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왕명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최근 중국의 길드는 길드 간의 항쟁이 안정화되어 크게 열 곳으로 정리되었지요. 물론 그 산하 길드들이야 수를 세는 게 무의미하고, 지금도 새로운 길드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거야 미미한 변수일 뿐, 열 개의 길드가 중국의 어둠을 다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홍룡회도 그중 한 곳이고요.”
“흑천회주의 칠순에는 홍룡회 말고 나머지 아홉 길드도 참석하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전쟁이 끝나고 현재 길드들은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교류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전쟁은 언제 끝났다고 했죠?”
“시기상으로 대략 3년이 조금 넘었을 겁니다.”
“이제 막 앙금에 재가 쌓이기 시작했을 때로군요.”
윤수호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왕명이 물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선생님?”
왕명은 윤수호를 위원장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는 특무대 쪽에서 왕명에게 윤수호를 소개할 때 그의 신분을 일부러 감췄기 때문이었다. 그저 지시를 따르고 적극적으로 보좌하라는 명령만 내려졌을 뿐.
왕명도 이 사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첩보 요원의 특성상, 언제 정체가 발각되어 고문당해 정보를 누설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그냥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서요.”
“재미있는 생각요?”
“혹시 흑룡회주의 칠순이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 알고 계십니까?”
“최선을 다해 알아보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아직……. 중국 특무공안들도 예의주시하는 상황이라, 함부로 시간과 장소를 발설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최소한의 인원에게만 초대장을 보내겠죠.”
“그런가요.”
윤수호가 아쉬움을 삼키던 찰나, 왕명이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십쇼. 현재 진행 중인 작전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분명 연회의 장소와 시간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 * *
다음 날.
“어서 오십시오, 왕 대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이쿠! 추 대협께서 이렇게 환대해 주실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선물도 더 좋은 거로 준비할 걸 그랬습니다.”
“선물의 가치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건 선물을 준비한 사람의 정성과 마음이지요.”
왕명은 추현곽에게 수천만 원 상당의 와인을 선물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추현곽.
현 흑천회의 간부인 그는 상해에서도 가장 호화롭고 높은 빌딩의 최상층을 자신의 사무실로 사용하며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능력은 쥐뿔만큼도 없으면서 현 회주의 사촌동생이라는 혈통만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인간이지.’
왕명이 추현곽을 골라 작업을 시작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능력은 없는 주제에 욕심만 많은, 그러면서도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런 남자에게 잘 보이면, 그만큼 이들의 중추로 잠입하는 데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추현곽을 노리고 접근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무리 무능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추현곽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왕명은 먼저 추현곽의 지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조사하여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소개를 받고, 또 그 사람과 친해져 소개를 받다 보니 결국 추현곽까지 소개를 받아 안면을 트게 된 것이다.
다만 평범한 방법이었다면 지금처럼 빠르게 접근할 수도 없었고 이렇듯 확실한 신임을 얻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바로 윤수호였다.
8급 재앙종을 쓰러트리고 받은 조 단위 보상은 건드릴 필요조차 없었다. 이곳에 돌아와서 처음 쓰러트린 6급 재앙종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쓰러트린 재앙종들의 핵을 처분하고 손에 넣은 이익만 하더라도 천억이 가볍게 넘어갔으니까.
하나 윤수호에게는 푼돈에 지나지 않더라도 왕명에게는 현재 상황에서 돈보다 큰 아군이 있을 수 없었다.
“아, 참! 저번에 선물해 주신 고급 요트는 잘 쓰고 있습니다. 제 아들 녀석이 매우 만족한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하하하!”
“마음에 드셨다니 그것참 다행입니다. 하하하!”
수억 원짜리 요트뿐이겠는가? 별장에, 슈퍼카에, 파티에, 고급 시계나 술까지…….
지금까지 그의 선물 비용과 접대 비용으로 들어간 금액만 수십억 원이 넘었다. 물론 작전이 끝나는 대로 전부 회수할 수 있도록 조처해 놓긴 했지만, 정말 엄청난 투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돈의 위력은 위험하고, 또 대단한 법이었다.
수십억 원어치의 선물과 접대를 아낌없이 베푸는 통 큰 왕명의 모습에 추현곽은 그를 깊이 신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명은 오늘 비로소 그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힐 생각이었다.
‘네 녀석의 정보원이 내 뒷조사를 하던 걸 알고 있다. 지금쯤이면 슬슬 내가 던진 미끼를 물 때가 됐는데…….’
“그런데 말이오, 왕 대인. 내가 왕 대인에게 무슨 섭섭한 일이라도 한 적이 있소?”
“예? 섭섭한 일이라뇨? 그럴 리가요! 대체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렇지 않고서야 피만 나누지 않은 의형제에게 어찌 비밀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이 형은 섭섭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물었다!’
왕명은 속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연기를 계속했다.
“비밀이라니요? 제가 추 대협…… 아니, 형님께 비밀이 어디 있다고 이러십니까? 제발 노여움을 푸시지요.”
“허허! 아직도 딴청을 피운단 말이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구려. 이번 만남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추현곽이 짐짓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모양새를 취하는 건 그만큼 애간장이 달아 있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이쯤이면 충분히 달아올랐겠지. 멍청한 놈, 개미지옥에 빠진 것도 모르고 아직도 꿀을 탐하다니…….’
한껏 추현곽의 애간장을 태운 왕명은 슬슬 낚싯대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하아…… 형님의 지고하신 안목 앞에서는 역시 제 같잖은 비밀 따위 참으로 부질없는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다만 악의적인 목적으로 감춘 것이 아니라, 그저 형님께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으려던 동생의 수고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의형제끼리 번거로울 게 뭐가 있고 수고스러울 게 뭐가 있겠는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놔 보게.”
이제는 아예 말까지 놓으면서 왕명을 대하는 추현곽의 모습에는 초조함과 욕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왕명은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추현곽에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혹시 형님께서는 제가 작은 건설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얘길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야 기억하다마다. 세상에 리웨이 건설이 작은 건설사라면, 세상에 큰 건설사는 뭐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왕명은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물론 리웨이라는 건설 회사는 종이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컴퍼니였다.
‘페이퍼 컴퍼니로 사기 치는 건 너희들만의 특기가 아니란 뜻이지.’
거기에 윤수호의 자금력까지 더해지니, 추현곽으로서는 그가 정말로 거대 건설사의 사장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실은 이번에 저희가 기획하는 조금 큰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기치 않은 변수가 생겨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왕명은 서류를 꺼내 추현곽에게 보여 주었다.
프로젝트의 내용을 확인한 추현곽이 눈을 부릅떴다.
“해남성에 워터파크와 골프장, 스키장, 레이싱 경기장, 생태 공원 등을 겸비한 다중 복합 초호화 리조트 단지 건설? 이걸 리웨이에서 독점 수주했단 말인가?”
‘다 알고 있었으면서 능청은…….’
“보시다시피 정부의 토지 대여 허가서와 준공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 중인데, 이게 좀……. 생각지도 못했던 걸림돌이 생겼지 뭡니까?”
“걸림돌이라면…….”
“혹시 해남성 하면 생각나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해남성이라면……. 혹시 패청회, 그놈들이?”
왕명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자신들이 노리고 있던 몫을 제가 가로챈 꼴이 됐으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요. 지금이야 동업을 제안하면서 좋게 좋게 타이르고 있지만, 제가 거절하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패청회 놈들의 악랄함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암! 씹어 먹을 놈들 같으니!”
“형님 말씀대로 날건달이나 다름없는 놈들과 손을 잡고 사업을 도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마음이 여간 뒤숭숭한 게 아닌데, 형님께서 제 심중을 그대로 꿰뚫어 보셨나 봅니다.”
“크흠! 내가 또 심안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긴 하지. 여튼 그 큰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끙끙거렸단 말인가? 못난 사람 같으니……. 이 형님이 그토록 의지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추현곽의 책망에 왕명은 공손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하지만 사업의 규모가 워낙 큰 탓에, 감히 형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결코 형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도 사활을 걸고 있는 프로젝트라 쉽게 얘기를 꺼내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왕명의 말에 추현곽은 다시 신중하게 서류를 검토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님의 걱정도 이해하네. 6억 위안 규모의 프로젝트라면 확실히 내 손으로 결정하기는 힘들지.”
6억 위안이면 우리 돈으로 약 1천억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아무리 추현곽이라도 그만한 금액을 단독으로 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 그렇지! 자네, 이번 주말에 시간 있나? 아니, 없어도 만들어 두게. 나와 같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
“예? 갑자기 이렇게 급하게 누굴…….”
“보면 알 걸세. 지금 얘기하기는 그렇고, 자네 사업에 큰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니 무조건 시간을 비워 두게. 알겠지?”
“예, 형님. 저는 오로지 형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크하하하!”
호언장담하며 대소를 터트리는 추현곽에게 고개 숙인 왕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 *
그날 밤.
윤수호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온 왕명이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상황을 보고했다.
“추현곽이 소개해 준다는 사람은 십중팔구 흑천회주일 겁니다. 누굴 만나자면서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얘기해 주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아마 동행하게 되겠죠.”
“고생하셨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임무였을 텐데 훌륭히 잘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녀석을 따라가서도 혹여 실수하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이죠. 한두 번 해 본 일도 아니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 걱정은 따로 있습니다.”
“위치 추적 말씀이군요.”
“역시 알고 계셨군요.”
윤수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명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장에 가면 부외자인 저는 폰은 물론이고 그 어떤 종류의 전자기기도 반입이 불가능할 겁니다. 설령 GPS 칩을 체내에 삽입한다고 하더라도 걸리게 되겠죠.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선생님께 위치를 알릴 수 있을까요? 혹시 생각해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잠시 가까이 와 보시겠습니까?”
“예? 아, 예.”
윤수호는 왕명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팔 좀.”
“아, 네…… 그런데 갑자기 팔은 왜?”
윤수호는 그의 팔목을 살짝 쥐더니 다시 풀어 주었다. 왕명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욱 경악스러웠다.
“됐습니다. 이제 왕 요원님께서 전 세계 어디에 계시건 제가 찾아갈 수 있으니, GPS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요원님의 몸속에 제 기운을 아주 미세하게 심어 두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요원님이 어디 계시건 제가 찾아갈 있으니, 마음 놓고 작전대로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그,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윤수호는 대답 대신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왕명은 자신의 팔목을 내려다보며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