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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212화 (21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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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르니아의 새벽

“다들 수고 많았어. 오늘 밤은 푹 쉬고 남은 일들은 내일 마저 처리하자. 알버트 씨 장례도 제대로 치러드리고.”

알버트 씨의 시신은 신전을 내려오면서 회수했다.

다른 괴물들은 전부 푸른색 빛이 되어 사라졌는데 알버트 씨의 시신은 다행히 본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덩달아 추종자의 특징들도 전부 사라져 있어서 니아와 제이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만들어줬다.

“그래…… 내일은 잘 부탁할게 유미야.”

“네,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볼게요.”

화장은 장원에서 하고 뼛가루는 고향 땅에 뿌려주기로 했다.

이러한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미였다.

나나도 일단 사제이기는 하지만 다들 그녀에게 맡길 생각은 별로 없었다.

신앙심이 깊어보이지도 않는데다가 장례에 관해선 완전 문외한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알버트 씨는 생전에 무종교였다고 하니 유미가 가는 길을 보살펴 드려도 불만 없으시리라.

‘나중에 어머니랑 동생 뼛가루도 몰래 뿌려줘야지.’

남몰래 차원낭을 움켜쥐면서 생각했다.

니아에게 끝까지 비밀로 남기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진실을 아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어차피 니아 본인은 어머니가 이미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고.

“그럼 다들 잘 자, 니아랑 제이드도.”

“잠 안 오면 같이 뒤풀이나 할까요~?”

자기 방으로 향하면서 안티오페가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나나도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농담을 건넸다.

그에 니아와 제이드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야, 우리도 좀 피곤하거든.”

“뒤풀이는 율리아나에 돌아가서 하자고. 그래야 다키 등골도 제대로 빼먹을 수 있잖아.”

장난스럽게 말하며 제이드가 날 바라보았다.

다들 수고해주긴 했지만 파티장인 내가 제일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니 율리아나에 가면 한 턱 쏘라고 은근히 찔러 보는 것이었다.

“물론 그래야지. 역사에 남을 대업적을 달성했는데 뒤풀이도 화려하게 해보자고.”

그런 제이드의 속내에 나는 흔쾌히 어울려줬다.

그 말에 안티오페는 방에 들어가다 말고 환호성과 함께 말했다.

“뭐야?! 대장이 쏘는 거야?!”

“그래! 다키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준대!”

“으햐앗~! 그러면 기왕 가는 거 좋은 데로 가자구! 우리들이 가끔 가는 곳 있는데 거기로 가자!”

안티오페의 제안에 벌써부터 지갑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노르니르 소속인 그녀들마저 가끔 가는 식당이라니.

대체 얼마나 호화스러운 식당이란 말인가.

거기서 8명이 실컷 먹을 걸 생각하면 계산서가 오지게 길어질 것이다.

그래도 뭐, 내가 챙긴 천문학적인 수익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나도 이제 절약의 고통에서 해방된 몸이다.

기왕 부자가 된 거 여한 없이 써줄 거다.

“알겠으니까 오늘은 이만 쉬자고. 다들 피곤하잖아.”

“하으움…… 그래…… 티오 너도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들어가서 자.”

내 말에 크림힐트가 적극 동의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셀 수 없을 만큼 주문을 캐스팅해서 피로가 몰려온 것 같았다.

아마 침대에 드러눕자마자 기절 잠에 빠지겠지.

물론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시간으로 따지면 아직 초저녁인데도 아침까지 쭉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고 잠을 청했다.

내 침대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나가 쏘옥 기어들어왔다.

“히히……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어요, 다키님.”

“나나 너도. 너 덕분에 모두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어.”

“에이~ 그게 왜 제 덕분이에요. 다키님이 오더를 잘 내려줘서 그런 거죠.”

나와 마주 보고 누운 채 나나는 더욱더 내게 달라붙어왔다.

딱히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애인끼리 가질 수 있는 오붓한 꽁냥거림이다.

그 귀여운 행동거지에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나나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나나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진짜 매 순간마다 얼마나 의지되는지 몰라.”

“후훗! 이제야 제 진가를 알아보셨네요! 다키님의 정실부인은 역시 저밖에 없…… 하아암……!”

신나게 떠들던 나나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녀도 크림힐트 못지않게 주문을 남발했는데 피곤하지 않을 리 없다.

그 증거로 하품한 후에 그녀는 눈을 비비며 졸린 기색을 보였다.

“내일 마저 얘기하고 오늘은 그만 자자.”

“네헤엥…… 잘 자요 다키님, 제가 많이 사랑해요…….”

애정 어린 말을 속삭이면서 나나가 내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이렇게 서로 껴안고 굿나잇 키스도 받으니까 나나가 내 여친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녀를 더욱 소중히 대해줘야겠다는 생각도 말이다.

벌써 새근새근 잠든 나나의 머릿결을 한 차례 쓰다듬어준 뒤 나도 편히 눈을 감았다.

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눈을 떠보니 익숙한 공간이었다.

쓸데없이 넓은 집과 불쾌함마저 느껴지는 주방이 보였다.

이 구조, 틀림없이 우리 집이다.

“돌아온 건가……?”

의아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주방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식탁에 둘러앉은 채 오손도손 식사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내 자리가 없는 건 여전했다.

애초에 내가 앉을 거란 걸 배제한 채 꾸며진 식사 시간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광경이라 이젠 익숙해졌다.

“아 뭐야, 저 새끼 또 내려왔네.”

내 기척을 느끼자마자 작은 누나가 신경질적인 어투로 내뱉었다.

“야, 취업도 안 한 새끼한테 내줄 자리 없거든? 얼굴 보기도 싫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내비 둬, 부끄러운 줄 알면 어련히 올라가겠지.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게 생각이 없겠니?”

작은 누나에 이어서 큰 누나까지 내게 모멸을 퍼부었다.

날 자기네 동생으로 보지 않는 태도는 변함이 없다.

아니, 사람으로 여기는지조차 의문이다.

평소라면 이 말을 듣고 무척이나 분개했을 것이다.

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변명하고, 되지도 않는 말을 주워섬겨대며 그녀들에게 대항하려 들었겠지.

말싸움 해봤자 반듯한 직장을 가진 누나들을 이길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늘은 그렇게 말싸움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들의 말이 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날 이용하는 그녀들이 우스워 보였다.

“푸흡…….”

“웃어……? 야 너, 뭔데 쳐 웃냐? 누나 말이 우스워?”

센 척은 있는 대로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작은 누나.

눈을 치뜨며 다가오는 게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다.

저런 여자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니.

저 나이 먹고도 일찐 놀이를 떼놓지 못하는데 참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나는 그런 누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철 좀 들어 작은 누나.”

“뭐……?”

내 말에 작은 누나의 동공이 커진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씹덕 새끼야, 너 지금 나한테 뭐라 했어?”

“철 좀 들라고. 그 나이 먹고도 동생 괴롭히니까 좋아? 고등학교 때 끝내야할 짓을 몇 살까지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반쯤 도발하듯이 말하자 누나의 얼굴이 시시각각 일그러졌다.

그녀는 기어이 화를 참지 못하고 내게 손찌검을 날렸다.

“이 새끼가 진짜!!”

탁!

“……?!”

물론 그 손이 내 뺨을 후려치는 일은 없었다.

둘째 누나는 그저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격투기를 배운 것도, 싸움에 도가 튼 것도 아니다.

그런 누나의 손찌검 같은 건 전혀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게임 세계의 감다키가 아닌, 원래 세계의 감다키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나 욕하는 거, 훈계질하는 거, 그거 다 누나들 있어 보이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렇게 남 깎아내리지 않으면 자존심이 안 서?”

“뭐래, 씨발 좆같은 오타쿠 새끼가……! 좆도 아닌 게 잘난 척 이빨 털지 마……!”

정곡을 찔렀는지 작은 누나는 이를 악문 채 날 노려봤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급기야 부모님이 나섰다.

“얘, 그만 좀 해! 왜 괜히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애를 들쑤시고 그러니!”

“너희 엄마 말이 맞다. 저런 놈 그냥 무시하고 너희만 잘 하면 돼. 괜히 상종해서 싸움 내지 마라.”

참 한결 같은 집안이다.

남매가 싸우고 있는데 엄마도 아빠도 날 비난하기 바빴다.

예전에는 서운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그들의 애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차분한 어투로 부모님에게 대꾸했다.

“그래, 엄마도 아빠도 나한테 신경 꺼. 나도 자식을 트로피 취급하는 부모랑은 상종하기 싫으니까.”

“뭐? 이 자식이 뭐 어쩌고 저째?!”

내가 한 마디 해주니까 아빠도 열불을 터뜨리며 고함을 쳤다.

물론 난 1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늙은이가 뭐라 소리 지르던 말든 내 할 말만 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아빠도 엄마도 결국엔 자식을 자기 업적 취급하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었으면 누나들 안 데려왔겠지.”

“야, 너 진짜 작작 안 해? 엄마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큰 누나도 이런 말하니까 찔리긴 하나 봐? 왜? 자기가 양부모 트로피라는 거 떠올리니까 자괴감이라도 드나?”

큰 누나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반박했다.

“너, 너……!!”

그러자 큰 누나는 순간 말을 못 잇더니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렇겠지.

허구한 날 눈에 힘주고 다니는 큰 누나지만 그녀에게도 약점이 있다.

게임 말고 잘 하는 거 없는 것이 내 약점이듯, 부모의 트로피가 되기 위해 악착 같이 살아온 삶이 누나의 약점인 것이다.

“이런 미친 새끼……! 당장 나가!! 너 같은 놈은 내 아들도 아니야! 내 집에서 썩 나가!!”

급기야 아빠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면서 빽빽 고함을 내질렀다.

안 그래도 슬슬 나갈까 했다.

이런 집안엔 더 이상 미련이 없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말자고요. 전혀 안 그리울 거예요.”

날 욕하는 가족들에게 등을 돌린 채 집을 나섰다.

집을 나오는 동안 가족들의 모습도, 그립지 않은 집안의 광경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섰을 때는 너무나 반가운 얼굴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나와 헤베, 그리고 유미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

그들이 날 반겨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게임 세계에서 이뤄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남부럽지 않을 업적도 쌓았다.

하지만 그건 결국 원래 세계에서 이뤄낸 업적이 아니다.

어쩌면 게임 세계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내 망상일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있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넌 그저 현실에서 도망친 패배자야.]

[현실에서 못 이루는 일을 상상하며 자위한 것뿐이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꼭 정답인 건 아니다. 난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래…… 하지만 도망쳐서 잘 되지 말란 법도 없잖아.”

세상 사람들 중 대부분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거다.

그 일로 스트레스도 받고, 어디론가 도망쳐서 새 삶을 살고 싶기도 할 테지.

그런 사람들을 보며 누군가는 말한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남들도 다 똑같이 힘드니까 엄살 부리지 마라.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을지언정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굳이 이세계 같은 곳에 가지 않더라도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처음엔 시도하는 것조차 힘들지 몰라도 고통스러운 현재에서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세상이 죽도록 싫었던 나지만 나아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중소기업 취업이나 방송 말고도 나한테 맞는 일을 찾아냈을지도 모르지.

이미 내 입맛에 맞는 세상에 와놓고 이런 말을 하면 설득력 없겠지만.

“도망쳤다느니, 패배자라느니 욕해도 좋아.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내가 잘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겠어.”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고통 받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무렵이었다.

“잘 생각했어.”

“……?”

새하얀 공간 속에서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느덧 동료들의 모습도 사라졌고, 노란 망토를 뒤집어 쓴 아담한 체구의 여성만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너무나 특징적인 모습에 나는 단숨에 그녀를 알아봤다.

날 이곳으로 데려온 인물이자 모든 일의 시작.

유다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안녕 다키야. 가족들하고 마지막 인사는 잘 나눴어?”

친근하게 인사해온 그녀는 내게 대뜸 질문을 건넸다.

그에 나는 의아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마지막 인사라니…… 이건 그냥 꿈이잖아.”

“비단 꿈인 건 아니야. 네가 있었던 공간은 전부 허상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가족들은 진짜야. 정신과 정신이 연결돼서 만날 수 있었던 거지.”

이해하기 힘든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내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내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나랑 가족들이 같은 꿈을 꾸었다는 거야?”

“좀 더 세세한 이야기가 있지만 뭐…… 그냥 그렇다고 해둘게. 아무튼 작별 인사는 어땠어?”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며 묻는 유다희.

그녀의 얼굴은 커다란 후드로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살짝 드러난 부분만 봐도 상당한 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윤기를 내며 흘러내리는 금발과 뽀얀 피부에 눈길을 빼앗기길 잠시.

나는 후련한 기분으로 유다희에게 말했다.

“어땠긴…… 좆같았지. 그런 가족들 만나는 게 뭐가 좋다고.”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이는데?”

“그야 그동안 못 했던 얘기 다 하고 왔으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 있게 이야기해보는 거 처음이었거든.”

내 말에 유다희는 그렇구나, 라며 작게 웃었다.

내가 느낀 심정에 공감하는 기색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난 어떻게 게임 세계에 보낸 거고? 아니, 애당초 게임 세계는 대체 뭐야?”

생각보다 차분한 만남에 신기해하며 나는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전부 물어보았다.

이에 유다희는 착잡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 세계는 내가 만든 세계야. 오직 다키, 너만을 위해 만든 세계지.”

============================ 작품 후기 ============================

메리 크리스마스

다들 이번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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