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은지한의 반 분위기는 마치 찬물을 뿌려 놓은 것처럼 조용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 찾아와도 조용히 화장실을 가는 게 아니면 책상 위에 엎드려 자거나 짝꿍과 조용히 얘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그 모든 게 박민철과 그 무리 때문이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찾아오자 학교 뒤에서 따로 자리를 가진 박민철 패거리가 아까 있었던 울분에 대해 토해 냈다.
“이런 씨발 새끼가!”
콰앙!
한 녀석이 죄 없는 쓰레기더미를 걷어차서 봉투가 터지고 쓰레기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 누구도 그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았다.
“민철아, 설마 그 새끼,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아니지?”
“내가 미쳤냐? 그 새끼를 그냥 놔두게.”
박민철은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후에 내뱉으며 은지한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근데 그 새끼 움직이는 거 본 사람 있냐?”
“나도 못 봤음. 그리고 민철이가 그 새끼한테 주먹 잡혀서 끙끙거리는 거 봤지? 그 새끼, 평범한 새끼 아니야. 거의 백퍼 알터일 듯.”
“내가 씨발아, 언제 끙끙거렸는데?”
발끈하면서도 박민철 본인 역시 그때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는지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알터면 좀 골치 아픈데. 막말로 우리 전부 덤벼봤자 그 새끼한테 깨지기밖에 더 하겠어?”
박민철은 학교에서 제법 알려진 일진이지만, 그래 봤자 평범한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두 살 어리다고 해도 알터라면, 자신들이 전부 달려들어 봤자 상대가 되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박민철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새끼, 열다섯이라고 했지? 딱 봐도 알터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리 분별 못 하고 나대는 것 같은데, 형들이 참교육해 줘야 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무슨 수로? 헐…… 너, 설마?”
패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하나같이 식겁한 얼굴로 박민철을 쳐다보았고, 박민철은 사악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수금 못 해서 뒈지나, 그 새끼한테 덤볐다가 뒈지나 마찬가지라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만들어 보자고.”
박민철 패거리는 그 길로 곧장 학교를 나와 근처 PC방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3학년 송문수가 오늘도 학교 대신 이곳에서 또래 여자애들과 함께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민철이 왔냐.”
박민철 패거리는 송문수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고, 송문수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수금 날짜는 아직 며칠 남은 걸로 아는데, 뭔 일이냐?”
“그게…… 아무래도 차질이 생길 것 같습니다, 선배님.”
“차질?”
“예, 오늘 저희 반에 저보다 두 살 어린 녀석이 월반했다고 편입을 왔는데, 사리 분별 못 하고 나대더라고요. 근데 그 새끼가…….”
“알터냐?”
“죄송합니다, 선배님. 면목 없습니다.”
송문수는 피우던 담배를 종이컵에 구겨 넣으며 말했다.
“내가 나서면 너희 등골 빠질 텐데, 괜찮겠냐?”
“수금은 어떻게든 맞추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선배님.”
“열다섯이면 이제 막 각성해서 한창 나대고 싶을 때지. 그런 거 잘 다스려서 교육해 주는 게 선배의 역할 아니겠냐. 걱정 말고 가서 일 봐. 수금 날짜 늦지 말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좋은 시간 되십시오!”
박민철은 다시 한번 90도로 인사하고 PC방을 나섰다.
패거리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 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푸하! 죽는 줄 알았네.”
“송문수라면 졸업하자마자 풍쇄 길드로 스카우트가 확정된 괴물이잖아? 너, 미쳤냐? 저런 새끼를 끌어들이게? 잘못하면 우리 모두 살인 사건 관계자가 된다고!”
“걱정 마. 길드에 들어가기도 전에 일 치를 정도로 멍청한 새끼는 아니니까. 아무튼 우리는 학교 끝나고 ×덕 돼지나 만나자. 오늘 못다 한 교육 다시 시작해야지. 그 새끼한테 수금 못 하면 우리가 송문수한테 뒈지는 건 알고 있지?”
그렇게 박민철은 웃으며 패거리와 함께 어딘가로 향했다.
* * *
방과 후 청소 시간.
“응? 집에 가야지 뭐 하고 있어, 성하야.”
“아, 너 먼저 가. 난 청소하고 갈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알기로 이번 주 청소 당번은 박민철, 주한울, 김성경이던데……. 잠깐! 그 자식들…….”
그러고 보니 은지한은 점심시간 이후로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청소하기 싫어서 튄 건가…….”
“원래 내가 하던 일이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집에 가도 돼. 아, 그리고 오늘은 정말로 고마웠어. 하지만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러지 마. 알았지?”
“무슨 소리야? 짝꿍이 당하고 있는데, 그럼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야?”
“그래 줬으면 좋겠어. 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닐지 몰라도 나는…….”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권성하.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들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 잘 가. 내일 보자.”
“…….”
그렇게 인사를 하고 청소도구함으로 다가가는 권성하의 모습에, 은지한은 결국 책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함께 청소도구함으로 향했다.
“지, 지한아?”
“혼자 하는 거보단 둘이 하는 게 더 낫잖아.”
“둘보다는 셋이 하는 게 더 낫고.”
“누나?”
어느새 은지한의 옆으로 다가온 은지연이 청소도구함에서 자연스럽게 빗자루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학교 끝났는데도 안 나오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와 봤더니 친구랑 청소 중?”
“아, 미안.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그건 상관없는데……. 안녕? 난 은지연이야. 보다시피 이 녀석 친누나고. 만나서 반가워.”
“네? 아, 네! 바, 반갑습니다! 권성하라고 해요…….”
잔뜩 긴장한 권성하는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한 은지연의 손을 쳐다보다가, 차마 악수를 하지 못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은지연이 난처하게 웃으며 손을 거뒀다.
“존댓말은 됐어. 이 녀석만 월반했을 뿐이지, 너랑 나는 같은 학년에 같은 나이니까.”
“아, 그렇구나. 미안…….”
“뭐, 사과할 일은 아니긴 한데……. 은지한, 너 좀 대단하다, 벌써 친구도 다 사귀고?”
“누나는?”
은지한이 되묻자 은지연은 일부러 섹시한 포즈를 취하며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난 좀 더 걸릴 듯. 뭐랄까, 분위기가 미묘하다고 해야 하나. 뭐, 내가 원래 엄마 닮아서 얼굴, 몸매, 성격,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어서 다가오기 어려운 건 이해하니까.”
“그런 말을 본인이 하면 창피하지 않아?”
“내가 뭐 틀린 말 했니? 안 그래, 성하야?”
“나, 난 잘 모르겠는데…….”
권성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더니 더 빠르게 빗자루질을 하기 시작했고, 남매는 여전히 티격태격하면서도 어느새 청소를 끝마쳤다.
“거봐, 셋이 하니까 금방 끝나잖아.”
“그, 그러네. 고마워…….”
“누나는 거의 떠들기만 했잖아.”
“응원도 청소의 일부거든요?”
청소를 끝내고 교문 밖으로 나온 세 사람.
“가는 길에 햄버거라도 먹고 갈래? 성하, 너는 어때? 햄버거 콜? 나,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들이랑 햄버거 사 먹는 게 꿈이었거든.”
“미안.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집에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내일 또 봐.”
“내일 보자.”
“응, 두 사람도 잘 가…….”
권성하가 인사를 하고 멀어지자,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은지연이 아쉬움을 삼켰다.
“아쉽다. 오늘 버킷 리스트 하나 해 보는가 했는데. 지한아, 그럼 우리끼리라도 햄버거 먹으러 가자.”
“잠깐만. 나, 전화 좀.”
누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은지한.
“접니다, 팀장님. 지금 보고 계시죠?”
-역시…… 사신을 속이느니 차라리 귀신을 속이는 게 더 빠르겠군. 이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아낸 거야?
이렇게 빨리 자신들의 위치를 발각당할 줄 몰랐던 것일까?
수많은 경호팀 중에서도 실력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현무팀의 팀장 류한국은 허탈함에 실소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전직 리퍼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창피하진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참고로 류한국은 윤수호가 자신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담당 경호팀의 팀장이었기에 은지한도 그를 알고 있었다.
“분명 삼촌께서 경호는 거절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총사령관님의 밀명이라 우리도 어쩔 수 없다. 군인이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냐? 그런데 설마 삼촌한테 이를 생각은 아니지?
“눈감아 드리는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 * *
권성하가 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주변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동네의 분위기도 뭔가 음습하고 전체적으로 건물들도 낡고 허름했으며, 제대로 보수조차 되지 않은 무너진 집들도 빈번하게 보였다. 흔히들 말하는 빈촌이지만, 사실 지금의 서울에서는 이런 곳에 사는 인구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권성하도 자신이 이런 동네에 사는 게 창피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몸이 불편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쥐꼬리만 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명하고 있지만,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소환! ×덕 돼지의 술!”
“……!”
축 늘어진 어깨로 땅을 바라보며 걷던 권성하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며 고개를 쳐들었다.
악몽에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든 탓이었다.
“진짜 이 새끼, 완전 감 잃었네. 아니면 아까처럼 그 새끼가 구하러 와 줄 거라 믿고 쌩 까는 거냐? 빨리 안 튀어올래?”
딱딱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려 보니, 무너진 집의 폐허에서 자신을 쳐다보며 비웃는 박민철 패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 어떻게 너희가 여기에…….”
“왜? 우리는 친구 좀 보러 오면 안 되냐? 이 새끼, ×나 띠껍게 보네. 사람 섭섭하게. 씨발아. 그렇게 우리 얼굴 보기 싫었으면 제때제때 우리 부탁 좀 들어주든가. ×덕 돼지 새끼가 친구들 부탁도 안 들어주니까 이런 × 같은 동네까지 오게 된 거 아니야, 어? 이거 생각할수록 빡치네?”
박민철은 패거리를 이끌고 성큼성큼 권성하에게 다가왔다.
주변 어른들도 박민철 패거리를 보고는 조용히 돌아가거나 시선을 돌리고 다른 곳으로 피해 가는 게 전부였다. 그 누구도 권성하의 편은 없었다.
‘도, 도망쳐야…….’
우뚝!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 권성하는 도망조차 치지 못했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자신의 집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는 뜻이다.
만약 자신이 도망간 탓에 이들이 집으로 오게 된다면? 그래서 엄마한테 해코지라도 하게 된다면?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교복을 축축하게 적시고, 가랑이가 조금씩 젖어 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할까?’
하지만 소용없었다. 신고해 봤자 상황만 나빠질 뿐이라는 걸 이미 한 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민철아, 성하한테 사과해야지?
-성하야, 미안하다. 난 그냥 장난이었는데…….
경찰과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박민철은 자신에게 사과했고, 그날 이후로 진짜 지옥이 뭔지 알게 되었다.
박민철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아이들끼리 장난이었다는 식으로……. 어른들이 귀찮으니까.
그런 별것 아닌 이유들 때문에 놈들은 아무런 제재도, 처벌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이 새끼, 설마 지린 거야? 미친 ×덕 돼지 새끼가 이젠 하다 하다 오줌까지 지리네? 푸하하하하!”
권성하가 바지에 실례한 것까지 발견한 박민철과 패거리가 비웃음을 참지 못하던 그때였다.
“그러네. 지금 이게 되게 웃기지? 그러니까 웃은 새끼들은 조용히 손들자. 뒈지기 싫으면.”
“……!”
박민철과 패거리가 눈을 부릅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스무 명 남짓한 건장한 사내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