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특무대 부속 병원의 산책 시간.
윤수호와 윤수아는 각각 부모님이 탄 휠체어를 끌고 병원 앞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아버지, 요새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게 말이다. 수호야, 네가 가르쳐 준 기체조인지 뭔지, 그거 열심히 따라 하니까 요새는 몸이 쌩쌩하구나. 아주 회춘한 것 같지 뭐냐. 하하하!”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쌩쌩한 모습을 애써 과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윤수호, 윤수아 남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머니는요?”
“나도 네 아빠랑 마찬가지지, 뭐. 요새는 눈도 예전만큼 잘 보이고. 오히려 안 움직이면 좀이 쑤셔서 잠도 잘 안 와서 병실 청소라도 하면 간호사 선생님이 어찌나 눈치를 주시는지……. 수호야, 엄마 그냥 VVIP실 말고 일반 병실로 옮겨 주면 안 될까? 뭣하면 퇴원해도 될 것 같은데…….”
“안 돼요. 그동안 고생하신 만큼, 힘들어도 호강 받으세요. 아들 명령입니다.”
오혜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고, 그런 어머니의 귀여운 투정에 윤수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마르질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휠체어 없이 걸어 다니시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더 조심하는 게 좋겠지.’
사실은 자신이 동생과 함께 부모님의 휠체어를 밀면서 이렇게 얘기도 나누고 산책도 하는 게 좋을 뿐이지만, 윤수호는 그런 본심을 가슴 깊이 숨겼다.
실제로도 부모님과 윤수아의 건강 회복은 의사들조차 경악할 만큼 빨랐다.
이는 윤수호가 호흡법과 기체조로 위장하여 가족에게 가르친 심법과 초식 덕분이었다.
가족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알기 쉽게 풀어 가르쳤다곤 하나, 만약 그 원본이 무림에 풀렸다면 무림 전체에 혈겁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을 무공들이었다.
물론 가족이 그 사실을 알 리도 없고 당사자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기에, 정작 가족들은 자신들이 배운 게 무엇인지 지금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 참! 그리고 수아 너는 부모님한테 간식 좀 적당히 사다 드려라.”
“윽! 역시 알고 있었어?”
윤수아가 눈치를 살피며 움츠러들자, 윤수호가 도끼눈을 뜨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럼 모를 줄 알았냐? 넌 인마, 장도 안 좋은 엄마한테 매운 떡볶이를 사다 드리면 그게 사약이지 간식이냐?”
“괜찮거든요? 그래서 내가 다 먹었거든요? 아, 아빠, 오빠 잔소리 좀 말려 봐. 아주 병원에 돌아올 때마다 시끄러워 죽겠다니까!”
“크흠! 뭐, 나라고 네 오빠 잔소리 안 듣고 사는 줄 아냐? 아빤 힘없어진 지 오래다.”
윤지석까지 헛기침을 하며 딸의 구원 요청을 외면하자 결국 윤수아는 엄마에게 매달려 투정 부리기 시작했고, 엄마는 그런 딸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윤수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가슴 한쪽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모습들, 이야기, 일상들이 매 순간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요즘이었다.
“아! 그리고 수아야, 산책 끝나면 나랑 갈 곳이 있으니까, 6시까지 준비해서 병원 앞으로 나와. 알았지?”
“갈 곳이 있다고? 어딜?”
“가 보면 알아.”
윤수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부모님은 뭔가 아는 것처럼 자신의 눈치를 슬쩍 피했기 때문이다.
‘뭔가 있어. 뭔가…….’
그래도 일단은 오빠의 부탁이기 때문에,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윤수아는 가볍게 외출복을 입고 외출을 준비했다.
“야, 야, 수아야! 너, 옷이 그게 뭐야? 얘가 참! 어딜 가는 줄 알고…….”
“아, 그러니까 어딜 가는데?”
“잔말 말고 따라와.”
“여보, 화이팅! 수아야, 힘내라! 크흠!”
그러자 함께 있던 오혜연이 보다 못해 딸의 손을 잡아끌었고, 윤지석은 그런 모녀를 바라보며 응원할 뿐이었다.
그렇게 약속한 6시가 다가왔다.
“대체 뭔데 이 난리들이냐고. 아니, 오빠하고 외출하는데 이렇게까지 꾸며야 하나? 하기야 오빠 모습을 보면 또 너무 내가 나이 들어 보이기는 하니까…….”
평소보다 한껏 꾸미고 옷에도 힘을 준 윤수아는 병원 정문으로 향했다가, 누군가를 확인하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강 실장님?”
놀랍게도 병원 정문에는 최고급 외제차 앞에서 턱시도를 번듯하게 갖춰 입은 강탁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오, 오셨어유! 오늘따라 참말로 아름다우시네유! 이, 이거 받으세유!”
“네? 아, 네…….”
강탁준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장미꽃 다발을 윤수아에게 건네주었고, 윤수아는 그것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한데 그 모습을 멀리서 숨어 지켜보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으니…….
“수호야, 혹시 강 서방 옷은 네가 골라 준거니?”
“좀 과했나? 아버지가 보기에는 어때요? 저 정도면 잘 어울리지 않아요? 덩치도 좋고.”
“……난 노코멘트 하련다.”
윤지석은 아들에게 못할 소릴 할까 봐 차마 평가를 입에 담지 못했고, 오혜연은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뿔싸! 내가 우리 아들 패션 센스를 까먹고 있었구나.”
“그렇게 이상한가? 흐음…….”
“어? 이쪽 본다! 숨어!”
윤수호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마침 고개를 돌린 윤수아와 눈이 마주치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기둥 뒤로 재빠르게 고개를 감춰 버렸다.
“하여간 저 사람들…….”
윤수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자, 그 모습을 오해한 강탁준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 죄송해유. 부모님 간병하느라 바쁘신 분한테 말도 없이 이런 민폐를…….”
“아뇨, 아뇨. 강 실장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보나 마나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 오빠가 꾸민 일이겠죠. 내 말이 맞죠?”
“그, 그게 형님 잘못은 하나도 없어유! 제가 부탁해서 이렇게 된 거예유! 참말이어유!”
당황해서 손사래까지 치는 강탁준의 모습이 꼭 놀란 곰 같아서, 윤수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형님이랑 수아 씨랑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신 덕분에 싹 낳았슈. 볼래유? 이렇게 팔굽혀펴기를 한 손으로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구만유!”
“아, 알았으니까 얼른 일어나요.”
의욕이 넘친 강탁준이 그 자리에서 한쪽 팔로 푸시 업까지 선보이자, 당황한 윤수아가 서둘러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왜요? 이상해요?”
자리에서 일어선 강탁준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윤수아는 뭐가 걱정됐는지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강탁준이 도리질을 치면서 완강하게 부정했다.
“하나도 안 이상해유! 되게 예뻐서 쳐다봤구만유. 물론 평소에도 수아 씨는 곱고 예쁘신 분이시지만 오늘따라 너무 예쁘셔서……. 그, 실례가 됐다면 죄송해유.”
“…….”
저물어 가는 노을이 얼굴을 비춘 탓일까? 윤수아의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붉어 보였던 이유는…….
“아, 배고프다. 우리 얼른 밥 먹으러 가요. 가는 길에 이 이상한 옷도 갈아입고요.”
“이, 이상한 옷요? 이상하다……. 형님이 이 옷 입고 장미꽃다발 사서 기다리다가 수아 씨 드리면 수아 씨가 엄청 좋아할 거라고 하셨는데, 혹시 형님이 절 놀리신 건…….”
“그건 아닐 거예요. 오빠가 다른 건 다 좋은데 패션 센스가 조금…… 아니, 사실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그렇게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차를 타고 멀어졌다.
“그럭저럭 잘 간 모양이네요.”
윤수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멀어지는 차를 보며 윤지석이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 설마 이대로 외박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이 사람은! 수아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강 서방이랑 외박해 주면 오히려 우리야 땡잡은 거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호가 우리 수아 남편감으로 인정한 사람인데.”
“그런가요? 그래도 외박은 좀…….”
그렇게 부모님이 수아의 외박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윤수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무슨 전화니?”
“아, 잠깐 일 때문에요.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서요.”
“……또 위험한 일인 거니?”
걱정스럽게 묻는 어머니와 표정이 무거워지신 아버지를 살포시 끌어안아 드리며 윤수호는 두 분을 안심시켰다.
“안심하세요. 두 분이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요.”
윤수호는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병실로 돌아와 두 분을 침상에 눕힌 후, 병원 옥상으로 올라왔다.
슉!
‘어디 보자. 위치가…….’
옥상에서 단숨에 하늘로 몸을 띄운 윤수호는 스마트폰 내비를 통해 의뢰받은 장소를 확인했다.
‘저쪽이네.’
슈웅!
장소를 확인한 그의 신형이 밤바람을 시원하게 앞지르며 순식간에 목적지로 향했다.
* * *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너희는 포위됐다! 더 이상 죄를 늘리지 말고 순순히 투항해라!”
“시끄러! 당장 안 꺼지면 여기 있는 새끼들 전부 뒈지는 거야. 알아?”
경북 포항 인근의 어느 물류 창고.
그곳에서는 특무대 대태러팀 4개 부대와 궁지에 몰린 길드 간에 치열한 눈치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슈웅!
“어, 어?”
“여기 현장 책임자가 누굽니까?”
돌연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윤수호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놀라자, 윤수호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현장 책임자를 물었다.
“제가 이곳 현장 책임자인 특무대 대태러팀 소속 C팀 팀장 차현수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윤수호는 말없이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명함을 확인한 차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부랴부랴 각을 잡으며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올렸다.
척!
“단결! 위원장님께 실례 많았습니다!”
윤수호가 요새 살아 있는 전설 수준으로 소문이 자자한 위원장임을 알게 되자, 근처에 있던 다른 특무대 대원들까지 빠르게 경례를 올렸다.
“상황은 어떻게 됐습니까?”
“불릿샤크 길드라고, 러시아 마피아들과 불법 무기 및 약물을 거래하는 놈들이 있는데, 저희가 1년 가까이 쫓던 녀석들입니다. 이제 막 검거 작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게 어디서 정보가 샌 건지……. 보시다시피 길드 인력 전원이 무기 창고에 결집해서 농성하는 탓에 진입조차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본부에 요청을 드렸더니…….”
“그렇군요. 지금부터 작전 지휘는 제가 맡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현 시간부로 작전 목표를 빌런 검거에서 섬멸로 바꾸겠습니다. 제게는 저기 있는 빌런 전부의 목숨보다 여러분 한 분의 목숨이 더 소중하니까요.”
윤수호의 담담한 지시에 대원들의 눈에는 어느새 존경과 감동의 파도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하면 작전은…….”
“제가 먼저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입 사인은 따로 드리도록 하죠.”
윤수호는 자리에서 간편하게 슈트로 옷을 갈아입더니, 앞으로 나서며 모두가 섬뜩할 법한 얘기를 중얼거렸다.
“죽음을 각오하고 저 짓거리를 하는 녀석들이라면 각오에 어울리는 최후를 안겨 줘야죠.”
잠시 후…….
-들어오시면 됩니다.
윤수호가 진입한 지 고작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전기에서 진입 사인이 떨어졌다.
그에 따라 진입한 대원들은 허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을 놈들은 전부 죽고 항복한 놈들은 손발이 잘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진입한 대원들이 할 일은 땅에 떨어진 물고기들을 그저 줍는 것뿐이었다.
“여, 여기 있는 빌런들만 해도 오백이 넘는데, 그 많은 숫자를 혼자서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세상에…….”
“클래스가 달라. 아니, 차원이 달라!”
사람들은 보통 자신보다 조금 나은 사람에게는 질투심을 느끼지만,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는 존경심을 갖는다.
만약 그것마저도 넘어서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지금 이들의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신을 대하는 듯한 경외심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단결!”
윤수호는 만나는 사람마다 칼 같은 거수경례를 올리자 슬슬 부담스러워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때였다. 박여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온 것은.
“어. 박 소위. 무슨 일이야?”
-네, 위원장님. 전에 말씀하신 아이들을 찾아봤거든요? 그런데 조금…… 아니, 사실 많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혹시 지금 만날 수 있을까?”
그 순간, 윤수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