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 온다!”
“전원 전투 준비! 전원 전투 준비!”
도시 어귀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전투를 준비하는 해성시 주둔군의 두 눈이 두려움과 결의로 물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들은 두려움을 애써 용기로 바꾸며 다리를 붙잡았다.
‘겁먹지 마! 도망치지 마! 여기서 내가 도망치면 우리 가족들이 다 죽어!’
이들이 이렇게까지 버티는 이유는 자신들이 군인이라는 자부심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여기 있는 병사 대부분이 해성시에 가족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즉, 자신들이 여기서 포기하고 도망치면 가족들이 위험하기 때문에 결국 목숨 바쳐 자리를 사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앙종들은 병사들의 굳은 각오를 우습게 짓밟으며 맹렬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살기를 풀풀 풍기며 달려오는 광경은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 그 자체였다.
“사격 개시!”
군인들은 재앙종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총알이 빗발치고 포신이 불을 뿜었지만, 결과는 앞선 군인들과 마찬가지.
총과 포탄에 맞아 죽을 녀석들은 출현 장소에서 전부 죽었기 때문에, 여기 남은 재앙종들은 탄환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 화력을 퍼부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우린 전부 끝났어……. 다 죽었다고!”
그렇게 군인들의 절망이 바닥없는 절벽으로 추락하던 순간이었다.
슉.
“응? 뭐야? 낙하산도 없이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설마, 특무대인가?”
“하지만 복장이…….”
누군가의 말처럼 지금 윤수호가 입고 있는 옷은 편한 청바지에 운동화, 검은 반팔 티였다. 도저히 특무대원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편, 윤수호는 군인들의 걱정과 의문을 뒤로 한 채 정면에서 달려오는 재앙종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그 순간!
“어? 뭐야?”
“놈들이 멈췄다!”
군인들의 경악에 찬 외침처럼, 거칠 것 없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던 재앙종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인 양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기세를 피워 올리며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긴 하지만 단 한 발자국도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그 신기한 광경에 군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윤수호와, 재앙종들이 보고 있는 윤수호의 모습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윤수호는 녀석들을 보며 목을 풀었다.
‘기세는 죽였을 텐데. 본능적으로 느낀 건가? 감이 좋은 녀석들이군. 흩어져서 숨어 버리기라도 하면 귀찮아지겠어.’
팟.
그 순간, 군인들의 눈앞에서 윤수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재앙종들이 몰려 있던 무리 사이에서 엄청난 이변이 일어났다.
촤촤촤촤촤촤!
윤수호를 중심으로 초승달 형태의 검기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오며, 검기에 걸린 수많은 재앙종들을 처참하게 찢어발긴 것이다.
후두둑, 후둑!
대부분의 재앙종들이 찢겨 사망하고, 하늘에서는 검붉은 피와 찢긴 내장, 조각난 살점 등이 쏟아져 내렸다.
그 와중에 정말 운 좋게 감으로 윤수호의 공격을 피해 낸 5급 재앙종이 눈을 부릅뜨고 몸을 벌벌 떨며 윤수호를 쳐다보았다.
바닥이 피와 내장의 비로 붉게 물들었는데 옷에는 핏방울 한 점 묻지 않은 그의 모습은 일견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5급 재앙종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걸 피할 줄은 몰랐는데. 너는 이 중에서도 특히 감이 좋은 녀석이구나.”
흠칫!
서걱.
그러나 두 번의 기적은 없었다.
윤수호가 손가락을 수평으로 긋자 5급 재앙종의 모가지가 허무하게 뎅겅 잘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녀석의 표정을 보아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모양이었다.
팟.
그렇게 5급 재앙종들을 홀로 처리한 윤수호가 사라졌을 때처럼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군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감격에 겨워 서로 얼싸안았다.
“와아아아아아!”
“살았다! 우린 살았어!”
“어어엉! 엄마!”
병사들은 체면도, 처지도 잊고 어린아이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간부 중 누구도 병사들을 탓하거나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한 위기였고, 그만한 공포였으니까.
윤수호가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들어오자 방위선의 책임자와 간부들이 직접 그에게 다가가 거수경례를 올리며 감사와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해성시도, 주민들도 다치지 않고 재앙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 주둔군의 책임자, 주하민 대령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소속과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소속은 없고, 이름은 윤수호라고 합니다.”
“예? 소속이 없다니, 그게 무슨…….”
“혹시 피난 장소나 루트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까?”
“아, 예. 지금쯤 제1 임시 피난소에 피난민들이 거의 도착했을 겁니다.”
질문에 질문으로 되묻는 윤수호였지만 그게 너무 자연스럽고, 무엇보다 윤수호의 분위기가 너무 커 보이던 탓에 주하민은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렇군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혹시 자리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주하민을 따라 해성시 주둔군 사령부에서 이선호와 조춘영을 기다리고 있자니, 그들보다 먼저 도착해 윤수호를 찾은 여성이 있었다.
“이분이십니다.”
“5급 재앙종들을 혼자서 처리했다는 정체불명의 귀인이 당신이십니까?”
그녀는 현장 근처에서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도중, 급하게 목적지를 선회하여 출동한 섬멸팀의 팀장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윤수호와 처음 만났던 이선호의 101팀이 그랬던 것처럼, 지원팀이 도착할 때까지 재앙종들의 이목을 끌어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게 웬걸, 재앙종은 이미 전멸해 있었고, 그걸 젊은 남자 혼자서 했다고 하니, 이게 이해가 되겠는가?
당연히 그녀로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해야만 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저는 특무대 섬멸팀 107팀의 팀장, 함지은이라고 합니다. 용건에 앞서 먼저 재앙종의 재해로부터 해성시의 주민들을 지켜 주신 당신의 노고에 국민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그녀는 윤수호를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고, 윤수호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감사를 받아 주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용건이라는 게…….”
“이곳의 책임자인 주하민 대령의 얘기로, 귀하께서는 소속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은인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사정 조사와 신변 확인을 위해 잠시만 저희와 동행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절대로 시간을 오래 빼앗진 않을 겁니다. 물론 충분한 보상도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윤수호는 그녀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와 동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선호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에게 바꿔 주었다.
“그 친구가 사정을 설명해 줄 겁니다.”
전화를 받은 함지은은 이선호로부터 대충 설명을 전해 듣더니 전화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죄송합니다. 이 선배님의 지인이신 줄도 모르고…….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조심히 돌아가세요.”
경례를 마친 함지은이 팀원들과 함께 돌아가고 얼마 후, 이선호와 조춘영이 도착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역시 형님! 5급 재앙종도 형님한테 걸리면 얄짤없네요.”
“설마 선발대로 함 팀장이 올 줄을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나마 그녀라서 다행이었네요. 다른 녀석들이었다면 상황을 설명하는데 애 좀 먹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게. 아무래도 내 신원이 문제가 되는 것 같더군.”
윤수호가 나직하게 내뱉은 말에 이선호가 진땀을 흘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아무래도 5급 재앙종을 혼자 괴멸시킬 정도의 강자가 정체불명에 소속 불명이라고 하면, 나라의 안보를 담당하는 군대와 특무대의 특성상 불안해하는 자들도 많을 테니까요. 이 부분에 관해서는 형님께 넓은 아량을 부탁드릴 뿐입니다.”
“큰 문제로 번질 게 아니라면 상관없다. 그보다 보름이는 언제쯤 볼 수 있는 거지?”
“제가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선호는 즉시 주하민 대령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 역시 5급 재앙종의 잔해와 게이트 출현 포인트에서 사망한 동료들의 시신 수습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지만 흔쾌히 이선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 * *
해성시 제1 임시 피난소.
그곳에서 숨죽여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임보름과 그의 가족은 갑자기 군인들이 자신들을 찾아오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저희를 따라오시죠. 가족분들과 함께 가셔도 상관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임보름은 군인들과 함께 차를 타고 해성시로 향했다.
“그런데 도시는 지금 위험한 게 아니었던가요?”
“5급 재앙종은 한 분의 영웅께서 괴멸시키셨습니다. 지금 임보름 씨를 찾고 계신 분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네?”
5급 재앙종을 홀로 괴멸시킨 영웅이라니……. 왜 그런 영웅이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남편도 놀라서 자신을 쳐다보았지만, 임보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그렇게 주둔군 사령부에 도착한 임보름은 오는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의문의 답을 만날 수 있었다.
“네가 보름이구나. 확실히…… 어릴 때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네. 반갑다.”
“저기, 실례지만 누구신지…….”
처음 보는 사람이,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남자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하자 임보름은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들었다.
당연히 남편도 아내를 지키기 위해 슬쩍 아내를 자신의 뒤로 가리며 윤수호를 경계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그동안 잘 지냈니? 나 윤수호야, 수아 오빠. 기억나니?”
“수, 수호 오빠요? 그게 지금 무슨……?”
무슨 재미없는 농담인가 싶어 인상을 구기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펴지더니, 이내 그녀의 눈이 부릅뜨였다.
“……!”
그녀 역시 윤수호라는 이름을 듣자, 잊고 있던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기억하는 윤수호의 마지막 모습이 20대 초반이었으니.
지금 눈앞에 있는 윤수호와 판박이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진짜 수호 오빠잖아? 아니, 잠깐만! 얼굴은 분명 수호 오빠가 맞지만, 내가 아는 건 20대 초반의 오빠 모습인데……. 대체 이게 어떻게……!”
“너도 내가 실종된 건 알고 있지?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거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정말 수호 오빠세요?”
“그러고 보니 초등학생 때 일인가? 수아가 그러더라. 너랑 목욕탕 갔을 때 네가 급하다고 몰래 탕에서…….”
윤수호가 그녀와 동생 사이에 있었던 작은 추억을 꺼내 들자, 임보름이 다급히 윤수호의 입을 막았다.
“으아아! 알았으니까 그만! 근데 수아가 오빠한테 그런 얘기까지 한 거예요?”
“그것만 얘기했을까?”
“하아……. 알았어요. 믿을게요. 그런데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돌아온 거예요? 그동안 수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나도 미치도록 돌아오고 싶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수아,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니?”
그 순간, 어두워지는 임보름의 얼굴에 윤수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