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돌아왔다-26화 (26/175)

26.

전라남도 해금시 해금항.

한때는 만선의 꿈을 꾸는 어부와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끌벅적한 어촌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현재는 늙은이도 젊은이도 모두 재앙을 피해 마을을 버린 터라 마을에 살사는 사람은 몇 안 되는 노약자들뿐이었으니까.

이렇게 사람의 발길이 뚝 끊어진 마을에, 어두운 해무를 뚫고 일단의 선박들이 조용히 접안을 시도했다.

툭.

배가 항구에 도착하고,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배에서 내린 이들을 성대하게 환영해 주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노 대협. 뱃길이 녹록지 않으셨을 텐데, 대국의 기상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이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하하하하!”

“오랜만이오, 이 대인. 여전히 호탕하고 걸걸한 모습이 보기 좋구려. 그런데…… 어째 이 대인뿐인 것이오?”

혈창 길드의 부길드장 이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상대에게 짐짓 미안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노 대협. 길드장께서는 현재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리를 함께하지 못한 점, 양해 부탁…….”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오.”

자신의 말을 끊는 상대의 무례한 언사에도 이근우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물었다.

“소문이라 하심은…….”

“서 대인의 부친께서 구속당했다는 얘기 말이오. 설마 우리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소?”

“…….”

이근우는 웃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노개명은 개의치 않고 계속 이죽거렸다.

“서 대인의 부친께서 구속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그 슬픔을 위로할 시간도 없이 서 대인의 망명 소식을 접한 우리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짐작이나 하시겠소?”

‘지랄도 풍년이군.’

이근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지금 그의 말이 비아냥임을 그도 알고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마디 말조차 못하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자신들의 현재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상대방이 노개명이기 때문이다.

노개명의 실력은 예전에 자신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장담컨대 혈창 길드의 이인자인 자신도 노개명을 상대로는 1분을 채 버티지 못할 터였다.

아마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죽임당하겠지.

노개명은 홍룡회의 간부 중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이자 오버 알터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개명이 직접 왔다는 건 그만큼 우리 길드장님을 회에서도 인정해 준다는 뜻이겠지. 하기야 오버 알터가 그렇게 흔한 전력도 아니고, 회에서도 알아서 망명해 준다고 하면 입안에 떨어진 감이겠지.’

“길드장님께서도 회에서 신경 써 주신 바에 대해선 깊이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직접 와서 전했다면 그 마음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구려. 그래, 그건 그렇고 회에 전할 선물은 어디 있소? 그게 있어야 돌아가서 회주님께 서 대인의 망명에 관한 얘기를 쉽게 꺼낼 수 있을 텐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그때였다.

“누구냐!”

스릉. 스릉. 스릉!

근처를 삼엄하게 경계하던 홍룡회와 혈창 길드의 병사들이 검과 총을 꺼내 들며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대응하였다.

그러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노개명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어산?”

“아시는 분입니까?”

“돌아가신 황 노사가 기르던 개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주인의 말을 잘 듣고 물어뜯는 재주가 탁월하여 황 노사가 예뻐하던 흑견의 대주였지요. 아마 주인의 복수를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 같은데…….”

노개명의 눈초리가 얇아졌다.

모습을 드러낸 어산의 분위기가 자신이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공포? 설마 공포에 질린 건가? 황위안의 사냥개가?’

주인의 명령이 없으면 언제나 목석과 같은 감정이 제거된 사냥개가 공포라니, 노개명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어산의 입에서 두려움에 찬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괴, 괴물…….”

서걱! 툭.

그걸로 끝이었다. 어산의 잘린 목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털썩.

어산의 몸뚱이가 앞으로 고꾸라지고, 그 뒤에서 윤수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모여 있었구나. 그런데 누가 서의찬이지?”

윤수호의 질문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노개명과 이근우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곧바로 팔을 들어 올렸다.

공격의 신호였다.

그 순간!

번쩍!

마치 태양이 뜬 것 같은 눈부신 빛이 찰나 간 시야를 앗아가고…….

시야가 돌아온 두 눈이 확인한 것은 공간을 수놓은 수많은 실선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실선들은 탄생과 동시에 소멸하였다.

그리고 소멸하는 실선을 따라 공간이 베여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도, 무기도, 실선에 걸린 수많은 것들이 썰려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후드득, 후드드득!

주변은 순식간에 조각난 시체들과 내장 조각, 고여 버린 피 웅덩이에서 올라오는 혈향으로 가득 찼다.

“두 번 말 안 한다. 서의찬 지금 어디 있어?”

윤수호가 조각난 시체와 피를 밟으며 다가오는 모습에 이근우의 다리가 풀려 버렸다.

“이, 이게 대체…….”

털썩.

“쯧쯧쯧.”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이근우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엉덩방아를 찧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개명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홍군아, 백군아.”

노개명의 입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붉은 가면과 하얀 가면의 사내 둘이 단숨에 윤수호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빠르다!’

이근우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눈으로는 홍군과 백군의 움직임을 쫓을 수도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백군의 검이 윤수호의 목을 꿰뚫고, 홍군의 박도가 그의 허리를 갈라 버리려던 순간.

푸확!

어떻게 된 영문인지 두 사람은 한 줌의 혈수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히익!”

“…….”

나름 실력 있어 보였던 홍군과 백군까지 한순간에 피보라가 되어 흩어지자 이근우는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이 되었다. 옆에 있던 노개명의 표정도 상당히 심각해졌다.

‘홍군과 백군이 당한 게 문제가 아니야. 내 눈으로도 놈이 홍군과 백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마수를 확인하지 못했다. 대체 저런 괴물이 어디서…….’

정보에도 없었던 괴물의 등장에 노개명은 표정을 풀고는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야심한 밤에 귀인을 몰라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넌 누구지?”

“소인은 홍룡회에서 홍백단이란 작은 조직을 책임지고 있는 노개명이라 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귀인의 성함을 알 수 있을는지요?”

“서의찬은 아니란 말이군.”

그 순간, 윤수호의 검결지가 가볍게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검기가 뱀처럼 굽이치며 노개명을 노렸다.

“……!”

노개명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 접근 중인 위협을 감지하고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 방어했다.

하지만…….

서걱!

“이럴…… 수가…….”

쩌억!

윤수호의 검기는 노개명의 검과 함께 머리끝부터 사타구니까지 그를 정확히 두 쪽으로 갈라 버렸다.

“허억!”

자신이 강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노개명의 허무한 최후와 끔찍한 주검 앞에, 이근우는 혈창 길드의 이인자고 나발이고,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윤수호의 시선이 끝끝내 자신에게까지 돌아왔다.

“네가 서의찬이냐?”

질문과 동시에 올라가는 윤수호의 손가락 끝을 이근우의 흔들리는 시선이 따라갔다.

그 순간, 이근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가면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여기서 아니라고 한다면 자신은 앞서 죽은 부하들이나 노개명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되겠지.

“서, 서의찬은 아니지만, 녀석이 있는 곳은 압니다!”

우뚝.

아무래도 정답이었나 보다. 윤수호는 손가락을 긋지 않고 그대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녀석은 지금 어디 있지?”

“하, 한 가지 약속만 지켜 주시면 말씀…….”

서걱!

이근우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붙어 있던 멀쩡한 다리가 허벅지 어림부터 깔끔하게 잘려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마라. 너와 협상하러 온 게 아니니까. 다시 한번 묻겠다. 서의찬은 지금 어디 있지?”

“…….”

* * *

“빨리빨리 움직여!”

지원팀이 도착하여 아직 남아 있는 길드원들을 체포하고 창고에 쌓여 있던 마약까지 모조리 압수하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특무대의 사기는 높을 수밖에 없었고, 특히 대태러팀 소속인 조춘영의 기쁨은 남달랐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진짜 형님 아니었으면 이만한 스케일의 사건을 이렇게 신속하게 정리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진짜 존경스럽습니다.”

“비행기 그만 태워. 아직 제일 중요한 녀석이 남았으니까.”

“서의찬 말이죠?”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체포되어 끌려가는 이근우를 쳐다보았다.

“이근우에게서 연락이 없었으니 녀석이 눈치채고 은신처를 바꿀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보고된 마약보다 창고에 있던 마약의 수량이 적다고?”

“예, 절반 정도요. 이 마약의 행방도 서의찬이 쥐고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게 국내에 풀리기 전에 서둘러 녀석을 잡아야겠지. 나 먼저 움직일 테니까 정리되면 쫓아와라.”

“알겠습니다!”

이선호와 조춘영이 힘차게 거수경례를 하자, 윤수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조춘영이 중얼거렸다.

“나도 형님한테 하늘 나는 방법만 좀 가르쳐 달라 하면…… 안 되겠지?”

“그럼 되겠냐? 개소리 그만하고 움직이자. 형님을 따라잡는 것만 해도 우리한텐 큰일이니까.”

* * *

깊은 새벽.

바람도 아닌 것이, 짐승도 아닌 것이 바람보다 빠르고 짐승보다 거칠게 새벽 야산을 질주했다.

그 순간.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전투 헬기 측면에서 총구가 불을 뿜고, 야밤에 노란 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서운 기세로 야산을 초토화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로켓포가 날아가 폭발하고 주변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지만, 헬기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 순간.

쒜엑…… 콰앙!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산속에서 날아와 전투 헬기를 꿰뚫더니 그대로 헬기를 격추했다.

헬기를 격추한 건 다름 아닌 나뭇가지였다. 서의찬이 오러로 나뭇가지를 강화하여 투창처럼 던져서 전투 헬기를 격추한 것이다.

“아, 나! 이 쥐새끼들이 도대체 어디서 냄새를 맡고 몰려든 거지? 귀찮게…….”

“양의찬 소령님! 이제 그만 투항하십시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단 걸 잘 아시잖습니까!”

어느새 서의찬의 앞을 가로막은 특무대 대태러부대 대원들이 그에게 호소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옛정 생각해서 보내 줄 때 꺼져라. 뒈지기 싫으면.”

“소령님도…… 아니, 서의찬 네 녀석도 우리와 같은 밥 먹던 식구라면 잘 알 텐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여기 있는 건지.”

정으로 호소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자, 결국 대원들도 전술을 바꿔 그의 앞을 철통같이 가로막았다.

“알지. 너무 잘 알지. 그래서 너희 따위가 내 발목을 잡을 순 있고?”

“알 게 뭐야. 우리는 그저 맡은 바 임무에 전력을 다할 뿐이다. 상대가 누가 됐건!”

“그것참 훌륭한 사람들이네. 근데 그거 알아? 내가 훌륭한 사람만 보면 찢어 죽이는 버릇이 있다는 거.”

파앗!

서의찬이 사납게 웃으며 대원들에게 달려들었다.

대원들은 그럼에도 피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임무는 서의찬을 막는 것이고, 여기서 녀석을 놓치면 다시는 서의찬을 체포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뒈져라, 쥐새끼들!”

그 순간!

콰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서의찬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검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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