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저도 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정말?”
“잘 생각했다, 지한아!”
은지한도 학교에 다니기로 결정하자, 가족들이 크게 기뻐하며 은지한을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하여간 대답이 꼭 한 박자 늦지. 어차피 자기도 가고 싶었으면서.”
“미안…….”
“미안은 개뿔! 네 방이나 가 봐. 엄마랑 같이 네 가방도 사서 네 방에 가져다 뒀으니까. 마음에 안 들면 교환해도 상관없고.”
“진짜? 고마워, 누나! 고마워요, 엄마!”
툴툴거리기는 해도 은지한의 결정을 누구보다 좋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은지연이었다.
가방을 선물했다는 은지연의 말에, 은지한은 순식간에 자신의 방으로 달려 올라가 가방을 가지고 내려왔다. 가방을 품에 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히죽 웃는 그의 모습은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
이렇게 남매의 입학이 결정되자,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다닐 학교를 고르는 일이었다.
“그거 말인데……. 저, 누나랑 같은 학교에 다니면 안 될까요?”
“같은 학교라면, 지연이랑 같이 고등학교에 다니겠다는 말이야?”
“네.”
윤수아의 물음에 은지한이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니?”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하나는 누나와 제가 같은 인강을 받고 공부한 덕분에 교육 수준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는 것. 솔직히 시험 점수는 제가 좀 더 높긴 했지만…….”
“야! 죽을래? 쓸데없는 사족은 빼라?”
“두 번째는 경호 때문이에요. 삼촌의 직업 특성상 아무리 삼촌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세간에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삼촌의 정체를 알아내 우리를 해코지하려는 무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은지한은 책망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저 대비를 위해서 팩트를 얘기했다는 사실을 윤수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책임감을 느낀 윤수호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려 했다.
“네 말이 옳다, 지한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죄송…….”
“거기까지! 죄송하다고 말하거나 고개 숙이면 내 손에 죽는다, 오빠! 부모님도 나도, 이 아이들도 오빠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예전에도 지금도 오빠에게는 항상 빚만 지고 살았는데, 여기서 오빠가 또 왜 미안하고 왜 고개를 숙이는 건데?”
“수아, 너…….”
“이번에는 수아 말이 옳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정답이라고 말 한 사람은 수호 너다. 지금 하는 일들은 모두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그럼 어깨 펴고 당당하게 하면 된다. 가족이 아니라 남이라 생각한다면 그만둬도 상관없고.”
“아버지까지…….”
“이번만큼은 나도 네 아빠 편 하련다, 수호야. 그리고 네가 가족이 위험해지는 꼴을 두고 볼 아이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난 아무 걱정 없다?”
“어머니…….”
윤수호는 허탈함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하는데도, 오히려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을 못 할까 봐 되레 아들을 혼내는 가족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여튼 누나를 지켜 주기 위해 같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뜻은 잘 알겠다. 그럼 가고 싶은 학교는 있니?”
“그거 말인데요. 저희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라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너희가 원하면 어떤 학교든 갈 수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해도 된다.”
윤수호의 권유에 은지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삼촌의 도움을 받으면 정말로 좋은 명문고들도 손쉽게 입학할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런 곳에 가 봐야 어차피 저희 실력으로는 적응도 제대로 못 할 거고……. 그냥 저희 수준에 맞는 학교로 가고 싶어요.”
“보안상으로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문고에 진학하려면 결국 삼촌의 신분을 노출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불필요한 관심과 경계 대상들이 훨씬 더 늘어날 테니까요.”
남매의 의견이 일치하는 건 기쁜 일이었지만, 윤수아는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저기, 지한아? 보안도 물론 중요하긴 한데……. 좀 더, 뭐랄까……. 기왕 학교에 갈 생각이면 또래 아이들처럼 얘기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게 어떨까?”
그러자 옆에 있던 은지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 엄마. 엄마가 보기엔 이상할지 몰라도 남들이 보기엔 쟤, 지금 충분히 중2 같으니까.”
“……?”
* * *
윤수호가 중국으로 출장을 떠난 사이, 여러 준비를 마친 끝에 두 사람의 입학이 결정되었다.
서울 강남구 용주동에 위치한 삼문고등학교.
두 사람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들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 중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남녀공학인 이곳에 1학년으로 편입한 은지연과 은지한은 학교 사정상 다른 반이 되었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학교로 접근하는 위협은 자신이 감지할 수 있었으며, 이런 사소한 일로 삼촌을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 주목! 이번에 우리 반으로 편입생이 들어왔다. 자기소개 할 수 있지?”
“은지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보다시피 지한이는 너희보다 나이가 두 살 어린 열다섯이야. 월반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어리다고 괴롭히지 말고 잘 대해 줘야 한다. 알았지?”
“네…….”
맥없는 학생들의 대답을 뒤로하고 빈자리를 찾던 담인 선생님이 마침 비어 있는 자리를 은지한에게 가리켰다.
“지한아, 저기 빈자리 보이지? 저길 쓰면 되겠네.”
“알겠습니다.”
은지한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에도 학생들의 시선은 은지한에게 꽂혀 있었다.
월반으로 올라왔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이목을 잡아끈 건 다름 아닌 은지한의 외모였다.
“쟤, 정말 열다섯 살 맞아? 제법 분위기 있네.”
“헐, 대박! 겁나 잘생김. 혹시 아이돌 연습생 아님?”
“잘 생기긴 했는데, 연하는 별로…….”
“잘생겼으면 됐지, 연상 연하가 무슨 상관?”
호의적인 여학생들의 반응에 비해 남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월반으로 나이 어린 남자애가 같은 반이 되었다. 딱 그 정도 수준의 관심이 전부였던 것이다.
한편, 은지한의 짝은 덩치가 푸짐한 남학생이었다. 그는 은지한이 옆자리에 앉자 학급 친구들의 시선이 집중돼서 그런지 뭔가 불안해 보였다.
은지한은 그런 짝꿍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은지한이야. 잘 부탁해.”
“응? 어, 어. 난 권성하. 잘 부탁해…….”
설마 처음부터 두 살 어린 동생이 말을 놓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권성하였기에, 말을 더듬으면서도 인사를 나누었다.
“아, 참!, 혹시 교과서를 두고 와서 그런데 같이 볼 수 있을까?”
“가, 같이? 내건 낙서가 너무 많아서 지저분할 텐데…….”
“상관없으니까 부탁 좀 할게. 응?”
“그, 그래…….”
은지한은 교과서를 챙겨 왔지만,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권성하와 같은 교과서를 보며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미안, 낙서 때문에 책이 아주 지저분하지?”
권성하가 진심으로 창피해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은지한은 진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평범한 낙서 수준이 아닌데?”
권성하의 교과서는 페이지마다 낙서들이 빼곡했다.
문제는 낙서가 단순히 낙서라고 치부할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림을 따로 배운 거야?”
“아니, 집안 형편 때문에 따로 배울 수준은 안 되고……. 그냥 혼자 만화를 보면서 따라 그리다 보니까…….”
“프로가 됐다?”
“프, 프로는 무슨! 진짜 프로랑 비교하면 이건 정말로 낙서…….”
“어이, 거기 두 사람! 진로 상담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수업에 집중하는 게 어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권성하의 목소리가 컸던 탓에 선생님께 주의를 받자, 두 사람은 고개 숙여 사과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후에도 은지한은 수업보다 페이지를 넘겨 가며 권성하의 그림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 미안! 수업 중에 멋대로 페이지를 넘겨서. 몇 페이지였더라…….”
“아니, 난 괜찮으니까 얼마든지 구경해도 돼. 사실 내 그림을 놀리지 않고 진지하게 봐 준 사람은 지한이 네가 처음이거든.”
“그게 무슨……?”
은지한이 권성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 1교시가 끝나고 찾아온 쉬는 시간이었다.
“지금이다! 소환! ×덕 안경 돼지 새끼의 술!”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크게 소리치며 유난을 떨었다.
그러자 갑자기 권성하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잘게 떠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하야, 왜 그래? 어디 아파? 보건실에 데려다줄까?”
“괘, 괜찮아. 너는 그냥 여기 가만있어. 나한테 신경 쓰지만 않으면 될 거야. 알았지?”
“……?”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권성하는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남학생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그사이 여학생들이 은지한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여러 가지를 물어봤지만, 은지한의 시선은 시종일관 권성하에게 향해 있었다.
그 순간, 이내 각오를 다진 듯 권성하가 충격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꿀꿀! 주인님의 부름을 받들어 ×덕 돼지 소환에 응했다능!”
“늦어, 이 돼지 새끼야!”
퍽!
“커헉!”
꿇어앉아 돼지 흉내를 내던 권성하는 한 녀석이 전력으로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답답한 비명을 토해 내며 몸을 웅크리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데 은지한이 더욱 충격적으로 느낀 것은 권성하의 모습을 보고 반 아이들 모두가 함께 웃고 떠들며 비웃는다는 것이었다.
“주인님이 불렀으면 재깍재깍 달려와야지, ×나 늦네. 권성하, 이 씨×럼아. 너, 어제 우리 단톡방 멋대로 나갔더라? 왜? 우리랑 같이 있는 게 싫어? 친구들 부탁 몇 개 들어주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빴구나? 우리 성하.”
“그, 그게 아니라 엄마가 폰을 잃어버리셨는데, 일 때문에 잠시 내 폰 좀 빌리자고 하셔서…….”
“그냥 우리랑 같이 있는 게 싫었으면서 변명은, 씨발. 왜? 아예 고양이가 빌려 갔다고 하지. 그리고 내가 분명 경고했지. ×덕 돼지체 빼먹으면 뒈지게 처맞는다고. 성하, 요새 친구들 말도 잘 안 듣고 부탁도 잘 안 들어주고. 안 되겠네.”
“자, 잠깐만, 민철아! 내가 진짜 안 빌려주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집에 돈이 없어서 그래! 한 번만 봐주면 다시는…….”
“아가리 싸무시고. 뭐 하냐? 망 안 보고. 쉬는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지금은 짧고 굵게 끝낼게. 학교 끝나고 진하게 보자. 알았지? 야, 이 새끼 세워.”
박민철의 지시에 그를 따르던 똘마니 둘이 킥킥거리며 권성하를 세워 일으키자, 권성하가 울면서 박민철에게 부탁했다.
“미, 민철아! 미안해! 내가 다음에는 꼭 돈 가져올게! 제발 한 번만…….”
“꽉 잡아라. 빗맞으면 너희가 대신 맞는다.”
그렇게 박민철이 한껏 잡아당긴 주먹을 힘껏 뻗어 권성하의 배를 가격하려던 순간!
턱.
“뭐, 뭐야, 이 새끼? 언제…….”
어느새 박민철과 권성하의 사이를 가로막은 은지한이 박민철의 주먹을 한 손으로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새끼, 무슨 악력이……!’
필사적으로 끙끙거려도 주먹이 바위에 박힌 것인 양 꿈쩍도 하지 않자, 그제야 박민철과 무리의 표정도 달라졌다.
“내 짝꿍한테 무슨 볼일인지 모르겠는데,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땐 정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은지한은 쥐고 있던 박민철의 주먹을 놓아주며 경고했다.
사실 은지한은 학교에서 문제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하물며 학급 친구들과 싸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가족이 걱정할뿐더러, 최악의 경우에는 자신 때문에 삼촌까지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어떤 일에도 나서지 않고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는 박민철의 주먹을 막았고, 권성하를 지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일을 만들기 전에 여기서 경고를 하고 끝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 체면을 왕창 구긴 채 멋없이 자리로 돌아간 박민철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저 개새끼가 애들 앞에서 나한테 ×쪽을 줘? 넌 씨발아, 학교 끝나고 보자.’
“괜찮아? 혼자 걸을 수 있겠어?”
“나, 나는 괜찮다능. 아니! 괜찮아…….”
박민철은 권성하를 부축하는 은지한을 노려보며 복수를 다짐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