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안가 근처에 도착한 은지한과 서정완은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했다.
“그 별장은 한때 혈창 길드의 마스터가 안가로 사용했던 곳이다. 그만큼 뭐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신중에 신중을 기해라.”
끄덕.
“탈출 루트는…….”
“그 전에 잠깐 단둘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하아…….”
은지한의 부탁에 서정완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길드원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은지한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시간 없으니까 짧게 해라. 할 얘기가 뭔데?”
“탈출 루트는 필요 없어. 어차피 누나만 구하면 되니까. 나는 오늘 여기서 죽는 거잖아. 안 그래, 아저씨?”
“…….”
너무나도 담담하게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이는 무심한 열다섯 소년의 눈빛에 서정완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아저씨.”
“약속?”
“누나를 납치한 그 ‘몬스터’란 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죽일게. 그러니까 아저씨는 누나는 구해서 길드가 찾을 수 없는 곳에 누나를 풀어 줘.”
“미쳤냐? 내가 왜 그런 약속을……!”
서정완이 거부하려 하자, 은지한은 품속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약속이 싫으면 의뢰라고 생각해도 좋아. 부탁할게.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아저씨밖에 없네.”
서정완은 무거운 표정으로 통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냐, 이건?”
“내가 지금까지 받은 보수. 길드가 생색내려고 준 돈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한 푼도 안 쓰고 모아 둔 만큼, 섭섭할 정도로 적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돈을 받고 나더러 길드를 배신하란 말이지? 미쳤구나, 너? 난 이거 보지도 않았고,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도 않은 거다.”
서정완이 단칼에 거절하자, 은지한은 통장을 바닥에 떨어트리더니 몸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건 이제 나한테 필요 없으니까.”
“야! 야, 인마!”
서정완의 외침에도 은지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안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스슥!
밤바람이 형상을 가지면 이러할까?
은지한은 어두운 숲속을 그야말로 귀신처럼 내달렸다. 그 속도는 바람보다 빠른데 풀잎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질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가의 구조는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는 트랩이 설치되어 있을 만한 위치를 교묘하게 피해 갔다.
물론 지금은 트랩이 전부 제거된 상황이라는 사실을 그는 몰랐지만, 놀랍게도 은지한이 피한 곳들은 전부 본래 트랩이 설치되어 있던 곳들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안가의 지척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한 은지한.
‘집 안에 사람이 있다.’
인기척은 두 명이었고, 평범했다. 성별이나 정체까지 구분하긴 힘들지만, 한 명은 누나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런데 두 사람을 감시하거나 경호하는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기감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병력인 걸까?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존재감 때문에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네가 지한이구나.”
“…….”
훈련병 시절에는 기척을 숨기고 접근한 교관들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알터로 각성하고, 숱한 실전 경험을 쌓으며 마침내 오버 알터까지 각성한 이후로는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척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적은 말이다.
그러나 기척도 없이 접근한 적을 발견했음에도 은지한의 심장은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고요했고, 기세는 밤하늘처럼 잠잠했다.
윤수호조차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은지한이 맞는지 허상인지, 육안으로는 구분이 힘들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그 사실이 윤수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완벽한 암살 병기다. 이 정도로 이상적인 암살자는 무림에서도 드물어. 지한이의 나이가 이제 고작 열다섯이라고 했던가?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군.’
“대화를 좀 했으면 하는데…….”
그 순간, 윤수호의 제안은 의미 없다는 듯 은지한의 모습이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모습도, 기척도, 숨소리도, 심장 박동도, 완벽하게 차단하고 숨어 버린 극상의 은신술이었다.
은지한의 은신은 그의 단검이 윤수호의 목을 베어 가를 때까지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
툭.
무심한 듯, 아무렇지 않게 허공에 손가락을 찌른 윤수호.
그의 손가락은 정확히 은지한의 수혈을 자극하였다.
‘이건…….’
한데 점혈을 하는 윤수호의 기감에 이질적인 전파 같은 것이 걸렸다. 전파는 은지한의 몸속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심장 쪽이었다.
일단 수혈은 제대로 적중했다.
수혈은 찔리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잠에 빠지는 혈이고, 은지한을 상처 없이 빠르게 제압하는 데에 이만한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번쩍!
눈을 반쯤 감았던 은지한이 눈을 번쩍 뜨며 빠르게 윤수호의 지척에서 벗어나 거리를 벌렸다.
그러한 대응에 윤수호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윤수호는 그가 수혈을 이겨 낸 방법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수혈을 자극받은 순간 오러를 이용해 똑같은 혈 자리를 내부에서 자극해 각성한 건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곤 하지만, 실제로 그걸 할 수 있는 녀석은 처음 보는군.’
윤수호는 피식 웃었다.
‘스승님께서는 나를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무의 천재라고 말씀하셨지. 만약 스승님께서 지한이를 보셨다면 뭐라 말씀하셨을지 궁금하네.’
하지만 윤수호의 미소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은지한의 강함을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손에 잡힐 듯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은지한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위험했다. 방금 그건 뭐지? 오러 컨트롤이 0.01초만 늦었어도 대응조차 못 해 보고 기절했을 거야!’
은지한의 이마에서 오랜만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여전히 은신은 풀리지 않았지만, 그는 좀처럼 쉽게 윤수호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그의 모습을 살폈다.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상대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나 오히려 그런 상황을 윤수호가 바라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제 좀 대화할 여유가 생긴 것 같은데. 먼저 고백하자면 난 네 누나를 납치한 게 아니야. 구해 준 거지.”
“…….”
윤수호의 말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윤수호를 경계하고 있었다.
“역시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건가? 하는 수 없지.”
윤수호는 안쪽에 미리 정해 둔 신호를 보냈다.
“야, 은지한! 너, 지금 어디 있어! 숨어 있지 말고 당장 안 나와?”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가 밖으로 뛰쳐나와 소리친 사람은 놀랍게도 은지연이었다. 곧이어 은지연의 뒤를 따라 윤수아도 나와서 애타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지한아! 엄마야! 엄마 기억하니?”
그 순간…….
스르륵…….
은신이 풀리며 달빛 아래로 은지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은지한의 눈동자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누나도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엄마의 모습이었다.
불과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엄마와 헤어져, 비사 길드의 암살자로 혹독하게 훈련받았다. 은지한의 지난 7년은 평범한 사람들의 수십 년에 필적하는 경험이었고, 그 수많은 경험과 고통 속에서 엄마의 얼굴은 완전히 잊히고 말았다.
아니, 잊힌 줄 알았다, 오늘…… 지금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엄마……?”
자신을 보고 울고 있는 엄마를 눈에 담은 은지한의 눈가에서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너, 인마…….”
윤수아와 은지연도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며 아들과 동생을 안아 주기 위해 그에게 달려갔다.
“……!”
스팟!
그 순간, 은지한은 달려오는 두 사람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흠칫 놀라더니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당연히 윤수아와 은지연이었다.
“지한아?”
“대체 왜……?”
“오지 마요! 내 가슴 안쪽에는 수술로 폭탄을 설치해 뒀어요. 이게 폭발하면 나뿐만 아니라 두 사람도 위험해져요.”
“너, 너. 그게 무슨…….”
“미안, 누나. 말하지 않아서…….”
은지한은 쓰게 웃었고, 은지연의 두 눈에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털썩…….
“엄마! 정신 차려 봐요! 엄마!”
자식의 가슴에 폭탄이 설치됐다는데 온전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강한 정신력을 가진 윤수아조차 그 말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은지연이 그런 엄마를 부축하는 사이, 윤수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은지한에게 물었다.
“방법은?”
“없어요. 애초에 오러에 반응하면 즉각 폭발하게 세팅되어 있어서, 함부로 오러로 건드리지도 못하게 해 놨거든요. 게다가 감시조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거예요. 상황이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흘러가면 녀석들은 길드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할 거고, 길드장은 폭탄의 스위치를 주저 없이 누르겠죠.”
“그런가.”
“그러니까 형한테 하나만 부탁할게요. 형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으니까, 우리 누나랑 엄마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 대신 꼭 두 사람을 지켜 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 부탁은 들어주기 힘들겠는데.”
예상 못 했던 윤수호의 대답을 듣고 은지한의 눈빛에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가던 순간.
윤수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담담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가족에는 너도 들어 있다, 은지한. 네가 너를 포기한다고 해도, 나는 너를 포기할 생각이 없거든.”
“……!”
윤수호는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낮은 자세를 취했다.
‘오러에 민감한 기계라면 비슷한 기(氣)에도 반응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기를 사용하지 않고 폭탄이 반응하지도 못할 속도로 한순간에 그것을 망가트린다. 말은 쉽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윤수호는…….
“움직이지 마라.”
팡!
그가 주먹을 가볍게 뻗었다. 그러자 가볍고 시원한 파공음이 그의 주먹 끝에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털썩…….
“……?”
은지한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의로 앉은 것이 아니다. 가슴 쪽에 강한 외부의 충격을 느끼고 쓰러진 것이다.
그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윤수호를 쳐다보았고, 윤수호는 그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수라파갑권이라는 무공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초진동으로 상대의 내부를 파괴하는 주먹이지. 이 경우, 위력을 조절해서 네 몸속에 심어진 폭탄만을 노려 출수했다. 폭탄의 위치는 아까 점혈을 하면서 확인해 뒀거든.”
“그게 무슨…….”
은지한은 윤수호의 말을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금세 놀라서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느껴지지 않아!’
가슴 안쪽에서 느껴지던 이물감은 그대로였지만, 24시간 내내 폭탄에서 느껴지던 그 이질적인 전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안쪽에 남은 망가진 폭탄은 나중에 수술로 제거하면 되겠지. 어때? 이래도 아직 부족한 게 남았나?”
“아아…….”
그리웠던 누나,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엄마와 재회했다. 그것만으로도 소원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눈앞의 은인은 절대로 가질 수 없을 줄 알았던 자유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 사실이, 작금의 현실이…… 너무 가슴 벅차 터져 나오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잘 돌아왔다. 지한아, 지연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윤수호는 그저 미소와 함께 돌아온 조카들을 환영할 뿐이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