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이 돌아왔다-15화 (15/175)

15.

깊은 밤, 어두운 적막이 내려앉은 인천항의 어느 한 부두.

폐쇄된 부두인 이곳은 인천항 관계자가 아니면 접근이 금지된 곳이지만, 다른 부두도 잠이 든 이 야심한 시각에 오직 이곳만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검은 승용차를 타고 나타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놈이 왔습니다.”

“그래, 나도 봤다.”

부두에서 중국풍 전통 의상을 입고 작업 중이던 일꾼들을 감시하던 사람들이 중국말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새로 등장한 인물을 흘깃 보고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에서 내린 인물을 반갑게 환대해 주었다.

“아이고~ 이것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 대인. 설마 이 야심한 시각에 직접 행차하실 줄은……. 오신다면 귀띔이라도 미리 해 주시지. 그랬으면 이렇게 빈손으로 맞이하는 실례는 하지 않았을 텐데요. 이것 참, 대국의 사람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하하!”

“상관없습니다. 이 거래가 무사히 성사되는 것이야말로 황 노사께서 제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듣자 하니 문제가 조금 있다고요?”

서 대인이라 불린 사내가 능숙하게 중국어로 묻자 황 노사가 답했다.

“아, 그것이……. 당초 발주했던 물량보다 약 15%가량 물량이 부족하고, 도착한 상품들의 품질도 기존 것들과 비교해서 조금 떨어지는 편인지라…….”

“그래서요?”

“아무래도 기존과 같은 가격대로 거래를 성사시키는 건 조금 어려울 듯싶습니다, 서 대인. 이 점 넓은 아량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황 노사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자, 눈과 코를 가리는 반가면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요. 저희는 분명 오늘 거래가 있기 보름 전에 공급처로부터 상품 발주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통보해 드렸고, 황 노사 쪽에서도 분명 알겠다는 답변을 들은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것참 이상한 일이로군요. 저희 쪽에서는 서 대인으로부터 그러한 소식을 받은 사실이 없어서 말입니다. 저희도 참으로 당황스럽던 차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래처가 많은 탓에 이런 사소한 문제 하나도 저희의 신용 문제로 귀결될 수 있음을 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여 이런 부분에서는 저희도 주의에 또 주의를 기울이는 기울이고 있지요.”

황 노사의 공손한 답변에 사내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황 노사께서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잡수시더니 쓸데없이 혓바닥만 길어지셨군요. 요약하자면 15% 분량에 더해서 상품의 질 같은 같잖은 핑계로 대충 20% 이상의 대금을 그 똥내 나는 아가리로 처먹을 테니 닥치고 기라는 말씀 아니신지요?”

“……지금 뭐라고 했나? 서 대인.”

사내의 무례한 말에 황 노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들었음에도 사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황 노사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고막까지 늙어서 사람 말도 제대로 못 듣는 건가? 잘 들어. 황풍, 이 ×새야. 왜? 우리 최대 고객이 그쪽만 있는 줄 알았어? 그래서 영감탱이가 욕심 좀 부려도 우리가 설설 길 줄 알았나 봐. 이봐, 노친네. 하루만 자고 일어나도 세상이 달라지는 시대야. 당신들이 우리 최대 호갱님이었던 시절도 벌써 옛날이라고. 알아? 그러니까 뒈지기 싫으면 셈은 똑바로 하자고, 우리.”

“소국의 원숭이 놈을 사람 대접 좀 해 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툭.

황 노사가 짚고 있던 지팡이로 가볍게 바닥을 내리쳤다.

그 순간, 그들의 주변으로 암영복을 갖춰 입은 수많은 사람이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눈으로 보면서도 기척을 파악할 수 없는 실력과 눈빛, 걸음걸이만 봐도 평범한 인물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명부의 사신에게 발목을 잡힐지언정 홍룡의 흑견에게는 물리지 마라. 네놈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게다. 애석하구나. 그 약간의 자존심과 욕심을 버리지 못해 젊은 목숨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이…….”

“거참, 씨발! 다 죽어 가는 영감탱이 보신시켜 주고 밑 닦아 줬더니만, 결국 돌아오는 건 개새끼들이네. 하여간 짱개 이 ×새들은 이래서 정 주고 마음 주면 안 된다니까.”

그러나 흑견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사내는 전혀 여유를 잃지 않고 우리말로 욕설을 씹어 뱉었다.

그 순간.

슈슈슈슈슉!

흑견들이 소리 없이 움직여 사내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검은 장막이 사방팔방에서 사내를 휘감아 덮치는 것처럼 보였다.

백여 명이 넘는 그들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호흡과 움직임조차 맞추며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순식간에 백여 개의 검이 피어오르고, 백여 개의 오러가 사내의 목숨을 위협했다.

도망치는 것도, 막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사내는 등에 빗겨 멘 창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콰우우우우우우우!

돌연 사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기세가 창끝을 타고 그의 손길을 따라 종횡무진 날뛰기 시작했다.

때로는 벼락을 닮은 섬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명필의 손끝을 모방하는 붓이 되기도 하여 공간을 지배하였다.

사내의 창이 보여 주는 천변만화와 거침없는 위력에 흑견들은 무너지고 순식간에 시체들만 가득 남았다.

후두득, 후득!

“끄응~! 몸풀기로는 적당한 것 같네. 그래서 본게임은? 설마 천하의 황 노사가 고작 이 정도로 깝죽거리지는 않았을 거 아냐.”

“이, 이럴 리가…….”

쏟아져 내리는 흑견들의 살점과 내장 조각, 핏물을 바라보던 황 노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게 끝인 것 같네. 아쉬워. 영감 말대로 욕심과 자존심만 조금 버렸더라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초라한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명할 수 있었을 텐데.”

푸욱!

“커억!”

사내는 황 노사를 지키려는 호위들을 간단하게 처리한 뒤 그의 심장에 창두를 박아 넣어 주었다.

“네, 네 이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홍룡회에서 결코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촤악! 털썩.

창두를 뽑자 말을 미처 마치지 못한 황 노사가 앞으로 고꾸라져 차게 식어 갔다.

그러자 한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길드장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측근 중 한 명이었다.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제가 무능하여 길드장님께 수고를 끼쳤습니다.”

“응? 아냐, 아냐, 황 노사 이 새끼는 아직 네 깜냥으로 벅차. 일이 × 되기 전에 잘 불렀어. 잘했어. 어차피 네가 부르지 않더라도 와야 했으니까.”

“네? 그게 무슨…….”

사내는 부하가 건넨 수건으로 대충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홍룡회에서도 저 욕심 많은 노인네를 처리하고 싶었는데, 워낙 내부에 지지 기반이 탄탄한 노인네잖아. 그런 와중에 손 안 대고 코 풀고 싶던 모양이더라고.”

“그렇다면…….”

“애초에 이번 거래가 저쪽에서는 ‘없었던 일’이라는 뜻이다. 저 노친네의 죽음을 포함해서. 그게 이번 나의 노고에 대한 그쪽 나름의 보상이라는 거겠지.”

사내의 말에 부하는 배에 거의 가득 실린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저 물건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떡하긴,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일단 70%는 반값으로 장강회 놈들의 똥꼬를 살살 긁어 줘. 홍룡회도 조만간 슬슬인 거 같으니까. 나머지 30%는 국내에 풀고. 가끔은 사람들에게 희망도 주고 그래야지. 안 그러냐?”

“길드장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고생해라. 아, 참! 아버지한테 연락 오면 당분간 나 집에 못 들어간다고 해. 내일부터 치우 팀 지옥 훈련 들어가니까.”

* * *

“죄송합니다! 정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박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수호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당연히 변명밖에 안 되겠지만 당시에는 재앙 초기였고, 정부와 국민도 모두 혼란이 극에 달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조금이라도 재앙종에 대항할 힘을 모으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알터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알터들의 신원만 확인했을 뿐, 그 가족들의 뒷조사까지 할 겨를이 없었던 탓에…….”

“고개를 드세요. 박 소위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니니까요. 당시 박 소위님은 정보부도 아닌 평범한 학생 아니셨습니까?”

“그래도……. 정보부의 불찰인 건 사실이니까요.”

“딱히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어땠을지는 저도 대충 예상이 가니까요. 불가피한 선택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죠.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재입니다.”

윤수호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호진 대장님. 접니다, 윤수호.”

“히끅!”

박여진은 윤수호가 가볍게 전화를 건 상대의 신분을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자신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사람이거늘, 윤수호는 마치 친구에게 전화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통화를 이어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윤수호는 박여진에게 들었던 서주석에 관한 얘기를 천호진에게도 전해 주었다.

-그렇군요. 양의찬 소령의 아버지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단 말이지요. 사죄는 나중에 윤수호 씨를 직접 보고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런 사안에 전화로 사죄를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그 전에 양석훈……. 아니, 서주석 씨에 대한 문제부터 해결해야겠군요.

천호진은 먼저 양의찬에 대한 문제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양의찬 소령은 박 팀장의 말처럼 내사 대상입니다. 그를 내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저와 정보부 사령관을 비롯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특급 기밀이지요. 물론 지금 상황은 정황 증거만 있을 뿐 물증도 증인도 없는 상황이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특무대에 입대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계획적이라는 말은…….”

-현재 특무대는 대한민국 권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치우 팀은 특무대에서도 정점들이 모인 곳이지요. 물론 양의찬 소령 자신도 오버 알터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지만요. 저희도 우연히 그가 특무대에 입대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부의 문서들과 대태러팀의 동향을 뒤로 살핀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자가 뒤로 안 좋은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안타깝지만 그것 이외에 그가 한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군요. 저희도 참으로 답답한 상황입니다.

천호진은 무거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수호는 천호진이 답답해하는 이유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치우 팀이 내사 대상이라면 같은 치우 팀 대원들에게 조사를 일임하기도 힘들고, 그의 권력이라면 정보부에서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빠르게 눈치챌 수 있으니 섣불리 움직이기도 힘들겠군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 일을 제가 맡아 달라는 말씀입니까?”

-역시 예상하고 계셨군요. 참으로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그렇습니다. 치우 팀은커녕 특무대원도 아니면서 치우 팀원 이상의 무력과 뛰어난 혜안, 그리고 행동력을 가진 사람. 현재 모든 상황에 걸맞은 인재는 윤수호 씨가 유일하시니까요.

천호진은 아쉬운 목소리로 거듭 윤수호에게 부탁했다.

-물론 지금까지 해 주신 업적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이번 일마저 윤수호 씨가 맡아서 해결해 주신다면 더 이상 윤수호 씨의 특무대 입대 및 활동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겁니다. 설령 특무대에 입대하지 않더라도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은 제 이름과 자리를 걸고 반드시 지급할 것을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부디 우리 특무대를 도와주십시오. 필요한 비용과 인원은 모두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윤수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누가 뭐래도 제 우선순위는 수아의 행방입니다. 수아를 찾고 여력이 생긴다면 그때 대장님의 부탁을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윤수호 씨!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모든 절차와 수단을 지켜 가며 수아를 찾고 대장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건 대장님께서 더 잘 아시겠죠. 그러니 지금부터는 제 방식대로 가겠습니다. 그 뒤처리를 대장님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윤수호 씨에게 이번 일을 부탁드렸을 때부터 각오한 일입니다. 윤수호 씨는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죠.”

윤수호는 전화를 끊고 박여진을 쳐다보았다. 박여진은 그때까지도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박 소위님.”

“네……. 아, 네!”

“선호와 춘영이에게 연락 부탁드립니다. 급하게 갈 곳이 있다고.”

검신이 돌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