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화르륵! 화륵!
꿀꺽.
흩어진 트레일러들의 잔해와 그 위로 피어오르는 불꽃, 그리고 검은 연기.
그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화룡(火龍)의 위용에, 주위의 분위기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했다.
그것은 적도,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적과 아군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군은 윤수호의 등을, 적군은 윤수호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 설마 저게 갑자기 달려들거나 그러진 않겠…….”
“야, 이 미친……!”
이런 상황에 혹시라도 불문율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설마’라는 단어를 꺼내선 안 된다는 것일 터였다.
누군가의 불안한 짐작대로,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수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의 손가락을 따라 화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격! 저 이상한 것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놈을 친다!”
“비능력자들은 엄호 사격을 개시한다! 놈의 머리통과 심장에 총알을 몽땅 처박아 버려!”
“가자!”
일곱 길드의 행동대장들이 이끄는 길드 연합이 흉흉한 기세로 기세를 잔뜩 끌어 올리며 단 한 명의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몬스터를 잡아 산 채로 가죽을 벗겨라! 돌아가신 길드장님의 원한을 갚는 거다!”
그중 크게 소리치며 선두에 선 길드는 다름 아닌 패명 길드였다.
그들이 위험에도 불구하고 선두에 선 이유는, 그들의 말처럼 결코 한동진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한동진과 함께 주력이 몰살당한 패명 길드는 사실상 침몰하는 배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남은 길드원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길드에 가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 전장에서 가장 눈에 띄어야만 했고, 충성심과 실력을 꾸준히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패명 길드를 선두로 알터 빌런들이 쇄도하자, 그와 동시에 비능력자 빌런들은 가지고 온 화기들을 총동원하여 윤수호를 집중 사격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콰콰콰콰콰쾅!
총알이 쉴 새 없이 빗발치고, 다양한 종류의 폭발성 화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가 폭발했다.
“연기 때문에 대상이 보이질 않잖아!”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검은 연기가 윤수호를 삼키고 어느새 동료들이 윤수호의 지척까지 다다르자, 빌런들은 사격을 중지하고 사태를 지켜보았다.
물론 이 정도로 윤수호를 해치웠을 거란 기대는 그들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이라도 녀석의 힘을 깎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데…….
콰우우우우우우!
그들의 바람은 검은 연기를 뚫고 날아오는 화룡 앞에서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화르륵!
윤수호의 손끝을 따라 화룡이 날아갔다.
거대하고 긴 화염의 몸통을 불태우며 지면을 스치듯이 날아간 화룡은 선두에서 달려오던 빌런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불! 불!”
“커허헉!”
차라리 화룡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타 죽은 놈들은 행복한 편이다.
화룡 근처에 있던 빌런들은 몸에 불이 붙어 타 죽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면서 숨을 거두었고, 그보다 멀리 있던 녀석들은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서 바닥에 몸을 뒹굴거나, 잘못 숨을 들이마셨다가 기도가 화상을 입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을 쳤으니까.
그렇게 한 번의 돌진에 수천 명의 빌런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나 문제는 화룡이 한 번 지나가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화르륵! 콰우우우우우!
“또 돌아온다!”
“피해!”
마치 호수 위를 유영하는 뱀처럼 윤수호의 손끝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며 먹잇감을 집어삼키는 화룡.
화룡이 움직일 때마다 무수한 빌런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화룡을 공격하는 자들도, 피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모두 의미 없었다. 그들에게 화룡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물러서지 마!”
“여기서 도망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놈이 코앞이라고! 돌격해!”
“저 괴물만 죽이면 저것도 사라진다!”
그 피해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지만, 빌런들의 숫자가 워낙 많은 탓에 어느새 선두가 윤수호의 코앞까지 쇄도하였다.
“죽어라!”
그렇게 사방팔방에서 빌런들이 전력으로 윤수호를 덮쳐드는 바로 그 순간!
콰우우우우우!
자유롭게 빌런들을 집어삼키던 화룡이 윤수호의 머리 위로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화르륵!
필사적으로 쇄도하여 윤수호의 목에 칼을 박아 넣을 생각뿐이었던 빌런들은 당연히 비명조차 질러 보지 못하고 재가 되었으며…….
“크아아악!”
“뜨, 뜨거워! 누가 불 좀……!”
그나마 멀리 있던 빌런들은 폭발하는 화력에 불이 붙은 채로 날아가며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빌런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건 죽어 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 저게 뭐야?”
“검?”
“용이 검으로 변한 거야?”
그랬다.
벼락처럼 떨어진 화룡은 거대한 폭발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윤수호의 눈앞에는 한 자루의 타오르는 검이 나타났다.
문제는 그 검 한 자루가 방금 봤던 거대한 화룡보다 수십 배는 더 위험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이런 미친……. 1페이즈도 못 깼는데 2페이즈로 넘어간 건 아니겠지?”
멀리서도 느껴지는 화검의 열기가 윤수호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게 이글거리는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살아남은 빌런들을 훑어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최후를 선언했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군. 지금부터는 좀 더 빠르게 치우도록 하지. 저녁은 가족과 함께 먹기로 했거든.”
“……!”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윤수호가 불의 검을 횡으로 그었다.
그리고 일어난 광경에, 뒤에서 지켜보던 특무대 대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저, 저게 대체 뭡니까?”
“불의 파도? 아니, 저 정도면 파도가 아니라 해일인가……?”
“대체 저런 걸 어떻게 막으라고…….”
지켜보는 아군마저도 저도 모르게 절망에 빠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격이었다.
하물며 그 화염의 해일과 마주 서 있는 빌런들은 과연 어떤 심경일까?
“포, 포기하지 마!”
“전력으로 힘을 모아라! 다 같이 오러를 합치면 부술 수 있다!”
“타앗!”
“크아합!”
윤수호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사실도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그들은 뒷일에 대해선 고민조차 하지 않고 전력을 끌어 올려 화염의 해일에 부딪혔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불의 해일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그 모든 것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며 사납게 돌진했다.
결국 빌런들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죽을 걸 알더라도 끝까지 대항하거나, 아니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거나.
하나 그 선택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여지없이 불의 해일이 빌런들을 집어삼켰다.
더러는 선택하지 못하고 삶을 포기한 채, 무기를 떨구고 주저앉아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문제는 불의 해일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팟!
전방을 화룡과 불의 해일로 쓸어버린 윤수호가, 이번엔 후방에 남아 있던 빌런들의 무리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움직임은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검무와도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몽롱하게 빠져들 것만 같은…….
그러나 드러난 결과는 절대로 몽환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화염지옥.
화검이 춤을 출 때마다 휘몰아치는 화염 폭풍이 천지사방을 집어삼키고…….
그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불타오르는 지상은 화염지옥을 이 땅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재앙 그 자체였다.
“나, 난 도망칠 거야! 저런 괴물을 어떻게 죽이라고!”
“여기 있다간 개죽음당할 뿐이라고!”
“가, 같이 가!”
결국 10만 명에 달하던 길드 연합이 붕괴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한편, 전장을 예의주시하던 특무대도 연합이 붕괴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합이 무너졌다! 위원장님의 지시대로 지금부터 도주자들을 확보한다!”
“도망치는 개들이 더 위험하고 필사적인 거 알지? 다들 조심해서 놈들을 신속하게 확보한다. 알았나!”
“단결!”
공승환을 비롯한 치우팀 팀원들이 인원을 나눠 검거 작전에 뛰어들었다.
이번 작전에 대부분의 대태러팀 인원들이 참여한 만큼, 그들의 숫자도 절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연합의 숫자가 반 이상 줄어든 상황.
“이런 ×미!”
“특무대다!”
“씨발! 그냥 뚫고 지나가!”
자신들을 잡기 위해 어느새 포위망을 형성한 특무대와 마주친 빌런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가만히 있어! 저항하면 다친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끝까지 반항하는 놈들은 그 즉시 사살한다!”
“어차피 쫄아서 힘도 못 쓸 거, 쓸데없이 뭐 하러 반항하냐, 이 병신들아.”
이미 윤수호라는 괴물에게 심하게 데인 그들의 전의는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위축된 그들 중에서 오러를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빌런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러는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지고 있어도 뜻대로 사용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태러팀이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를 줍는 것인 양 도주하는 빌런들 검거하고 있을 때, 윤수호 역시 따로 도망치는 물고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팟!
“흐어억!”
“괴, 괴물!”
흑산 길드의 정태수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윤수호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네놈이 직접 나를 쫓아올 줄이야…….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네 녀석이 마지막이다, 정태수.”
‘내가 마지막이라면 다른 길드장들은 모두 체포된 건가.’
“하아…….”
정태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부하들을 뒤로 물리고 직접 윤수호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에게 얌전히 두 손을 내밀었다.
“우리의 완패다. 솔직히 네가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괴물인 줄 알았다면 이런 무모한 계획을 세울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윤수호는 그가 내민 두 손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짓이지?”
“보면 몰라? 항복하는 거잖아. 체포하라고. 더 이상 저항할 병력도, 의지도 없으니까.”
그제야 윤수호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이군.”
“착각?”
“너를 비롯한 이번 일의 주동자들은 전부 현장에서 사살된 것으로 처리할 예정이다. 즉, 체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자, 잠깐만! 사살이면 사살이지, 처리할 예정은 또 무슨 말……입니까?”
폐부 밑바닥에서부터 근질근질 차오르는 불안함에 정태수의 목소리가 떨리고 말투도 존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윤수호의 대답은 시종일관 담담할 뿐이었다.
“너희는 내가 따로 데려갈 예정이다. 너희한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이런 미친!”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정태수가 아연실색하며, 전력으로 윤수호에게 달려들었다.
이래 봬도 대형 길드의 길드장까지 오른 빌런이다. 그의 움직임과 오러의 위력은 다른 빌런들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콰직!
“커헉!”
윤수호의 주먹 한 방에, 속에 든 것들을 전부 게워 내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는 정태수를 왼쪽 어깨에 걸쳐 메고선, 뒤이어 도착한 특무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녀석들은 체포해서 데려가세요. 이 녀석은 제가 가져가죠.”
“단결! 수고하셨습니다. 위원장님.”
“여러분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윤수호는 존경심이 극에 달한 대원들의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받으며 그렇게 현장을 떠났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