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형님, 저 왔습니다.”
“아우님 오셨는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왕명이 약속 시간보다 일찍 추현곽을 찾아가자, 때마침 준비를 마친 추현곽이 그를 환대하였다.
“오늘 뵙게 될 분이 뭘 좋아하실지 몰라, 소소하게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해 봤습니다.”
“그래? 나도 한번 구경해 볼 수 있겠는가?”
“물론이지요.”
왕명이 가지고 온 황금색 보자기를 풀자, 그 안에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가 상자의 뚜껑을 열고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냈다. 선물의 정체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느낌의 미륵좌상이었다.
“이건…….”
“명나라 말기에 선동사의 을경 대사께서 입적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수양하신 삼가연화미륵좌상 3점 중 하나입니다. 물론 감정서까지 확실히 첨부했지요.”
“이게 을경 대사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미륵좌상의 하나란 말인가?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구하기 힘들다는 이 귀한 작품을 대체 어디서…….”
지금 추현곽이 놀라고 있는 미륵좌상은 놀랍게도 진품이었고, 감정서 또한 진짜였다.
이 선물은 왕명이 자신의 정보망을 최대한 활용하여 간신히 구한 물건으로 상당한 돈이 들어갔지만, 그 돈 모두 윤수호가 자금을 지원해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자금줄인 윤수호의 결정에 따라 한국 정부에 기부할 작품이기도 했다.
“그분께서 옛 보물에 관심이 많은 건 어떻게 알아 가지고, 하여간 아우님 통찰력에는 항상 감탄을 금치 못하겠구먼.”
“과찬이십니다, 형님.”
“그럼 더 늦기 전에 출발해 보세.”
그렇게 왕명과 추현곽은 함께 가까운 공항으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거기서 두 사람은 깐깐한 검문검색을 마친 뒤, 이상이 없음을 확인받자 헬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헬기가 바다 위를 빠르게 비행하자 왕명은 넌지시 추현곽에게 물었다.
“이제는 말씀해 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형님? 대체 어디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답답해 죽겠습니다.”
“하하하! 그건 도착할 때까지 아껴 두기로 하지. 아마 자네도 보면 깜짝 놀랄 거야.”
두 시간 뒤, 왕명은 추현곽의 말처럼 바다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이제 도착했군. 어때? 굉장하지 않은가? 하하하하!”
왕명이 발견한 그것은 초호화라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한 초특급 호화 유람선이었다.
“우리 흑천회의 보물, 화련 2호라네. 25만 톤급에 최대 7천 명의 승객과 3천 명의 승무원을 수용할 수 있는, 비공식 세계 제일의 초호화 유람선이지.”
“그야말로 바다 위를 떠다니는 도시 같은 배로군요.”
“바다 위를 떠다니는 도시라……. 그것참 적절한 비유로구먼!”
비유가 마음에 들어 크게 웃는 추현곽과 달리, 왕명은 유람선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군. 초호화 유람선이라……. 머리를 잘 썼네. 지금처럼 바다 한가운데에 있으면 접근하기도 어렵고, 항상 이동하기 때문에 추적도 곤란하겠지. 게다가 이 지역이면 필리핀해역이라 중국에서도 섣불리 감시하거나 접근하는 게 어렵겠어. 필리핀 정부 측에는 당연히 뇌물을 먹여 이쪽에 관심도 없을 테니…… 그야말로 완벽한 사각지대군.’
그 증거로 필리핀 해군은 멀리서 그들을 감시하기만 할 뿐, 제재도 경고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게다가 유람선의 주변에는 전투용 배들과 길드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두 사람이 탄 헬기는 유람선과 교신을 주고받은 후, 천천히 헬기 착륙장에 착륙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추 장로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군, 소 대주. 그동안 더 강해진 것 같은데? 기세가 전혀 다른 사람 같구먼. 하하하하!”
아닌 게 아니라 왕명이 보기에도 추현곽에게 포권을 취하며 그를 마중 나온 인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사내처럼 보였다.
‘흡사 칼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날카롭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옆에 분은…….”
“내가 전에 얘기한 내 의형제일세. 이번에 회주님과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함께 왔네.”
“여기 초대장이 있습니다.”
왕명은 품속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고, 초대장을 확인한 소 대주는 그것을 다시 공손하게 돌려주었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두 분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가지.”
소 대주와 그 부하들이 길을 터 주자 두 사람은 그들을 지나쳐 갔다.
그 사이에도 헬기들은 꾸준히 도착하고 떠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헬기에서 내리는 인물들의 정체가 가히 범상치 않았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는 유람선의 승객들 모두, 중국의 범죄 사회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거물이었다.
‘십회의 알 만한 거물들은 전부 이곳에 모인 건가?’
그만큼 경비와 군사력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흑천회의 기본적인 경비는 물론이고 각 길드의 거물을 호위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신들의 주전력과 함께 이곳을 찾아온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젠장! 작전 실패다. 경비가 너무 삼엄한 데다, 이곳에 모인 전력의 수준이 내 상정을 아득히 초월했어!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작전을 중지해야 하는데…….’
왕명은 추현곽과 함께 사람들을 만나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사람들을 소개받았지만, 속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윤수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작전을 중지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그날 밤.
슈웅!
새라고 하기에는 크고, 비행기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의 그림자였다.
윤수호는 밤바람을 순식간에 앞지르며 남중국해의 바다 위를 시원하게 가로질렀다.
‘여기군.’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도시, 화련 2호였다. 사방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곳만이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윤수호는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무장한 보트들이 바다 위를, 그리고 전투용 헬기들이 상공을 순찰하며 철통 감시를 하고 있었기에 해상과 공중, 그 어디로도 침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스으으으…….
곧이어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윤수호의 존재감이 극도로 희미해졌다.
은지한의 은신술도 귀신의 뺨을 칠 정도지만, 윤수호의 은신술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윤수호는 헬기와 보트의 감시망을 손쉽게 뚫고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왕 요원의 위치는…….’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사람들의 인기척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파티장이었다.
파티장은 총 두 곳이었다.
천장이 없는 갑판 위에서 DJ들과 함께 젊은 층이 노는 파티장이 있고, 그 밑에 연회장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끼리 모여 조용하게 분위기를 즐기는 파티장이었다.
윤수호가 향한 곳은 후자였다. 왕명에게 심어 둔 자신의 기운이 거기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툭. 털썩.
배에 잠입한 윤수호는 적당한 남자 승무원 한 명을 골라 기절시키고는,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 승무원의 주 업무가 서빙이라 파티장을 마음껏 돌아다녀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와인잔을 쟁반에 담아 자연스럽게 왕명과 추현곽이 있는 쪽으로 접근하자, 왕명 또한 윤수호를 알아보았다.
“여기, 와인 한 잔 주겠나?.”
왕명은 자연스럽게 윤수호를 불렀고, 윤수호는 그에게 와인을 건네주면서 전음을 보냈다.
-전파 방해 때문에 통신은 불가능하더군요. 임시로 파티장과 가장 가까운 남자 화장실 세 번째 칸에 폰을 숨겨 두겠습니다.
“고맙군.”
“좋은 밤 되십시오.”
윤수호가 떠나고 잠시 후, 왕명이 볼일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윤수호가 말한 세 번째 칸에 들어가자 변기 안에 밀봉된 스마트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화장실을 나서자, 자연스럽게 윤수호가 세 번째 칸으로 들어가서 폰을 회수했다.
폰의 목적은 통화가 아닌 기록이었기 때문에, 윤수호는 자연스럽게 폰에 저장된 파일을 확인하였다.
거기에는 왕명이 이곳에 와서 수집한 모든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더불어 예상보다 적들의 병력 수준이 높아서 작전을 중지하는 것도 건의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접어 두었다.
‘꽤나 꼼꼼하게 기록해 뒀군.’
정보들은 체계적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한눈에 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추현곽이 자신의 사람이라고 왕명을 데리고 다니며 각계각층의 길드 간부들과 인사를 나눴던 것이 정보 수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한다면 홍룡회 측에 대한 정보였다.
‘홍룡회주는 참석하지 않은 건가?’
회주가 직접 참석한 경우는 세 군데 정도가 전부였으며, 그들 모두 회주의 자리를 이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임 회주들이었다.
게다가 나머지도 회주가 아닌, 다음 회주 자리를 확정받은 후계자들이 참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흑천회주의 후계자가 정해지는 자리이다 보니, 다른 길드들 역시 아무래도 현세대보다는 다음 세대의 관계 형성을 더 신경 쓰는 모양이군.’
사실 윤수호는 이곳에 홍룡회주가 직접 찾아왔다 하더라도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순하게 이 배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리는 건 그에게 매우 간단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홍룡회주와 함께, 아주 손쉽게 중국의 어둠을 지배한다는 십회의 간부들과 우두머리를 날려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중국 정부만 좋은 일일 뿐, 오히려 윤수호에게는 매우 귀찮아지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곳에 있는 간부들과 우두머리를 날려 버린다고 해도 길드의 전력은 그대로다. 오히려 그들은 회주와 간부들의 복수를 한다면서 윤수호를 쫓을 것이고, 이들과 자신의 싸움은 중국 정부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결과가 되어 버릴 것이다.
윤수호는 그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는 홍룡회를 무너트리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더 귀찮아질 뿐이다.
그래서 윤수호는 지금의 계획을 구상한 것이다.
정보를 전부 머릿속에 저장하고 폰을 갈무리한 윤수호는 화장실을 나와서 곧장 홍룡회의 간부들이 배정받은 객실로 은밀하게 접근했다.
‘현재 홍룡회 측 책임자는 다음 후계자로 내정된 공사윤이라고 했던가.’
윤수호가 공사윤의 객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는 풀장에서 많은 여성과 함께 술에 취해 거의 인사불성이 된 상황이었다.
다만 그를 지키는 경호 인력들은 여전히 삼엄한 기세로 주변을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윤수호의 계획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저 녀석이 좋겠군.’
은신한 상태로 인물을 고르던 윤수호가 타깃으로 정한 상대는 다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왼쪽 눈에 흉터가 돋보이는 녀석이었다.
톡.
윤수호는 은밀하게 그에게 접근하여 혈 자리 몇 개를 자극하였다.
잠시 후…….
‘배, 배가 갑자기 왜 이러지?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
눈에 흉터가 있던 사내는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복통과 배설 욕구에 식은땀을 흘리며 참고 또 참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동료에게 부탁했다.
“저기, 미안한데, 나 급하게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뭐? 임무 중에 화장실을 가겠다고? 너 미쳤어? 그러다 들키면 큰일 나는 거 몰라?”
“아, 아는데…… 이게 참을 수가……. 으윽! 부, 부탁 좀 하자. 금방 갔다 올게!”
“칫! 빨리 갔다 와라. 괜히 나까지 욕먹기 싫으니까.”
그렇게 사내는 화장실로 급하게 튀어 갔다. 자신의 미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