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윤수호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깨달은 건 자신의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단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난에 불만은 없었다. 가난해도 성실하고 인자한 아버지, 자상하고 따뜻한 어머니, 가끔 미울 때도 있지만 착실하고 똑 부러지는 여동생까지.
남들은 동정할지언정 남들 부럽지 않은 멋있는 가족이 바로 자신의 가족이었으니까.
그는 가족을 사랑했고, 가족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다.
그게 억울하진 않았다. 그가 아버지의 등을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이었기도 했지만, 그의 눈에 아버지의 등은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의 뒷모습이었으니까.
자신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윤수호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학업과 알바를 꾸준히 병행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학업 성적도 꾸준히 유지하면서 알바도 열심히 노력했다.
그 덕분에, 우등생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선생님께서 대학을 추천해 주실 정도의 수준은 됐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곧장 군대를 다녀온 뒤,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점점 더 몸이 쇠약해져 가는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 가족을 지켜야만 했으니까.
그의 가족은 장남에게만 큰 짐을 지우는 것 같다면서 항상 죄책감을 느꼈지만, 오히려 그는 그게 항상 안타까웠다.
윤수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위인의 삶을 본받은 것뿐이다. 그것은 그에게 보람이자 행복이었지, 절대로 고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노력하면 자신도, 가족의 삶도 분명 더 좋아질 거라 믿고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윤수호는 검은 회오리에 휩쓸려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세계에 내팽개쳐졌다.
그것이 지옥의 시작이었다.
* * *
“크윽!”
윤수호는 깨질 듯한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썩, 철썩……!
귓가를 간지럽히는 파도 소리와 짠 내, 손끝으로 느껴지는 축축하고 푹신한 모래사장까지…….
이곳이 해변이라는 걸 파악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옷과 검은 소멸했는지 알몸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모든 것보다 윤수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래사장 한쪽에 떠밀려 온 해양 쓰레기였다.
‘스티로폼 부표에 플라스틱 그물망이라고?’
무림에 존재할 리 없는 현대의 어업 도구들을 발견한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돌아왔다고? 그렇다면 여긴 어디지? 우리나라가 맞는 건가?’
그때였다.
크우아아아!
저 멀리서 들리는 거대한 포효에, 윤수호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모습도 모래사장에서 사라졌다.
* * *
‘저건 뭐야?’
순식간에 소리가 들린 곳에 도착한 윤수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크기는 5m 정도 될까? 전신이 털북숭이에 이족 보행을 하는 괴물을, 그는 난생처음 봤다. 그리고 크기는 더 작지만, 그 괴물을 따르는 무리까지.
‘아…….’
그 모습에 윤수호의 마음이 납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고 답답해졌다.
괴물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어쩌면 이곳이 자신이 있던 세상이 아닐 거라는 불안함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 순간.
크륵?
인간의 냄새를 맡은 거대한 덩치를 가진 괴물이 고개를 돌려 윤수호를 발견하였다.
크어어어!
괴물의 외침에 그를 따르던 작은 괴물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윤수호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살의와 적의가 가득한 것이 아무래도 좋은 목적은 아닌 듯싶었다.
그런 녀석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지금 그는 꽤 짜증이 났다는 사실을.
오른손 주먹을 말아 쥔 상태에서 그는 검지와 중지만 곧게 펴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검처럼 가볍게 휘둘렀다.
그 장난 같은 행위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촤아아악!
손끝에서 무형의 검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요사스러운 뱀처럼, 혹은 명필의 붓처럼 공간을 휘갈기며 걸리는 것은 닥치는 대로 베어 버렸다.
검기 자체도 보이지 않는 데다 움직임도 변화무쌍하다 보니, 괴물들로서는 반응하고 피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아니, 기적적으로 막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방어와 함께 몸통을 갈라 버렸으니까.
그렇게 몇 번 손을 휘두르자, 거의 백여 마리에 가까웠던 무리가 순식간에 시체만 남아 싸늘하게 식어 갔다.
“놀아 줄 마음 없으니까 꺼져라. 아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죽어라.”
쿠어어어어어!
부하들의 죽음에 분노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무시하는 그의 행동에 화가 난 것일까?
5m 거구의 괴물은 포효하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둥둥둥둥!
‘마기가 증폭했다?’
윤수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릴라처럼 가슴을 드러밍한 순간, 녀석이 가지고 있던 마기(魔氣)가 증폭했기 때문이다.
드러밍을 마친 녀석은 바위 같은 주먹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망치처럼 윤수호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앙!
그 엄청난 파괴력에 주먹이 충돌하는 순간, 미약하게나마 주변의 땅이 흔들리고 먼지구름이 크게 일어나면서 충격파가 일대의 지면을 뒤집어엎었다.
이 위력이라면 탱크조차 장난감처럼 박살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터. 괴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야?”
흠칫!
괴물이 흠칫 놀라 눈을 부릅떴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폭사할 줄 알았던 인간이 멀쩡하게 자신의 주먹을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손으로.
휘릭.
윤수호는 녀석의 주먹 살집을 쥐고 손을 휘적거렸다.
쿵!
그러자 놀랍게도 균형을 잃은 괴물의 거대한 몸뚱이가 기우뚱하더니 붕 떠올라 바닥에 머리부터 꽂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재주는 이게 전부냐?”
크르르륵!
괴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거친 살기를 내뿜었다. 자신이 우롱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녀석도 느낀 것이다.
크아아아!
괴물은 괴성을 내지르며 전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 주먹질이 얼마나 빨랐던지 수십 개의 잔상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바위 소나기가 쏟아지는 그 광경은 산사태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엄청난 박력이었다.
“잔재주가 제법 요란하구나.”
휘릭.
윤수호는 다시 검지와 중지를 뻗어 허공을 몇 번 휘둘렀다. 그러자 예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검기가 뻗어 나가, 쏟아지는 모든 주먹의 잔영들을 전부 받아 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촤르륵!
검기는 살아 있는 뱀처럼 똬리를 틀며 괴물의 양팔을 휘감아 올라갔다.
검기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검기를 따라 베인 자상에서 피가 솟구치니, 흡사 피의 뱀이 팔을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윤수호는 이 무공을 혈사검(血巳劍)이라고 불렀다. 적을 휘감아 피투성이로 만드는 모습이 마치 혈사와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그그그…….
두 팔을 어이없이 잃어버리자 이제 윤수호를 노려보는 괴물의 두 눈에는 공포와 절망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녀석의 마지막 선택은 도망이었다. 아직은 멀쩡한 두 다리로 전력을 다해서 도망치는 것이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나 보군.”
그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놀려 혈사검을 출수했다.
뱀처럼 구불구불 뻗어 나간 검기는 순식간에 괴물의 목을 훑었고,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괴물은 바닥에 쓰러져 차갑게 식어 갔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보다시피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으니까.”
괴물들도 모두 처리한 마당에, 윤수호가 별안간 영문을 알 수 없는 얘길 소리쳤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훔쳐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숲 한쪽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의문의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특이한 슈트를 착용한 상태인 데다 헬멧도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뭐지, 이 녀석들은?’
윤수호는 그들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氣)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마기도 아닌 듯한 이상한 기운이 그들 전원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저희가 나설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지켜봤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쇼.”
무리 중 대장으로 보이는 강한 기운의 사내가 대표로 윤수호에게 사과를 건넸다.
윤수호가 다급하게 그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한국어가 통하는 걸 보니 여기는 한국인가? 지금 날짜는?”
“네? 아, 지금 이곳은 대한민국 충남 서산 두례면 수천 해수욕장 부근이고, 현재 시각은 2022년 7월 5일 오후 2시 37분입니다.”
“2, 2022년? 정말 확실해?”
“네? 아, 물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장소와 날짜는 왜……?”
“이런 미친……!”
윤수호는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 앞에서 알몸으로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나한텐 한일 월드컵의 4강 신화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이 2022년이라고? 이게 무슨……!’
자신이 실종된 지 무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던 것이었다.
한편, 윤수호가 뭔가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자, 대원들이 조용히 대장 이선호에게 말을 건넸다.
“대장. 저 친구, 갑자기 왜 저러는 거죠? 대장한테 장소랑 날짜를 묻더니 갑자기 혼자 충격받은 것 같은데요?”
“게다가 근처가 해수욕장이라고는 하지만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자칫하면 공연음란죄로 체포 감이라고요, 저건.”
그에 이선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작게 되물었다.
“그래서, 누가 저 친구를 체포할 건데?”
이선호가 대원들을 둘러보자 대원들은 딴청을 부리기 바빴다.
“그야…….”
“크흠! 전 패스할게요.”
“나도 패스. 6급 재앙종 무리를 손가락 몇 번 휘둘러서 전멸시킨 인간한테 덤비느니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지, 그냥.”
6급 재앙종은 자신들 같은 팀이 적어도 세 팀 이상은 있어야 해결이 가능한 재앙이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먼저 도착한 것도 그저 임무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중에 우연히 이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재앙종들을 묶어 두는 시간 벌기용인 것이다.
“보다 보니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 몸이 완전 조각상인데?”
대원들의 반응에 이선호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없으면 공연음란죄 건은 기각이다. 그리고 이견 없으면 향후 방침은 본대의 팀장인 내가 결정하고 지시한다. 알겠나?”
“예, 팀장님.”
그렇게 결심을 마친 이선호는 깊이 숨을 고르며 윤수호에게 다가갔다.
상대는 6급 재앙종들을 혼자서 순식간에 전멸시킨 괴물, 조금이라도 마음을 상하게 했다간 자신도, 부대원들의 안위도 책임질 수 없었다.
“저기…… 혹시 큰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혹시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도움?”
“예, 예를 들어 지금 당장 입을 옷이 없으시다면, 저희가 남는 의복이라도 챙겨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선호의 호의에 윤수호는 자신이 알몸이란 사실을 그제야 자각했다.
“그렇군. 이 꼴로 마냥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부탁한다. 아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이선호에게 존대를 사용한 이유는 이곳이 무림이 아니라 한국이기 때문이다.
강자존이 전부인 무림에서는 자신이 곧 법이고 모든 무인 위에 군림하는 검신이었으나, 한국에 돌아왔으니 이곳의 예절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윤수호는 생각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이선호는 부하를 시켜 수송차에서 여벌의 슈트를 가져와 윤수호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이선호의 도움으로 슈트를 착용한 윤수호.
이렇게 알몸을 해결했지만, 아직 가장 큰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로 가족이었다.
검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