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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걱정 마 형. 여신님을 살리면 꼭 사과하게 만들 테니까.”
제이드의 안색을 살피면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건네줬다.
그에 제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다키. 네가 우리 대장이라서 다행이야.”
“대장은 무슨…… 그냥 잘 아니까 앞장 서는 거지.”
“거 참, 이제 와서 뭘 그래? 여기서 네가 대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다고.”
제이드의 말에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맞아요! 다키님이 대장 아니면 누가 대장이겠어요!”
“난 원래부터 대장이라 생각했다구.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 대장!”
일행들의 인정에 나는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던전에서 내가 보여준 행동들이 그들의 신뢰를 끌어낸 듯했다.
니아와 제이드, 그리고 노르니르의 세 사람들과도 비로소 동료가 된 기분이다.
흐뭇한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끝까지 잘 해보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최상층에 도달했다.
최상층에 도달하니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연이은 전투를 치르고 간간히 휴식도 취해서 벌써 이런 시간이 된 것이었다.
신전의 최상층은 전망대의 옥상처럼 아테르니아의 구조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그 위에 하나둘씩 보이는 별들로 인해 최상층은 무척이나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아간 우리는 웬 건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신전처럼 생긴 화려한 대리석 건물이었다.
저곳이 바로 아테나의 거처다.
건물을 눈에 담은 일행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아테나는 어디 있는 거지……?”
“건물 안에 있지 않을까?”
조금씩 건물에 접근하면서 일행들은 아테나의 행방을 찾았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무거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곧 나올 거야.”
“나오다니 설마…….”
“우리가 온 걸 알아차린 거야?”
일행들의 질문에 나는 칼을 뽑는 것으로 대답했다.
다음 순간.
신전 위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낙하했다.
카가아아앙!!
손에 든 창으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나타난 장신의 여성.
화려한 은색 투구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으며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타이즈를 입은 모습이었다.
적나라하게도 그녀가 입은 전신 타이즈는 가슴부터 배까지 파여 있어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과 예술적인 복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바로 발기했을 만큼 음란한 차림새였다.
그녀가 바로 이 지혜 잃은 장원의 지배신이자 전쟁의 여신 아테나였다.
“저 여자가 아테나…….”
“과연 재앙신이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짓눌리는 것 같아…….”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아테나를 보며 일행들을 적잖은 위압감을 느꼈다.
입고 있는 옷은 야하기 그지없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마치 싸우고자 하는 의지만으로 상대방의 피부를 찢어발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미나 나나는 아예 아테나의 투지에 압도당해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이, 이잇! 존나 야하게 입어놓고 멋있는 척 하지 말라구요!”
오죽 하면 나나가 야한 차림을 보고도 저런 식으로 말할까.
평소 같았으면 우효오오옷! 하고 소리치며 온갖 성추행을 했을 텐데 말이다.
“…….”
우리가 아테나의 모습을 보고 숨을 죽일 때 그녀는 우리를 향해 천천히 창을 겨누었다.
한 손에는 깃털로 장식된 푸른색 창을, 다른 한 손에 커다란 방패를 든 채 싸움을 걸어오는 아테나.
원작 게임에서 그랬듯이 최상층에 들어서자마자 보스전이 시작됐다.
“다, 다키님! 그러고 보니 여신님 눈 챙겨왔잖아요! 지금 당장 써버리죠!”
그녀의 전의를 감지한 나나가 한껏 위축된 채 말했다.
나나의 말에 크림힐트도 동조했다.
“맞아…… 불필요한 전투를 할 필요는 없잖아…… 특히 저 여신하고는…….”
사실상 플래티넘 등급인 그녀도 살아있는 재앙과 싸우고 싶지는 않을 거다.
나와 함께 하면서 강력한 적들을 여럿 쓰러뜨렸으나 아테나 앞에선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리라.
승리는커녕 우리들이 저 창에 차례차례 꿰뚫리는 광경만 떠오르겠지.
나도 가능하다면 싸우지 않고 넘어가고 싶다.
하지만 아테나의 눈은 절대 그녀와의 전투를 편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성을 찾아준다는 게 보스전을 프리 패스시켜준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 돼…… 지금 상태에선 눈을 건네주려 해도 저항할 거야.”
“아니 기껏 잃어버린 눈알 찾아줬는데 왜 거절하는 거예요?!”
“제 정신이 아니니까 그렇겠지 뭐! 어차피 다들 싸울 각오하고 온 거잖아! 이제 와서 쫄지 마!”
니아가 나나에게 대답하는 순간 이윽고 아테나가 우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아앗!!”
파바악!
그녀는 날개도 없는데 마치 날아오르는 것처럼 도약했다.
그로 인해 아테나와 우리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허공에 잔상이 남으며 굉음이 들려올 정도였다.
카가아아앙!!
“크흐윽!”
다행히 간발의 차이로 니아가 아테나의 창격을 막아냈다.
푸른빛이 일렁이는 창을 막아내곤 니아는 온힘을 다해 방패치기를 날렸다.
“쉽게 뚫을 수는 없을 걸!”
표범 문양이 새겨진 방패가 빛을 발했다.
과연 알버트 씨의 유품이다.
원래 니아가 쓰던 방패였다면 막는 건 고사하고 관통 피해를 받아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 방패는 관통 효과를 저항하고 데미지도 상당 부분 상쇄했다.
등급으로만 따지면 내 명줄 절단과 동급이니 충분히 납득이 되는 효과였다.
쿠우웅!
니아의 전력을 다한 밀쳐내기에 아테나는 충격을 받으며 후방으로 밀려났다.
인간형 적이어서 인내력이 낮은 것이었다.
이를 보고 안티오페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뭐야~! 전신이라면서 고작 그 정도로 휘청거려?!”
“잠깐……! 안티오페, 기다려!”
재앙신과 싸운다는 흥분감 때문일까.
안티오페의 텐션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물론 좋은 의미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니아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는지 물불 가리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아테나도 안티오페를 향해 창을 내지르며 두 사람의 공방전이 시작됐다.
“내가 물고 있을 테니까 엄호해줘!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
“멍청아 무턱대고 덤벼들지 마! 반격당한다고!”
기고만장하게 소리치는 안티오페에게 경고하면서 나는 재빨리 비수를 준비했다.
원딜들도 공격을 퍼부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테나가 우리들이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안티오페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흐읍!”
“앗?!”
카가아아앙!
치열하게 이어지던 공방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아테나에게 기울었다.
그녀는 정교한 기술로 도끼를 쳐내더니 순식간에 안티오페의 목전을 노렸다.
마치 맹금류의 발톱처럼 안티오페를 노리는 창날.
도끼를 쳐내고 반격을 날리는 데에는 초단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공격 패링 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게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푸후우우욱!
“커흐윽?!”
급기야 안티오페는 목덜미를 제대로 맞고 말았다.
그녀 역시 신의를 입어서 목이 관통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나는 그런 안티오페를 받아주면서 쫓아오려는 아테나에게 비수를 날렸다.
쐐애액!
팅! 티딩!
잇따라 날린 비수를 가볍게 쳐낸 아테나.
뒤에선 제이드와 카시아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화살을 날렸으나 두 사람의 화살은 아테나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활이 날아오는 족족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색 기운이 화살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이런 미친! 왜 화살이 가다가 떨어지는 거야?!”
“말도 안 돼…… 신력으로 우리 공격을 모조리 찍어 누르고 있어……!”
그 광경을 본 카시아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사격을 멈추었다.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 정도로 막강한 신력.
아테나의 특수 능력 중 하나인 전신의 위압감이었다.
일정 거리 이상에서 날아오는 원거리 공격을 모두 상쇄하는 까다로운 능력이다.
원딜들에게도 근거리, 중거리에서의 싸움을 강요하여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나나야! 크림힐트!”
“위대한 빛의 창세신이시여! 당신의 위광으로 저희를 보호해주세요!”
“하아앗!”
원거리 공격을 상쇄하며 달려오는 아테나.
그녀를 보며 지시를 내리자 나나와 크림힐트가 주문을 영창했다.
콰가악! 카가각!
파아아아앗!
크림힐트의 빙하는 우리의 앞을 막아줬고, 나나의 장벽은 아테나의 후방을 가로막았다.
그로 인해 아테나의 전후는 순식간에 차단됐다.
그녀는 재빨리 측면으로 빠져 나오려 했지만 그곳에선 니아와 엘레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키하아아앗!]
“하아아아압!!”
카앙! 카아앙!
카가아아앙!
엘레나의 발톱이 연이어 날아들었고, 그 위에 탄 니아도 거세게 메이스를 휘둘렀다.
두 사람의 물 흐르는 것 같은 연격에 아테나도 조금은 밀리는 것 같았다.
그 틈에 니아의 후방으로 간 유미가 물귀신을 발동했다.
“한 많은 원혼들아, 편히 눈 감지 못하고 수면 위로 떠오른 영혼들아…… 이리 와서 데려가라, 물밑까지 끌고 가 동포로 삼아라……!”
[으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악!!]
물귀신들이 아테나의 발을 일제히 붙잡았다.
유미는 그걸로 끝내지 않고 원귀들까지 몇 마리나 날려 보냈다.
순식간에 귀신들에게 둘러싸인 아테나는 눈에 띄게 굼떠졌고 이는 니아가 제대로 한 방 먹힐 기회를 제공해줬다.
“조금 어지러울 거야!!”
“……!”
빠가아아악!!
혼신의 힘을 다한 횡 공격이 아테나의 머리를 후려쳤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아테나는 한 차례 주춤거렸다.
동료들이 응전하는 와중 나는 안티오페에게 포션을 먹여줬다.
나나는 니아를 지원하느라 힐해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대장…… 바보처럼 멋대로 뛰쳐나가서…….”
포션을 받아 마시면서 안티오페는 풀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티오페의 손을 이끌었다.
“괜찮아, 나도 사전에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으니까.”
아테나와 싸우기 전, 나는 일행들에게 그녀에 관한 정보를 대략적으로 설명해줬다.
창과 방패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부터 움직임이 빠르고 반격에 능하다는 것까지 말이다.
하지만 게이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설명이 어려웠다.
아테나가 어느 타이밍에 반격을 가하는 지, 반격에 대응하기 위해선 어떻게 대처해야지 직접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한 것이었다.
프레임이니 패턴이니 하는 이야기를 일행들이 알아들을 리 없으니까.
만약 설명할 수 있었다고 해도 아테나와 제대로 싸워보기 전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세세한 부분은 직접 싸우면서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내가 계속 지시할 테니까 너는 나만 믿고 따라와. 알겠어?”
“으, 응……! 알겠어 대장……!”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안티오페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지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한 시가 긴박한 상황에서 안티오페의 마음까지 들여다볼 여유는 없으니까.
“내가 니아 누나 맞은편으로 갈 테니까 안티오페 너는 떨어져서 대기해! 나오려 하면 바로 번개 떨궈!”
안티오페에게 지시하며 나는 니아와 함께 아테나를 포위했다.
그 순간, 아테나는 니아와 엘레나를 향해 방패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끼아아아악!!]
“크흐윽?!”
[키하아아앗!!]
방패에 새겨진 문양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방패엔 웬 뱀 머리를 한 여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쯤 되면 다들 이 방패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것이다.
방패의 이름은 바로 아이기스.
아테나의 방패이자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무기 중 하나.
영웅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퇴치할 때 쓴 방패로도 잘 알려져 있다.
파아앗!!
문양이 비명을 지른 직후, 방패에선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에 맞은 니아와 엘레나의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석화가 발동되어 몸이 돌로 변하는 것이었다.
결정화와 비슷한 상태이상이지만 대상을 즉사시키는 결정화와 다르게 석화는 일정 시간 동안 무력화시키기만 한다.
그래도 위험한 능력임은 변함없다.
석화되어 있는 동안엔 적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아테나의 무장을 설명할 때 조심하라고 일러줬지만 역시 쉽게 피할 수는 없는 듯했다.
나는 니아와 엘레나가 공격당하기 전에 아테나의 배후를 노렸다.
“쯔아아아앗!!”
파고들기로 거리를 좁히며 에어본을 유도했다.
물론 아테나는 쉽게 걸려주지 않았다.
내 기척을 감지한 그녀는 재빨리 내 공격을 패링하며 반격을 가해왔다.
카가아아앙!!
촤아아아악!
“……!”
아테나가 찌르기를 가하자 창에서 푸른색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검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돌진하는 맹금류처럼 날아오는 그것을 나는 구르기로 간신히 피해냈다.
내 머리 위를 지나간 아우라는 장벽과 빙하를 순식간에 박살내고 뒤쪽에 있던 신전을 허물어버렸다.
고작 공격 한 방으로 신전의 반이 무너진 것이었다.
‘더럽게 무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