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초대해 놓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위원장님. 청와대 브리핑이 생각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왔으니까요.”
집무실로 돌아온 천호진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고는, 곧바로 차를 타기 위해 전기 포트에 전원을 올렸다.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위원장님. 이 말씀을 좀 더 일찍 드렸어야 했는데…….”
“신경 쓰지 마십쇼. 대형 길드 일곱 곳을 정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어휴! 그렇다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길드 연합의 주력을 무너뜨린 분도, 길드장들로부터 정보를 알아내신 분도 모두 위원장님이 아니십니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 주신 분 앞에서 생색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물이 끓어오르자 천호진은 차를 다려 윤수호와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에 마침 좋은 찻잎이 들어와서 말입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향기가 좋군요. 마음에 듭니다.”
“그것참 다행입니다. 하하하!”
따뜻한 차로 입술과 혀를 축인 천호진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당연히 알고 계실 테지만, 언론에서는 이번 일을 2차 범죄와의 전쟁이라 부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주목받는 상황이지요. 특히 위원장님께서 밝혀 주신 대형 길드들의 실체와, 그들이 지금껏 저지른 수많은 범죄는 세간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군요.”
담담하게 대답하며 차를 홀짝이는 윤수호의 모습에, 천호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혀 아쉽지 않으신 겁니까?”
“……?”
“솔직히 말씀드릴 필요도 없지요. 이번 작전의 핵심은 위원장님이셨고 가장 큰 공적을 세우신 분도 위원장님이십니다. 그 덕분에 현재 대한민국은 축제 분위기지요. 해가 떠 있는 낮에도 길드의 범죄를 걱정하던 시민들이 이제는 안심하고 당당하게 외출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상을 찾아 주신 위원장님이 세우신 공적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요.”
“그렇군요.”
“허허! 너무 남의 일처럼만 말씀하시니, 되레 제가 다 속상하군요.”
“…….”
그의 발언에 살짝 놀란 윤수호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자, 천호진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속내를 담담히 꺼내놓았다.
“위원장님의 부탁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긴 했지만, 지금 국민은 특무대가 이번 작전을 주도하고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위원장님의 존함은 들어 있지 않지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저 역시 특무대의 일원이고, 특무대 대원들이 도주하는 빌런들을 검거한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순조롭게 빌런들을 검거하는 건 어려웠을 겁니다.”
“맞는 말씀이지만, 그조차도 위원장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공적을 저희에게 돌리려 하십니까?”
안타까움이 가득한 천호진의 물음에 윤수호는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는 피식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보아하니 총사령관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이유가 저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으신 모양이라 그런 것 같군요.”
“솔직하게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위원장님의 존재만으로도 국민에게는 큰 위안과 안심이 될 테니까요. 물론 이게 제 욕심이라는 것도, 그로 인해 위원장님의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죄송합니다.”
천호진의 솔직한 고백에 윤수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혀 죄송할 일이 아니니까요. 총사령관님께서 진심으로 국민을 아끼고 이 나라를 지키고 싶어 하신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제 존재가 우리나라 국민에게 큰 위안과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도 기쁘게 생각할 겁니다. 만약 저 혼자였다면 총사령관님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봤을 수도 있겠죠.”
윤수호는 차로 입술을 축인 후에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총사령관님이 국민을 진심으로 생각하시는 것만큼, 저 또한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제 가족입니다. 제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면 좋든 싫든 제 가족은 세간의 큰 관심을 받게 되겠지요. 그로 인해 가족의 삶이 사람들에게 간섭받고 변화하는 걸 저는 바라지 않습니다. 제 꿈은 그저 어디까지나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니까요.”
윤수호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던 천호진은 그의 말이 끝나자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하아, 위원장님께서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지만, 역시 사죄드리지 않고서는 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습니다. 제 과욕 때문에 위원장님께 불편을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왜 제가 위원장님을 이토록 신뢰하는지, 지금처럼 의지하는지 말입니다.”
수백 년 만에 돌아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을 그때부터, 원한다면 대한민국 전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지금에 와서도 변치 않는 사람.
그저 가족과의 행복이 전부일 뿐인, 한결같이 수천 년을 우직하게 버텨온 소나무 같은 사람이기에, 윤수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저도 총사령관님을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어휴! 제가 드릴 말씀을 먼저 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하면 염치 불고하고, 이번 일은 특무대에서 모든 공적을 독식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덕분에 특무대의 평판도 지난 어느 때보다 높고 지원자도 작년의 세 배 이상 늘었지 뭡니까? 하하하!”
“그것참 다행이군요.”
윤수호는 웃으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 나라는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언제든 환영할 테니까요.”
“유념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때마침 도착한 한 통의 문자를 확인한 윤수호는 천호진에게 양해를 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급한 일이 생겨서 일어나야 할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급한 일이라고 하시면……?”
“숨어 있는 쥐새끼를 찾았다네요.”
* * *
지난날 윤수호가 정태수를 직접 심문한 직후, 금설령과 그 무리의 은신처를 알아낸 그는 직접 금설령이 숨어 있다는 은신처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벌써 도망친 건가? 감이 좋은 녀석이군.’
하지만 급하게 도망친 탓인지 적게나마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윤수호는 특무대 수색팀을 적극 활용하여 그들의 뒤를 추적했다.
그와 동시에 항구와 공항의 보안 감시 인원을 늘려 더욱 철저하게 틀어막았는데, 대형 길드 일곱 곳이 동시에 무너지자 인력이 그만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금설령과 그 무리가 도망칠 곳은 더욱더 줄어 버렸다.
도주가 급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흔적들도 많이 남고, 수색팀은 그런 녀석들의 목덜미를 빠르게 압박하며 접근해갔다.
결국 금설령과 그 무리는 경기도의 한 이름 없는 야산에 포위당한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위원장님께서 오실 때까지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그저 놈들을 쫓으면서 위치만 보고해도 충분하니까.”
“단결!”
그들은 욕심을 내지 않고 일정 이상 거리를 두면서 끈질기게 금설령 무리를 추격했다.
‘성가신 놈들!’
금설령은 마음이 초조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나라를 뜨고 싶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뒤를 쫓는 수색팀의 존재도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한 번은 그들을 떼어내기 위해, 일부러 함정으로 유인하는 흔적을 흘리고 수색팀을 노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색팀은 귀신같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함정을 피해 끝까지 그들을 추적하며 거리를 주지 않았다. 마치 다친 사냥감의 뒤를 끈질기게 뒤쫓는 하이에나처럼.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금설령은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라의 특무대를 너무 얕봤다는 사실을.
그들의 조직력과 대응력, 실력은 아무리 자신이 오버 알터라고 해도 만만히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결국 자신들은 독 안에 든 쥐라는 사실을 깨달은 금설령은,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다스리며 오러 컨트롤에 집중했다.
“대, 대주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서둘러 도망쳐야…….”
“조용히 해라. 도망칠 곳은 없다. 이미 우리는 패배한 것이다.”
“그게 무슨…….”
“이런, 젠장! 좋습니다! 그럼 우리끼리라도 도망칠 테니, 대주께서는 알아서 살아남으십쇼!”
금설령의 부하 중 대다수가 그를 버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들에게는 지금까지 모셨던 대주의 목숨보다 자신들의 목숨이 훨씬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아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금설령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산에서 울린 비명이 떠난 부하들의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배신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순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거진 나무 그림자 너머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수호였다.
“도망은 포기한 건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보다 내 관심은 지금 내 목숨이 아니오.”
금설령은 그때까지 갈무리한 자신의 기운을 은은하게 드러내면서 윤수호를 노려보았다.
“웅란을 쓰러트리고 10만의 길드 연합까지 무너트린 당신의 힘, 그 절대적인 힘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소.”
쿠구구구구구구구구!
그 순간, 금설령의 몸에서 웅혼한 기세가 노도와 같이 흘러나왔다. 기세만으로 땅이 진동하다가 지면이 갈라지면서 나무가 흔들렸다.
손을 대면 베일 것 같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웅란의 기세와는 정반대의 성질이었다.
슥.
그 순간, 윤수호와 자신의 사이에 벌어져 있던 거리를 지워 버린 금설령의 움직임이 신묘했다. 아무런 소리도, 징조도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코앞에 있을 만큼 은밀했던 것이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실력이 뒤처지는 내가 더 불리하다. 이 일격에 모든 걸 쏟아붓는다!’
그런 각오로 내지른 금설령의 주먹은 윤수호의 손에 잡히더니 이내…….
빠드득!
“크윽……!”
오러와 함께 주먹까지 부서졌다.
윤수호는 그의 눈을 보며 담담하게 경고했다.
“네 녀석이 나에 대해 뭘 알고 싶은지,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아끼는 동생이 너 같은 것 때문에 모진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이지.”
쩌엉!
“커억!”
윤수호의 주먹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그의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들자, 금설령이 눈을 부릅뜨며 피를 토했다.
“엄살 피우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쩌엉!
“끄아악!”
인내심이라면 홍룡회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금설령의 입에서 단 두 방 만에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오러로 몸을 보호해도 소용이 없었다. 윤수호의 주먹이 몸에 틀어박히는 순간, 정신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윤수호의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그는 대략 한 시간 정도를 처맞다 기절한 금설령을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에게서는 아직 알아내야 할 정보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뜻인즉, 금설령의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란 뜻이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