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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르니아의 새벽
여우신의 말에 무언으로 동의하며 남자를 노려봤다.
그러자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뺨을 긁적였다.
“전 단지 말 걸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몰래 접근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러면 왜 기습이라도 할 것 마냥 슬금슬금 다가온 건데?”
“여러분이 갑자기 애정을 나누셔서요. 딱 말 걸려고 다가갈 때 옷을 벗으신 바람에…… 하하핫…….”
조금 전의 일을 회상하듯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그의 말에 나도 덩달아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요컨대 이 남자는 나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몰래 우리의 뒤를 밟았던 거다.
동료들과 모여 있을 때 대뜸 찾아오면 대화가 어려울 테니까.
그렇게 몰래 다가와 대화를 시도하려는 찰나, 나랑 유미가 섹스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행색을 자세히 살피며 나는 놈의 심중을 파악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무장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내 마신화 스킬처럼 무기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얼마든지 있다.
아니면 모습을 감췄던 것처럼 무기도 감춰뒀을 수도 있고.
나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여우신에게 말했다.
“신령님, 잠깐 저 놈 몸수색 좀 할게요. 이상한 낌새 보이면 신령님이 저지해주세요.”
“알겠다. 조심해라.”
내 말에 여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그녀와 함께 남자를 상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선 나도 전면전만큼은 피하고 싶다.
마신화 스킬은 횟수가 한정적이고 내 주력 스킬들도 대부분 무기를 착용해야 발동할 수 있다.
맨손으로는 패링도 쉽지 않다.
여우신 역시 힘을 사용하는 게 제한될 것이다.
그녀가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동안 유미가 위험에 처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일단 위험이 될 만한 요소는 전부 잡아낸 뒤, 적대 의사를 보이면 빠르고 확실하게 제압한다.
그것을 목적으로 두며 나는 남자에게 접근했다.
“네가 위험한 놈인지 아닌 지 확인해 봐야겠어. 몸수색할 테니까 움직이지 마.”
“알겠습니다. 벗고 있어서 숨길 곳도 없지만요.”
씁쓸하게 웃으면서 내 지시에 응하는 남자.
그는 손을 들어 올린 채 얌전히 대기했고, 나는 그의 주위를 맴돌며 수상한 게 없는 지 확인했다.
‘아무 것도 없잖아……?’
그의 전신을 살핀 결과 투명화 된 장비 같은 건 없었다.
스킬을 사용하기 위한 표식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완전히 비무장 상태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이놈이 사용한 투명화 능력도 내가 알고 있는 은신 스킬과는 차이가 있었다.
의심을 끈을 놓지 않은 채 나는 여우신에게 눈빛을 보냈다.
여우신도 그녀 나름대로 남자를 조사하고 있었을 거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위험은 없는 듯했다.
“적의는 없는 거 같으니까 들어나 보자. 우리한텐 무슨 볼 일 인데?”
똑바로 응시하며 묻자 남자가 부끄러운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보다 먼저 오해부터 풀 수 있을까요……?”
“오해?”
“네, 왠지 저를 답도 없는 변태로 보시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데요…….”
남자의 말에 나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남 섹스하는 거 옷 벗고 훔쳐봤으면서 변태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게 오해란 겁니다……! 제가 사용한 은밀의 룬의 효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그건 또 뭔데?”
은밀의 룬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스킬인지 아이템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본편에 등장하지 않는 시스템인 건 확실하다.
내가 수상쩍은 눈빛으로 묻자 남자는 차분히 설명했다.
“북부 지역에서 습득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입니다. 스킬의 일종이지만 조금 다르죠.”
“그걸로 투명화를 썼다는 거야?”
“네, 하지만 이 룬은 편리한 대신 장비까지 투명하게 만들어주진 않아요. 그래서 모습을 감추려면 부득이하게 나체가 되어야 합니다.”
은신 스킬도 저 은밀의 룬과 똑같이 캐릭터를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가졌다.
허나 은신의 경우 회피나 공격 등, 동작이 큰 행동을 하면 즉시 효과가 사라진다.
지속 시간도 있어서 무한정 숨어 있지도 못 한다.
반면 이 남자는 우리를 꽤 오랫동안 감시한데다가 여우신의 요기 발톱까지 피했다.
이처럼 은신 보다 제약이 적은 은밀의 룬이지만 그 대가로 장비를 벗어야 하는 것이리라.
아마 원작 게임이었으면 속옷은 입을 수 있었겠지.
게임 세계에선 속옷도 일단 장비여서 전부 벗어야했을 거다.
“네가 일부러 옷 벗고 훔쳐본 건 아니라고 해둘게. 이제 정체하고 목적을 밝혀.”
딱히 이놈이 노출증 걸린 변태 새끼란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이해하는 척 넘어갔다.
그에 남자도 해맑게 웃으면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우선 서로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전 라파엘이라고 합니다. 감다키님, 당신과 같은 사람이죠.”
“뭐?”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하는 라파엘.
나는 그의 말을 곧장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사람.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이 녀석도 나처럼 원래 세계 출신이란 거다.
그러고 보니 발키리가 말했다.
장원에도 날 노리는 천좌가 있다고.
그 천좌에 대응할 수단으로 투명화 감지 포션까지 줬다.
그 말은 곧 이 남자가 먼저 만난 발키리와 적대 혹은 경쟁 관계에 있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지금 보이는 친근한 기색도 전부 거짓일 수도 있고.
“……너 같은 놈들을 알아. 천좌라고 했던가? 나한테 관심이 아주 많다면서?”
발키리에게 들었던 말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적개심이 들었다.
남자도 그걸 알아차린 듯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 속내를 읽어냈다.
“네, 말씀하시는 걸 보아하니 그녀를 만난 모양이군요.”
“그래, 너 오면 쓰라고 포션도 주던데?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점점 공격적으로 이야기하자 남자가 눈을 똑바로 떴다.
실눈에 가려져 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날 응시했다.
이전과는 달리 웃음기도 싹 사라져 있었다.
“지금 절 어떻게 생각하실지 압니다. 의심스럽고 위험하게 여겨지겠죠. 하지만 전 위해를 가하고자 온 게 아닙니다.”
남자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것조차 연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확고한 뜻을 담아 말하는 남자를 보니까 조금은 더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리 오래 들을 생각은 없다.
나는 팔짱을 끼면서 쏘아붙였다.
“내가 너한테 칼 안 꽂아도 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해봐.”
“제가 당신의 진짜 적과 적대하고 있기 때문이죠.”
“내 진짜 적?”
위협이 담긴 말에도 남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동요하기는커녕 이번에야 말로 자신의 진심을 전하겠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의아한 심정으로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천좌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나보다 먼저 왔다는 거랑…… 날 열쇠 삼아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거라는 거.”
“반 정도는 알고 계시는군요. 천좌들 사이에서도 세력과 분쟁이 있다는 건 모르시고요.”
예상외의 이야기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희들이 전부 같은 편은 아니란 거야?”
“생각해보세요. 저희들은 같은 세계에서 왔지만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원래 세계 출신이란 것 외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죠.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그렇다면 분쟁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하물며 당신 보다 50년이나 더 먼저 왔다면요.”
50년.
상상도 못한 햇수가 당혹감을 안겨줬다.
나는 눈빛으로 진위를 물었고, 라파엘은 긍정했다.
“저마다 차이야 있지만 대부분의 천좌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이 세계에 있었습니다. 저와 제 동료도 마찬가지고요.”
“……50살처럼은 안 보이는데.”
“플레이어들은 노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세계에선 불로가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의 말이 맞다.
신의 가호를 받으면 노화 정도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플레이어들은 상대적으로 가호를 받기 더 쉬우니까 굳이 종특이 아니더라도 50년 동안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 거다.
애당초 지금 중요한 건 라파엘이 어떻게 늙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그보다 진짜 적이라는 건 뭐야? 천좌들은 죄다 날 노리는 거 아니었어?”
“천좌라고 해서 전부 당신을 노리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 삶에 만족하는 이들이 훨씬 많아요. 괜히 천좌라는 오만한 명칭을 사용하는 게 아니니까요.”
세상을 관리할 권한이 없어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이건가.
듣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스포일러 방지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일단은 플레이어.
성장 속도와 강함은 게임 세계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거기에 50년 이상의 시간이 있었으면 막대한 부와 권력을 얻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렇다면 내 진짜 적이란 건 하스티에게 관리 권한을 빼앗은 찬탈자 본인이겠지.
눈앞의 떡이 자기와 상관없다면 모를까, 포장만 벗기면 내 것이 되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다른 천좌들은 몰라도 찬탈자는 결코 그러지 못했을 거다.
“진짜 적이란 게 누군지 대충 알겠어. 그런데 넌 왜 나한테 붙으려는 거야? 그 놈한테 원한이라도 있냐?”
“그 놈이 아니라 그녀입니다. 당신 생각대로고요.”
그녀라. 찬탈자가 여자였을 줄은 몰랐는데.
가디스 던전이 남성향 게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찬탈자도 남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천좌들 사이에서 1천이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냈고, 강력한 힘을 가졌죠. 거역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요.”
라파엘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차가운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못 믿으시겠지만, 저는 한 때 작게나마 클랜을 운영하던 몸이었습니다.”
“클마였다고? 네가?”
“네…… 풍요의 여신 인안나님을 섬겼죠. 클랜도, 여신님도 1천이 전부 빼앗아 갔지만요.”
라파엘이 왜 1천에게 증오심을 품었는지 알겠다.
1천과 그의 클랜 사이에서 모종의 분쟁이 있었고, 1천은 자신의 무력을 사용해서 라파엘의 클랜을 괴멸시킨 거다.
그 과정에서 지배신인 인안나도 목숨을 잃었고, 클랜 마스터였던 라파엘은 복수를 다짐한 거겠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간단한 이유예요. 1천은 다른 천좌들에게 동맹을 요구했고,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공격했죠.”
말이 동맹이지 사실상 복종을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라파엘은 착잡한 심정으로 덧붙였다.
1천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무릎 꿇리려 한 것이다.
자신만큼 강해질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미리 찍어 누르려 했던 거겠지.
“강대한 세력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싸우고 있지만 저희 같은 중소 규모 세력은 얼마 버티지 못했습니다. 제 동료도 저와 같은 처지죠.”
“그런…….”
라파엘은 중소 규모라고 이야기했지만 지배신이 인안나라면 절대 약하진 않았을 거다.
인안나는 수메르 출신 신중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가졌다.
그만큼 원작 게임에서도 나름 비중이 있었으며 거의 아테나만큼의 저력을 갖춘 신이라 묘사된다.
중앙을 지배하는 전신이 아테나라면 남부를 지배하는 전신은 인안나라 봐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여신이 무력하게 패배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충격적인 마음으로 진위를 확인했다.
“너 그거 구라 아니지?”
“당신이 누군 줄 아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치겠어요. 기록으로도 쉽게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 담담한 태도를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이 이상 진위 여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나는 한 차례 숨을 고른 후에 말을 이었다.
“정리하자면…… 나는 1천에게 노려지고 있고, 너는 복수를 하고 싶으니 우린 같은 편이다 이거냐?”
“맞습니다. 저에겐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저와 제 동료도 당신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도움이 된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1천을 조사하면서 당신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애초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유명하신 분이더군요.”
나나와 다르게 라파엘은 스트리머 감다키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도 50년 동안 여러 플레이어와 접촉했다면 내 얘기를 한 번쯤은 들어봤겠지.
가디스 던전 커뮤니티에서 나만큼 유명한 사람이 또 없으니까.
“동료는 몇 명이나 돼?”
“여기까지 같이 온 사람은 한 명입니다.”
“지금 어디 있는데?”
“이런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거처 쪽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정보를 좀 얻고 싶었거든요.”
“뭐?”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는 라파엘을 보며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라파엘은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당신과 협상이 결렬되면 극단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그만큼 저희에겐 당신의 존재가 절실했거든요.”
“나 아직 붙겠다고 안 했어.”
“그렇죠. 하지만 당신도 저희와 협력할 필요를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이 세상에 대해 많은 걸 모르듯이, 당신도 1천에 대해 무지하시니까요.”
너무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발키리에 이어 하스티에게까지 1천의 위험성을 들었다.
하지만 난 그 자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도,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모른다.
언젠가 반드시 적대하게 될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