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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207화 (20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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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여, 여러분! 여기 좀 와보세요!”

불편하기 그지없는 진실을 마주한 뒤 다시 복도로 나올 무렵이었다.

니아랑 같이 갔던 유미가 화색을 띄우며 달려왔다.

아니, 비단 화색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흥분한 기색이었다.

“왜 그래 유미야?”

“포션 저장고라도 찾았어?”

그런 일을 겪고 나서인지 우리의 텐션은 대체로 낮았다.

유미가 무슨 말을 하던 그녀처럼 신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허나 유미가 찾아낸 건 평범한 포션 같은 게 아니었다.

“포션 정도가 아니에요……! 저희가 보물 방을 발견했어요!”

“보물방?”

“직접 와서 보시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얼른요, 얼른!”

우리가 의아해하자 유미는 급기야 내 손을 붙잡고 우리를 끌고 갔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곳은 금품 보관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비단 귀한 약재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가 아니었다.

아테나가 소유한 온갖 귀중품을 다 모아놓은 창고다.

보물들을 잔뜩 모아 놓은 방이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흐에엑……! 설마 이거 다 금이야?!”

“보, 보석들도 엄청 많아요……!”

금품 보관실에 들어선 우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보물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장식대 위에는 수많은 장신구들이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렸고, 무엇 하나 싸 보이는 게 없었다.

월계수 잎 모양의 금관, 다이아몬드를 엮어 만든 목걸이, 순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항아리 등.

하나서부터 열까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가치 높은 보물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이 말 그대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누나네 어머니와 동생한테는 미안하지만, 잠시나마 두 사람의 일을 잊을 수 있었다.

“다, 다키님! 이거 다 팔면 얼마나 할까요?! 저택을 떠나서 마을 하나도 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쏟아질 것 같은 보물들을 보며 나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긍정했다.

“그렇겠지……. 당장 이 금관만 해도 500만 아웬은 할걸?”

“뭐?! 500만?!”

큰 소리로 반응한 건 안티오페였다.

나나는 아예 입을 쩍 벌린 채 무어라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다른 이들 역시 눈이 돌아갈 것 같은 표정으로 보물 더미를 바라보았다.

금관 하나에 500만 아웬.

그렇다는 건 다른 보물들도 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란 뜻이다.

“그럼 여기 있는 보물들을 다 팔면 대체 얼마나 나오는 거야……?”

안티오페는 차마 눈도 깜빡거리지 못하며 방을 둘러보았고, 뒤늦게 따라온 제이드와 카시아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환호와 경악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동료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졌다.

본래 이 방에선 금관 하나만 가져갈 수 있었다.

원작 게임에선 금관을 제외한 다른 보물들은 전부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게임 세계에선 배경과 아이템의 경계가 없었다.

금이면 금이고 보석이면 보석이다.

아이템 창은 뜨지 않았지만 보석상에선 그런 걸 가리지 않고 매입해줄 것이다.

난 잘 모르지만 이런 데에 해박한 크림힐트도 분명 진품이라고 하니 틀림없을 거다.

이렇게 보면 게임 세계의 변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거 같다.

하지만 방금 전에 너무나 끔찍한 일을 목격했기에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이것 좀 봐 다키야, 되게 예쁘지 않아?”

때마침 보석 반지를 하나 발견한 니아가 그것을 손에 끼우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을 들으니 반사적으로 하피로 변한 그녀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태어나기 직전이었던 그녀의 동생도 말이다.

“그, 그래…… 누나한테 잘 어울리네……. 엄청 예뻐.”

“히힛, 고마워. 그러면 이건 내가 챙겨도 되는 거지?”

배시시 웃으면서 반지를 바라보는 니아.

아버지의 일 때문에 많이 심란했던 그녀지만 일부러 좋은 생각을 하며 극복하려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덜미를 잡혀서 조금 전의 일을 누설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니아는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함부로 막 끼지 마, 니아. 저주라도 걸려 있으면 어떡하게.”

“어떡하긴요! 제가 바로 해제해주면 되죠!”

“마, 맞아! 니아, 이건 어때? 너한테 되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어떻게든 니아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너무나 적극적인 행동에 니아는 조금 의아해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일행들과 어울렸다.

“그나저나 이 정도라면 저 변태 사제 말처럼 마을 하나도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아예 작위랑 영지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자, 작위라고요……?”

“그러면 귀족도 될 수 있다는 거예요……?!”

한창 장신구를 구경하던 도중, 유미와 나나가 크림힐트의 말을 듣고 경악을 터뜨렸다.

그에 크림힐트는 금으로 만들어진 항아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가문도 그런 식으로 작위 받았거든.”

“뭐? 크림힐트 너 귀족이었어?”

내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묻자 크림힐트는 순순히 긍정했다.

“아버지가 백작이야. 원래는 자작부터 시작했는데 언니랑 스쿨드님 입김 덕분에 출세했어.”

크림힐트의 담담한 설명에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모험가 생활은 왜 하는 거야? 이런 거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잖아?”

비록 돈을 주고 산 작위지만 귀족은 귀족이다.

아니, 오히려 작위를 살 정도로 풍족한 집안이기에 여느 귀족들 보다 더 부유할 수도 있다.

그런 집안의 영애가 왜 굳이 모험가 생활을 하는 걸까.

원래 세계로 따지면 재벌 2세가 막노동을 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내 질문에 크림힐트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귀족으로 사는 건 나랑 안 맞거든. 사교계 같은 것도 재미없고.”

“넌 무슨 애가 그런 이유로 목숨까지 거냐…….”

“상위 모험가 중에서 나 같은 사람은 흔해.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모험을 하는 편이 마법 수련도 잘 되거든.”

그리 말하며 크림힐트는 대서고에서 찾은 마도서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뭐, 그녀의 목적이 훌륭한 마법사가 되는 거라면 확실히 저택보단 던전이 더 맞을 거다.

설정상 저명한 마법사들은 대부분 모험가 출신이기도 하니까.

“캬하아~! 귀족이라니, 오지네요! 이것들만 내다 팔면 커다란 저택에서 마님처럼 살 수 있다 이거죠?!”

나나는 벌써부터 귀족이 될 생각에 신난 듯했다.

하기야 호화로운 저택의 귀족 아가씨가 되는 건 모든 여자들이 바라는 일일 테니까.

“다키님! 저희도 이 기회에 신분 상승을 노려보죠! 다키님은 영주님, 저는 영주 부인이 되는 거예요!”

화려한 보석 목걸이를 목에 걸며 나나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일단 장원 공략 먼저 끝낸 다음에 생각해보자.”

장원 공략이 끝나면 중앙 도시에서 집이나 한 채 구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 자금이면 조금 더 스케일을 키워도 될 거 같다.

나나 말대로 아예 변경 땅을 사서 영주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팬티 한 장만 입은 영주님이라니~ 이건 엄청 유명해지겠는데~”

내 미래를 상상하기라도 한 건지 안티오페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나는 크림힐트를 가리키면서 반박했다.

“반쯤 헐벗은 변태도 귀족 아가씨인데 뭐가 문제예요!”

“그렇긴 하네~ 크림 쟤는 연회에서도 거의 벗고 다니니까 말이야. 그래서 남자들한테 인기 엄청 많았지~”

안티오페의 썰에 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설마하니 연회에서도 저런 차림으로 다닐 줄이야.

하긴, 밖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데 연회라고 해서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다.

애당초 이 세계는 노출이 대중화된 세계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수많은 남자들의 딸감이 되는 크림힐트를 상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보물 구경 다 끝났으면 다른 방 보러 가는 거 어때? 여기 있는 건 당장 쓸 수도 없잖아.”

자기 이야기가 나와서 불편한지 크림힐트는 냉담한 어투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에 나도 동의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보물은 나중에 챙기고 당장은 필요한 보급품부터 찾아보자.”

애당초 우리가 여기 들어온 이유는 포션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약품 저장고에는 상당한 양의 포션이 쌓여 있었다.

예상대로 서천에서 만든 것과 동급으로 훌륭한 성능을 갖추고 있었다.

수량도 넉넉하니 다음 공략을 위해 보충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팔수도 있으리라.

“히야아~! 이 정도면 포션 장사해도 되겠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아테나도 포션 마시면서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빼곡하게 쌓인 각양각색의 병들을 보며 안티오페와 나나가 쾌재를 불렀다.

보다 보니까 저 두 사람도 은근히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아테나한테 제대로 맞으면 포션 맞을 시간도 없을 거야. 너는 떨어뜨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뭐라구요?! 떨어뜨리긴 누가 떨어뜨려요?!”

나나의 말에 크림힐트가 냉정하게 지적했다.

나나는 그녀의 말이 여러모로 꼽겠지만 맞는 말이긴 하다.

게임 세계는 구시대적 MMORPG가 아니다.

포션을 마시면서 공격한다거나 하는 기예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도 포션이 많으면 든든한 건 사실이다.

없는 채로 싸우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들어서 싸울 때도 여유가 생긴다.

다시금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나와 다른 동료들은 포션을 되는 대로 챙겼다.

대부분 차원낭에 넣었지만 중요한 포션들은 언제라도 꺼내 쓸 수 있도록 포션 벨트에 넣어뒀다.

창고에서 볼 일을 마친 우리는 마침내 최상층으로 향했다.

창고 근처엔 위쪽까지 올라가는 리프트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아테나의 거처 앞까진 데려다주지 않았다.

리프트는 중간에 멈췄고 우리는 결국 계단을 올라야 했다.

“아니 무슨 놈의 리프트가 여신님 앞까지 데려다주지도 않아요?”

지나치게 높은 계단을 보며 나나가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의 말에 제이드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야. 보통 이런 건 높은 사람들 편하라고 설치해두는 거 아니야?”

그런 두 사람의 의문에 나는 씁쓸히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아테나가 쓰는 리프트는 따로 있거든. 거처 바로 앞에.”

“네? 그러면 처음부터 그거 써서 올라가면 됐던 거 아니에요?”

“그 리프트는 아래쪽에선 부를 수가 없거든. 1인용 리프트라 우리들이 다 타지도 못했을 거고.”

아테나 방 앞에 있는 리프트는 보스전 이후에 사용하는 숏컷이라 볼 수 있다.

말했듯이 한 명만 탈 수 있어서 파티 플레이를 할 때는 별로 의미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올라가자. 다들 체력 보존하면서 쉬엄쉬엄 걸어.”

“그래, 막상 전투할 때 힘 빠지면 큰일이니까.”

니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또한 지하 감옥의 계단처럼 나선형 구조였다.

빙빙 도는 계단 중앙에는 커다란 기둥이 있었는데 표면에 아테나의 업적을 기리는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테나 여신님은 굉장히 자비로운 신이었나 보네요…….”

조각들을 살펴보면서 유미가 감명 깊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멸망한 도시의 난민들을 받아주는 아테나라거나, 솔선수범하여 백성들을 돌보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성군이었다.

물론 아테나의 신전에 새겨진 조각이니 당연히 그녀를 찬양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겠지만, 실제로도 아테나는 선신 중의 선신이라 평가 받는다.

당장 그녀의 아버지가 수많은 여자들을 겁탈하고 수 천, 수 만 명의 병사들을 화살받이로 쓴 걸 생각하면 얼마나 착한 신인지 알 수 있다.

단지 그녀 또한 신이다 보니까 자화자찬 하는 걸 좋아할 뿐이다.

“그럼 뭐해. 지금은 그냥 미쳐 날뛰는 괴물일 뿐인데. 아저씨도 아테나 때문에 저렇게 됐다고…….”

유미의 말에 제이드가 음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마지막 대면을 통해 어느 정도 털고 일어난 듯 했지만 완전히 극복하진 못한 모양이다.

알버트의 죽음은 제이드의 가슴 속 깊이 새겨졌다.

니아 또한 마찬가지겠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으니 아테나가 원망스러울 만도 하다.

“그런 말 마, 제이드…… 여신님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잖아. 위험한 걸 알면서 들어온 건 우리 아빠고.”

제이드에 비해 니아는 이성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다.

세트가 공격해오지 않았다면 아테나가 재앙신이 되는 일도, 아테르니아가 던전화되는 일도 없었을 거다.

그렇다고 세트가 무조건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가 지배하는 사막은 나날이 황폐화 되고 있다.

오아시스는 언제 말라 버릴지 모르고 가축들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이전 대의 파라오들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땅의 수명을 늘려오긴 했으나 그마저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노릇이다.

그렇기에 세트는 아테르니아를 침공했다.

사리사욕 때문이 아닌 자신과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던전화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솔레이온을 암살하여 신들을 풀어놓은 레게메톤이 근본적인 원흉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래 니아,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이런 일을 저질렀는데도 아무런 죄책감도 안 느낀다면 그땐 못 참을 거 같다.”

활대를 움켜쥐면서 제이드가 화를 가라앉혔다.

친딸도 가만히 있는데 자기가 왈가왈부할 수 없어서 그런 듯했다.

제이드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아테나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리는 없다.

아마 장원이 던전화해서 가장 괴로운 건 아테나일 거다.

자기가 애써 키워온 도시와 백성들을 자기 손으로 멸망시켰는데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이성 없는 괴물이 된 지금까지도 매일을 고통스럽게 보내겠지.

============================ 작품 후기 ============================

어제는 말없이 안 올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시간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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