양자간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먼저 뜻깊은 날을 앞두고 이런 불미스러운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점, 본 회주가 손님들께 깊이 사죄를 드리는 바요.”

흑천회주가 직접 행차하여 고개 숙여 사죄하자 사람들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 보였지만 그것뿐이었다.

“흑천회주님의 심정은 알겠으나 우리의 인내심도 그리 길지 않소. 당장 본회의 회주님께 보고드려야 하는데,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한단 말이오?”

“멸마회도 같은 입장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회주님의 사과가 아니라 범인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내 저희 앞으로 끌고 오지 않는다면 이번 일의 책임은 온전히 흑천회에서 감당해야 할 겁니다.”

“가족보다 귀한 존재를 떠나보낸 여러분의 슬픔을 내가 어찌 경시하겠소? 조금의 말미를 허락해 준다면 내 범인을 찾아 만천하에 공개하리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사람들의 노기에 흑천회주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 숙여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몸을 돌려 걸어 나가는 양자간.

사람들 앞에서는 물에 빠진 노인처럼 처량하기 짝이 없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악귀 나찰과 같은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서둘러 범인을 찾아라. 내 얼굴에 똥칠한 그놈의 살점을 하나하나 도려내 씹어 먹을 것이다.”

* * *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던 홍룡회의 간부 마평은 인상을 구기며 조용히 자리를 떠나더니, 서둘러 홍룡회의 후계자 공사윤의 객실로 돌아왔다.

“그래서 상황은?”

이미 취기가 완전히 날아가 버린 공사윤이 누구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마평을 쳐다보았다.

그에 마평은 무거운 표정으로 자신이 파악한 정보들을 털어놓았다.

“그게…… 좋지 않습니다. 회주가 직접 참석한 무적회, 팔극회, 수라회와 주최 측인 흑천회의 후계 예비자들을 제외하면 모두 당한 것 같습니다…….”

“뭐? 그게 사실이야?”

“예, 도련님…….”

그 순간 공사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바보라도 상황이 이쯤 되면 뭔가가 잘못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파티에 참석한 다른 길드의 후계자들은 전부 변을 당했는데, 자신과 흑천회의 후계자만 변을 피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밖에 다른 특이 사항은 없는 거지?”

“죄송합니다. 실은 제 부하 중 한 명이 실종된 상태로 전혀 행방이 파악되고 있지 않습니다.”

“뭐? 그걸 왜 이제야 말해!”

공사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마평의 멱살을 잡아 올릴 정도로 그는 지금 흥분한 상태였다.

마평은 분개한 공사윤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이어 나갔다.

“동료에게 볼일이 급하다고 화장실을 가서는, 그 뒤로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행방도 찾을 수 없었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때였다.

객실에 비치된 인터폰이 울리자, 흔들리는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은 공사윤이 고개를 떨궜다.

“흑사회주입니까?”

“그래, 지금 승무원과 손님들을 비롯해 전원 2층 연회장으로 집결하라더군.”

“도, 도련님, 진정하십쇼. 아직 누가 범인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닌데……!”

이제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떠는 공사윤을 보고 마평이 그를 달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 상황에서 그럼 흑천회주가 미쳤다고 자신들 짓이라고 떠벌릴까? 그 새끼들 생각이야 뻔하지! 지금 우리한테 이번 일을 덤터기 씌우려는 거라고! 딱 보면 몰라? 연회장에 가는 순간 난 죽은 목숨이라고!”

“그렇다고 도망치는 건 더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그거야말로 도련님이 범인이라는 자백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일단은 가서 결백을 주장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이곳에서 도망칠 수는 있고?”

“…….”

이제는 분노를 넘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 공사윤의 모습에 마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자. 그 수밖에 없다면서?”

“걱정 마십쇼. 제가 도련님을 끝까지 지켜 드리겠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 * *

“모두 모이셨군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저희가 알아낸 정보부터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걸 보시죠.”

영상을 분석한 흑천회의 간부가 정면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하였다.

영상은 피해자들이 살해당했을 시점에 객실과 주변 CCTV 영상을 재생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숨죽여 영상에 집중했다. 특히 자기 길드의 후계자가 고문 끝에 죽는 영상에서는 입술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턱 밑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간부들도 있었다.

“보다시피 피해자는 여럿이지만 범인은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암행복으로 정체를 감추긴 했지만, 영상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범인은 키가 상당히 작은 편이죠. 현재 범인의 키는 160cm 전후로 추정되고, 어두워서 구분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왼쪽 눈에 흉터가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간부가 직접 영상을 캡처한 사진들을 설명해 가며 범인에 대해 추론하자, 공사윤의 표정은 점점 더 흙빛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저희는 외부에서의 침입 가능성을 염두하고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해 봤지만,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여 내부인의 소행일 가능성을 열어 두고 승선 명단을 확인하던 중, 범인과 가장 흡사한 특징을 가진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자입니다.”

대형 스크린에 투영된 승객 정보에는 한 사람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소속이 떡하니 기재되어 있었다.

“이름 가우창. 키 162cm. 왼쪽 눈에 흉터가 있으며, 홍룡회의 경호원 신분으로 본 유람선에 승선한 남자입니다.”

……!

눈을 부릅뜬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는 공사윤에게로.

그들의 살기가 쏟아져 들어오자 공사윤은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참고로 용의자를 특정한 이후 가우창의 행방을 전력으로 수색했지만, 그 어디서도 가우창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간부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느 정도 중립적인 위치라고 할 수 있는 팔극회의 회주가 공사윤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금 저 말이 사실인가, 공 공자? 가우창이란 자, 지금 어디 있지?”

“그, 그것이……!”

꿀꺽.

공사윤은 목구멍을 넘어가는 마른침이 마치 식칼을 삼키는 것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조금만 설명을 삐끗해도 자신들의 목이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검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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