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어두운 승합차 안.
한 소년이 자신의 누나와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누나가 혹시라도 다친 곳은 없는지, 표정이 어둡진 않은지 살피느라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누나, 정말로 괜찮은 거 맞지? 혹시 이상한 녀석들이 건드리고 그러는 건 아니지?”
-나야 뭐, 갇혀서 지루해 죽을 거 같은 거 빼곤 괜찮아. 그나저나 너는? 혹시 그 새끼들이 아직도 위험한 거 시키는 거 아니야? 만약 그러기만 해. 나, 그냥 여기서 콱 혀 깨물고 죽어 버릴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간단한 심부름만 좀 할 뿐이야. 그렇게 위험한 것도 아니고.”
-아니긴 개뿔! 너, 진짜 누굴 속이려고……. 조금만 기다려, 지한아. 누나가 꼭 여기 탈출해서 데리러…….
뚝!
“자! 감격의 남매 상봉 시간은 여기까지. 어때? 누나가 무사한 모습을 확인하니 꿀꿀한 기분이 좀 나아지시나, 우리 도련님?”
“잠깐만 닥쳐 줄래. 누나 목소리를 × 같은 아저씨 목소리로 덮어쓰기 싫어서 말이야.”
전화를 마음대로 끊어 버린 중년인은 소년의 요구에 피식 웃으며 쿨하게 거절했다.
“그럴 순 없겠는데. 아무래도 일할 시간이 가까워져서 말이야. 공은 공, 사는 사. 이제 구분할 때가…….
그 순간.
스핏.
사내는 자신의 목에 날카로운 날붙이가 한 방울 피를 내고 나서야 자신의 목에 칼날이 닿았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곳은 좁은 승합차 안. 게다가 사람도 소년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내의 목에 소년의 단검이 닿을 때까지 누구도 소년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알았으니까 딱 1분만 닥쳐 주라. 그 정도면 아저씨 목숨값으로는 꽤 비싸게 쳐주는 것 같은데. 아닌가?”
결국 중년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긴장한 다른 떡대들도 반쯤 자리에서 일어났던 어색한 자세를 고쳐 바로 앉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소년의 감시 및 사내의 경호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형식적인 임무인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동안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혹시라도 소년의 사색을 방해할까 봐.
소년의 요구대로 1분이 끝나자,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본인이었다.
“임무는?”
“야, 인마. 그 전에 하나만 얘기하자. 툭하면 남의 모가지에 칼 갖다 대는 버릇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너 때문에 모가지에 난 기스만 이어도, 인마! 목걸이가 수십 개는 나올 거다, 수십 개! 차라리 그냥 죽이든가! 어차피 네 팔자나 내 팔자나 쓰다 버려질 운명인데, 나라도 좀 편하게 가면 좋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임무.”
“하아……. 하여간 어른 얘기는 귓등으로도 안 듣지. 하여간 저 싹퉁바가지 새끼. 자! 인마.”
중년인은 소년에게 잘 접힌 종이 하나를 뒤로 던져 주었다.
소년이 그것을 받아 펼쳐 보니, 그건 다름 아닌 한 호텔의 도면이었다.
도면에는 여러 가지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소년의 눈은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목적지는 루스터클 호텔 스위트룸이다. 근처는 헬기 비행 금지 구역이라 입구에서부터 스위트룸까지 55층을 올라가야 하고, 가서 사진 속 두 사람을 암살하면 돼. 나머지는 살리든 죽이든 알아서 하고. 우리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정확히…….”
“10분.”
“5분이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미션에 실패하면 가장 먼저 네 누나부터 죽일 거야. 미션을 포기하고 도주해도 죽일 거고, 섣부르게 외부인과 접촉하거나 누이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시도만 보여도 죽인다.”
“알아, 안다고. 귀에 못 박히겠네.”
“나라고 하고 싶어서 앵무새처럼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줄 아냐, 이 썩을 꼬맹아? 매뉴얼대로 안 하면 내가 뒈지니까 하는 거지.”
소년은 차에서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아저씨도 참 고생이 많아. 갔다 올게.”
“조심해서 다녀와라, 망할 꼬맹이. 가서 뒈지면 더 좋고.”
드르륵, 탁.
“후우…….”
그렇게 차 문이 닫히자 떡대들은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며 긴장한 근육을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신참이 신기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궁금한 점을 물었다.
“선배님들,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하고 계셨던 거예요? 저 애가 그렇게 무서운 애예요?”
“뭐냐, 신삥? 너,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온 거야?”
“네? 아! 저야 뭐, 그냥 길드에서 선배들 따라가 배우라고…….”
“와! 이 새끼 패기 보게…….”
“까딱 잘못했다가 오늘 줄초상 날 뻔했네.”
신참이 주눅 들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떡대들은 어이가 없어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한편,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중년인이 낄낄거리다 신참의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어이, 신삥. 너, ‘리퍼’라는 코드 네임은 들어 봤냐?”
“리퍼요? 에이! 이 바닥에서 리퍼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대한민국 비공식 랭킹 1위 암살자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리퍼는 왜요?”
“지금 나간 썩을 꼬맹이가 그거거든.”
“그거라뇨? 네? 설마 저 꼬맹이……. 아, 아니, 저분이 리퍼라고요? 노, 농담하시는 거죠?”
신참이 식은땀을 흘리며 되묻자, 중년인이 심드렁하게 주변을 훑으며 대꾸했다.
“네 선배들 얼굴 봐라. 지금 이게 농담 같은가.”
“서, 설마……. 하지만 저 아이는 많아 봤자 이제 겨우 열다섯 살처럼 보이던데…….”
“잘 봤네. 맞아. 쟤 열다섯이야, 열다섯. 남들은 운이 좋아야 각성한다는 알터를 고작 열두 살에 각성한 걸로도 모자라, 훈련 시작한 지 1년 만에 지 가르쳤던 교관들 목 따고 다닌 놈이라고. 저 새끼는 천재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해. 심지어 남들이 처음 알터로 각성하는 열다섯에 쟤는 뭘 했는지 알아?”
“뭐, 뭘 했는데요?”
“오버 알터로 각성했다. 나이 열다섯에 오버 알터 능력자가 됐다고. 안 그래도 괴물 새끼가 진짜 사신이 된 거지.”
“…….”
신참은 중년인이 자신에게 농담하는 줄 알았다. 지금도 덜덜 떨고 있는 선배들의 모습만 아니었어도 절대로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아무리 천재라도 정도가 있지……. 정말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래서 참 안타까운 놈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나라 어둠의 정점에 설 수 있는 녀석인데, 통제가 안 되거든.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라 이거지. 저 괴물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네가 봤던…….”
“누나군요. 리퍼의 누나…….”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집애가 있어서 우리가 그 썩을 꼬맹이를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랬으면 진즉에 다 죽었을걸.”
“아무리 그래도 리퍼를 대하는 실장님의 태도는 너무 위험한 거 아닙니까? 거의 도발이나 마찬가지던데…….”
신참의 걱정에 중년인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며 손을 휘적거렸다.
“됐어, 됐어. 죽이면 죽지, 뭐. 어차피 저 녀석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말 안 듣는 녀석이나 무능한 나나 쓰다가 버려질 장기짝이나 마찬가지니까.”
“네? 리퍼가 쓰다가 버려질 거라고요?”
“아무리 잘 듣는 칼이라도 주인의 손을 거부하면 결국 그 칼이 주인의 목을 긋는 법이니까. 대충 험하게 굴리다 누이랑 같이 처리하려는 생각이겠지. 저 윗선 놈들은……. 어차피 길드야 리퍼 덕분에 반석 위에 올라선 지 오래니까.”
대답을 마친 중년인은 다시 폰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리퍼나 자신의 안위 같은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이…….
신참은 그런 중년인의 모습이 신경 쓰였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 * *
같은 시각.
루스터클 호텔에 들어선 소년.
늦은 저녁임에도 호텔은 로비에서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호텔의 숙박객은 물론이고, 호텔의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로 붐볐다.
하나 호텔 경비 중 그 누구도 소년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고작해야 중학생. 경비들이 신경 쓰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느 손님의 자제일 거라 생각한 경비들은 그 누구도 소년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호텔에 들어선 소년이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조작하였다.
그 순간.
파직!
“뭐야? 무슨 일이야?”
“정전?”
“빨리 어떻게 좀 해 봐요!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어? 폰도 먹통이잖아? 이게 갑자기 왜 이래?”
호텔에 미리 설치해 둔 재밍 장치가 작동하자 불이 꺼지고 통신 기기들이 먹통이 되면서 로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 순간.
스르륵.
소년이 입고 있던 옷이 순식간에 올 블랙의 야행복으로 바뀌면서, 소년의 모습이 로비에서 사라졌다.
슥.
소년은 검은 섬광이자 동시에 그림자였다.
아무리 감이 좋은 경비라도 소년의 존재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고, 소년은 순식간에 비상계단을 통해서 55층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55층에는 거래를 위해 접선한 길드장들의 부하들로 가득했다.
“안 보이면 몸으로 막아!”
“손에 걸리는 놈 있으면 그냥 죽여 버려!”
갑작스러운 정전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지자, 그들은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며 몸으로 통로를 막아섰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한 것이다.
그들의 시야나 동선을 피해 목표물로 접근하는 건 아무리 봐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귀찮게…….’
소년의 눈빛이 침잠하게 가라앉는 순간, 피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촤촤촤촤! 서걱! 촤아악! 스핏! 촤르륵!
“크아아악!”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안 보여!”
귀로 들리는 것은 동료들의 비명과 몸이 찢겨 나가는 섬뜩한 파육음뿐, 얼굴에 튀는 것은 동료들의 피와 살점이 전부였다.
그러나 극한의 공포도 잠시.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인 떡대들 중에는 당연히 알터로 각성한 빌런들 역시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역시 안력을 돋워 상대를 확인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들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널브러졌을 뿐이니까.
잘려 나간 사지와 머리, 내장 조각……. 그 모든 것들이 피 분수와 어우러져 통로에 흩날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통로를 뚫고 스위트룸을 박살 내며 들어선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자객들이 소년을 사방에서 덮쳐들었다.
하지만…….
스피피피피핏!
검은 실선이 소년의 주변에 무수히 피어났다 지는 것과 동시에 자객들의 오체분시된 육편들도 핏물과 함께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자, 잠깐……!”
“목숨만 살려 주면 대가는 얼마든지……!”
슈욱!
서걱! 촤악!
소년의 신형이 목표물이었던 두 사람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파육음이 터지며 두 사람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빡, 깜빡…… 번쩍!
그와 동시에 재밍이 복구되며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는 불빛들…….
“길드장님!”
“무슨 일이십니…….”
찰박, 찰박…….
후드득…… 툭…….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다급하게 올라왔을 때…….
“우읍…… 우욱!”
“길드장님! 길드장님!”
그들이 목격한 것은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 되어 버린 통로와, 한 폭의 지옥도가 되어 버린 스위트룸의 풍경뿐이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