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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르니아의 새벽
“니케…… 곧 다시 만나겠구나…….”
날개가 사라지자 아테나의 몸은 그대로 추락했다.
지금 그녀의 발밑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저대로 두면 1층까지 수직 낙하하고 말 것이다.
아무리 여신이라 해도 그 정도 충격을 받고 멀쩡할 리 없다.
싸움에서 패한 이후엔 더더욱 말이다.
“여신님!!”
그렇게 떨어지는 아테나를 향해 재빨리 날아갔다.
공중에서 가속한 나는 이윽고 그녀의 몸을 낚아챘다.
힘없이 떨어지던 아테나는 내 품에 안기게 됐고, 나는 균형을 잡으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갔다.
“투사여…… 이게 무슨…….”
내 행동에 아테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자신을 감싸줄 것이라곤 생각도 못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싸움도 끝났는데 여신님이 떨어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아니면 이대로 낙사하고 싶으셨어요?”
내 물음에 아테나는 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는 너무나 많은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백성을 지키기는커녕 그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줬어요. 그런 제게 살아갈 자격 같은 건…….”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누구보다 장원의 던전화를 괴로워한 건 다름 아닌 아테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듯 기억 속에 잠겼다.
그들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폐허가 된 장원을 바라보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일 거다.
이대로 죽고 싶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
제우스가 죽고 올림포스가 멸망한 후, 아테르니아는 그녀에게 살아가야할 이유를 만들어줬다.
삶의 의미 그 자체인 곳이 사라져버린 지금, 그녀의 눈앞엔 절망적인 미래 밖에 보이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착각하지 마세요, 여신님. 저는 그냥 여신님 좋으라고 구해드린 게 아니니까요.”
“그러면…….”
“벌써 잊으셨어요? 싸움이 끝난 뒤에 제가 뭘 받을 지 말씀드렸잖아요.”
그제야 아테나는 싸우기 전에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요구한 것은 아테르니아의 통치권과 아테나 본인의 신변이다.
그리고 난 아테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아테르니아도, 아테나도 이제 다 내 것이다.
계약대로 나는 그녀의 소유주가 된 것이다.
“여신님의 목숨은 이제 여신님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전 여신님을 죽게 둘 생각 없어요.”
“투사님…….”
아테나는 어느덧 나에게 경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에게 뭔가 존경심이라도 느낀 걸까.
달라진 그녀의 태도가 조금 신기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아테나의 마음이 신경 쓰였다.
“지금 여신님이 무슨 심정인지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죽으란 법은 없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면 백성들을 볼 낯이 없습니다…… 그들은 저 때문에 괴물이 되어 살지도 죽지도 못했을 텐데…….”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요. 백성들이 여신님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 분들이라고 해서 여신님이 죽기를 바랄까요?”
아테르니아가 던전화한 건 아테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백성들도 아주 잘 알고 있을 거다.
애당초 아테나가 재앙신이 된 건 눈을 잃어버린 채로 무리하게 적들과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았다면 아르테니아는 세트의 군세에게 점령당했겠지.
이러나저러나 아테나의 백성들에게 희망적인 결말은 없었다.
그들이라고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실제로 그나마 말을 할 수 있는 추종자들 중 아테나를 원망하는 이는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순간에도 그녀에게 충성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아테나의 죽음을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
내 말에 아테나도 납득하고 말았다.
백성들이 아테나의 마음을 잘 알 듯, 그녀 또한 백성들의 마음을 잘 알 테니까.
지상에 도착할 때쯤, 아테나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너무 어리석었군요. 투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죽어 버리는 건 누구도 바라지 않을 거예요…….”
“잘 생각하셨어요. 모처럼 다시 이성을 되찾으셨잖아요. 나쁜 생각만 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해 봐요. 저도 도와드릴 테니까요.”
내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하자 아테나가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헤베의 눈동자처럼 맑고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두 사람 다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으니 닮을 만도 하다.
이렇게 보니 새삼 아테나에게서 헤베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투사님…… 이 은공을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내 말에 아테나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 위에선 감사와 미안함이 뒤섞여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쩜 당황하는 모습까지 이렇게 쏙 빼닮을 수 있을까.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그녀와 헤베가 자매라는 걸 부정할 수 없을 듯했다.
아테나의 말에 미소로 답하며 나는 그녀를 내려주었다.
“다 생각이 있으니까 지금은 좀 쉬세요. 반가운 얼굴도 다시 보고요.”
“반가운 얼굴이요?”
한 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아테나.
다음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아테나가 입을 열려할 때 일행들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다키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공중에서 싸우다 보니 일행들과 제법 멀어진 모양이었다.
급히 달려오는 그들을 보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나도 여신님도 멀쩡해.”
“다행이다……! 싸우는 거 보고 얼마나 살 떨렸는지 몰라요! 물론 다키님이 이길 거 알았지만 엄청 쫄았다구요!”
“그러게…… 기원전쟁이라도 보는 줄 알았어.”
한 걸음에 달려온 나나와 크림힐트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했다.
확실히 나와 아테나의 싸움은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의 전투와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스케일이 컸으니 말이다.
가디스 던전은 일정 구간이 지나면 소울라이크에서 점점 핵 앤 슬래시로 변모해 가는데 마신화가 그 초석을 제공하는 스킬 중 하나다.
아테나의 전투력 역시 만만찮으니 일행들 입장에선 여러모로 충격적일 것이다.
“이분들은…… 투사님의 동료 분들이로군요.”
일행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아테나는 그들을 살피며 말했다.
정확히는 그들의 상처를 살펴본 거지만 말이다.
아테나라면 일행들의 상처가 자신 때문에 생긴 거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그녀의 얼굴은 다시금 죄책감으로 물들었고 서둘러 내 품에서 떨어졌다.
그 후 일행들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다들 저 때문에 그렇게나 다치시다니…… 정말 면목 없습니다…….”
고개 숙이며 사과하는 아테나의 행동에 일행들은 크게 놀랐다.
여신이, 그것도 한 지역을 통치했던 강대한 지배신이 한낱 인간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다니.
다른 곳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특히나 스쿨드처럼 성격에 문제 있는 여신은 더더욱 이런 태도를 안 보이겠지.
그래서인지 크림힐트와 안티오페, 카시아는 아테나의 사죄를 듣고 상당히 놀랐다.
“아무래도 네가 화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제이드?”
“그래…… 억지로 화내라 해도 못 내겠어.”
안티오페가 복잡한 심경으로 제이드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제이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과를 듣고서도 아테나에게 분풀이를 할 수는 없겠지.
애당초 제이드 또한 속으론 아테나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이드는 경박하지만 미련하지는 않다.
괜히 증오할 대상을 만드는 일은 없을 거다.
니아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고개 드세요 여신님. 여신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때마침 니아가 일행들을 대표해서 아테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어딘가 후련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테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에 아테나는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성이 없었다 해도 여러분을 해한 건 다름 아닌 접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사과의 표시 같은 건 안 해도 돼요. 어차피 여신님 보물 창고 다 털어갈 거니까요. 그거 눈 감아 주면 저희도 그냥 넘어갈게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니아.
그녀는 당돌하게 아테나와 눈을 마주치다가 문득 내 쪽을 보며 윙크했다.
그런 니아의 태도에 아테나가 당황할 무렵이었다.
“앗……! 여러분 저기 좀 보세요……!”
유미가 문득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엔 푸른색으로 빛나는 광채들이 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타났다.
“예쁘다…….”
“저건 대체…….”
“이곳 사람들의 영혼이에요. 다들 무사히 성불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넋을 잃고 광채를 바라보자 유미가 엄숙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리 말하며 유미는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성불하는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기도하는 것이리라.
“추종자들도 전부 사라지고…… 이제 정말 끝이구나…….”
“그래, 아테르니아는 더 이상 던전이 아니야. 이제 추종자도, 재앙신도 없어.”
후련하다는 듯이 말하는 안티오페에게 대답하며 슬쩍 아테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이끌리듯 푸른색 광채, 아니 백성들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저 몽환적인 빛 무리를 보며 아테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들에게도 사죄할까? 아니면 부디 좋은 곳에 가길 기도할까?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녀에게 작별할 시간을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후엔 소중한 사람과 다시 만나게 해줘야지.
우리는 빛 무리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들 지쳐서 한동안 일어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다른 이들에게도 아테나를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끝내 마지막 영혼이 사라질 때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슬슬 돌아갈까?”
* * *
던전화가 풀린 장원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던 새 울음소리가 사라져서 풀벌레의 소리만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늦은 저녁의 정취를 느끼며 우리는 나나의 빛에 의지한 채 본성 밖으로 나섰다.
지금 바로 율리아나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피곤했다.
마침 하룻밤 묵을 장소도 있고 말이다.
“다녀왔습니다, 여신님.”
피로에 젖은 목소리로 헤카테를 불렀다.
문은 저번처럼 열려 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며 헤카테를 부르자 아테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투사님…… 방금 뭐라고…….”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 안쪽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헤카테가 읽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아테나…….”
“유모님……?”
“정말 너니……? 이성이 돌아온 거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헤카테는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이내 아테나에게 달려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보고 싶었다, 아테나……! 네가 정말로 돌아오다니……! 아아, 믿기지가 않는구나……!”
아테나를 안은 시점에서 헤카테의 목소리는 이미 한껏 젖어 있었다.
울음 섞인 그 말에 아테나는 한동안 굳은 듯 서 있었다.
물론 그것도 잠시, 헤카테 못지않게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저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유모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네가 뭐가 미안하니…… 사과하지 말거라…… 적어도 내게는 사과하지 않아도 된단다…….”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는 아테나를 헤카테가 부드럽게 어루만져줬다.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모녀였다.
유모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헤카테가 친엄마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던 것이다.
“약속 지켰습니다, 헤카테님. 장원은 정화됐고 아테나님은 더 이상 재앙신이 아니에요. 전부 헤카테님 덕분이에요.”
모녀 상봉을 지켜보던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보고 겸 감사를 전했다.
헤카테가 마신화 스킬을 개방해주지 않았다면 장원 공략은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나 혼자 2페이즈에 돌입한 아테나를 제압할 수도 없었을 테지.
혼자 제압하기는커녕 1페이즈 때부터 부상자들이 속출했을 것이다.
아테나가 제 정신으로 돌아온 데에는 헤카테의 공도 크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 전부 네 덕이란다.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구나…… 이 아이를 온전히 안아볼 수 있는 날이 돌아오다니…… 정말 꿈만 같다.”
진심어린 감사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이걸로 아테나도, 헤카테도 내게 큰 호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나중에 무언가 부탁하면 흔쾌히 승낙해주겠지. 내가 요구하는 건 뭐든지 내줄 기색이었다.
“감사는 성소에서 받을게요. 지금은 모녀끼리 좋은 시간 보내세요. 오랫동안 못 만났는데 이야기할 시간은 있어야죠.”
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시간만 해도 10년이다.
신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시간일지 모르나 한 쪽이 이성 없는 괴물로 변해 있었으니 무척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리라.
“너는 정말 하나서부터 열까지 멋지구나. 이토록 훌륭한 아이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시겠죠. 팬티만 입고 다니는 변태가 멋있어 보이면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어요.”
헤카테의 말에 장난스럽게 받아치며 일행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장원에 온 이후로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아니면 마신화의 부작용일 수도 있고.
어찌되었든 지금은 좀 편히 쉬고 싶었다.
헤카테는 아테나랑 이야기하느라 우리를 신경도 쓰지 못했다.
이제 와서 방을 못 쓰게 하지는 않을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