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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204화 (20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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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익의 조언자

아버지의 모습을 본 니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제이드는 이를 악물면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두 사람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차마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메이스를 지지대 삼아 무릎 꿇고 있는 알버트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해보였다.

잠깐 잠에 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넬 것만 같았다.

허나 누누이 말했듯이 그런 감동적인 재회는 없을 거다.

높은 벽의 기사는 단지 인식 범위가 좁을 뿐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다가갔다간 즉시 우리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공격해올 것이다.

우리들 중 자신의 딸이 섞여 있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겠지.

그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장원의 괴물이니까.

“누나, 괜찮아?”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니아에게 물었다.

여차하면 그녀는 후미로 보낼 생각이다.

탱커가 빠지면 그만큼 불안정해지겠지만 동요하는 니아를 전투에 참가시키는 것보다야 낫다.

“응…… 괜찮아, 걱정 하지 마…….”

내 물음에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울한 목소리는 배려 따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허나 아무리 각오를 다진다 해도 니아의 목소리에는 불안정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꾸국, 꾸우욱…….]

그런 그녀의 곁에서 엘레나가 서글픈 울음소리를 냈다.

변해버린 주인의 모습을 보고 그녀도 슬픔에 잠긴 것이리라.

니아는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면서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엘레나……. 이제 곧 아빠를 구해줄 테니까. 우리가 같이 아빠를 편하게 해드리자.”

그리 말하며 니아는 엘레나의 위에 올라탔다.

엘레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는 듯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나와 다른 일행들도 그녀들을 따랐다.

몇 발자국인가 앞으로 다가간 순간이었다.

“엘레…… 나…….”

“……!!”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니아의 이름을 불렀다.

“설마…… 의식이 있으신 거야……?”

그 말을 듣고 제이드의 얼굴에 일말의 희망이 피어났다.

니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내가 누군지 알겠어?”

“엘레…… 나…….”

“그래 나야! 아빠 딸 엘레나라구!”

한껏 젖어든 목소리로 말하는 니아.

그녀는 당장이라도 엘레나의 등에서 내려 아버지에게 달려갈 것 같았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나, 그러지 마.”

“다키야 하지만……!”

“저건 이미 누나네 아버지가 아니야……. 장원의 영향을 받고도 정신이 멀쩡할 리 없다고.”

사실을 전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악질적인 연출이다.

알버트의 스토리는 원작 게임에서도 제작진의 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스토리였다.

그런데 게임 세계는 그보다 더했다.

니아의 아버지는 정신을 차린 게 아니다.

자기 딸을 알아보기는커녕 자신이 누군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니아의 중간 이름을 부른 이유는 단순히 애절함을 느끼게 만들기 위한 연출인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분명 내 이름을 말했다고! 아직 이성이 남아있는 걸 거야! 같이 장원 밖으로 나가면 뭔가 해답이……!!”

니아가 울먹거리며 내 말에 반박할 때였다.

“엘레나…… 엘레나……! 엘레나아아아아악!!”

콰앙! 쾅!!

콰가아아앙!!

알버트가 갑작스레 바닥을 미친 듯이 내려쳤다.

그가 메이스를 휘두를 때마다 지면에 방사형 균열이 생겨났다.

충격이 어찌나 강한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도 균형을 잃어버릴 뻔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저 메이스에 정통으로 맞으면 뼈도 못 추릴 거다.

실제 공격력도 맹금보다 아주 근소하게 낮고 말이다.

그 무시무시한 메이스가 우리를 때려죽이고자 그르렁거렸다.

방패와 둔기를 들어 올린 알버트는 이내 광기어린 투지를 드러내며 우리와 대치했다.

“아, 빠…….”

그런 아버지를 본 니아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결의에 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각오를 해도 소중한 사람이 저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담담할 수 있을까.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조차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들 잘 들어! 저건 더 이상 니아 누나네 아버지가 아니야! 진짜 알버트 씨는 저 저주 받은 몸 안에 갇혀 있는 거라고!”

명줄 절단을 들어 올리며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며 나는 확실하게 못을 박아뒀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공격해! 저 괴물을 죽여야 알버트 씨를 구해드릴 수 있어!”

내 말에 일행들도 무기를 움켜쥐었다.

이로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리던 니아 역시 엘레나의 갈기를 움켜쥐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아아아아아아악!!”

타아아아앗!

우리의 적의를 보고 자극받은 알버트가 지면을 박찼다.

온몸에 돋아난 날개가 더욱 커지면서 그의 몸이 수십 미터 위로 비상했다.

엄청난 도약력을 선보인 그는 창졸간에 낙하하여 나를 내려찍었다.

콰가아아아앙!!

“크흐으으윽?!”

그 무지막지한 공격을 방어 패링으로 대응했다.

꽤나 정직한 패턴이어서 막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공격을 막아냈음에도 둔기가 전해준 충격이 온몸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패링에 성공한 순간 나와 알버트를 중심으로 강렬한 충격파가 발생했고 지면이 움푹 파였다.

패링에 실패했다면 그대로 온몸의 뼈가 박살났을 것이다.

“대장!!”

그 모습을 본 안티오페가 나를 향해 냅다 달려왔다.

민첩하게 가세한 그녀는 번개가 휘감긴 도끼를 큰 횡으로 휘둘렀다.

“미안, 아저씨! 빨리 끝내줄게!!”

알버트에게 경의를 보이며 공격한 안티오페.

허나 알버트는 쉽사리 당해주지 않았다.

전력으로 휘두른 도끼를 대형 방패로 막아낸 것이었다.

카아앙!

카가가가각!!

방패와 도끼날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안티오페의 공격도 알버트 못지않았으나 방패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이런 미친……! 뭐 이리 단단해?!”

차원이 다른 견고함에 안티오페는 경악을 터뜨렸다.

그러는 사이 알버트의 몸에서 돋아난 날개가 그녀를 향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깃털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변해서 안티오페를 공격한 것이었다.

“꺄아악!”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안티오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마음 같아선 내가 막아주고 싶었으나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안티오페를 상대하는 도중에도 알버트는 내게 계속해서 둔기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심해 안티오페! 날개 하나하나가 전부 무기야! 치고 빠지는 식으로 안 싸우면 위험해!”

“크흐윽! 성가시네, 진짜!”

내 말을 참고한 안티오페는 공격과 회피를 병행하며 거리를 벌렸다.

한 차례 부상당한 그녀를 나나가 치료해줬고 후방에 있던 멤버들이 우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쐐애액!

파바바바박!!

알버트가 공격을 시작한 후부터 줄곧 그의 몸에는 번개 화살이 박혔다.

거기에 더해 크림힐트의 냉기가 그를 얼리려 했고 유미의 원령들이 몇 마리나 몸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온갖 수단을 사용해도 알버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냉기가 닿은 부위는 조금도 얼어붙지 않았고 원령들조차 그를 묶어둘 수 없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요새처럼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왜 얼어붙지 않는 거야……?”

“원령들도 전혀 안 통해요……! 막을 수가 없어요!”

상식을 뛰어넘는 방어력과 인내력에 일행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성벽의 기사가 무서운 이유는 저 무지막지한 인내력에 있다.

사실상 신전 밖의 석상들이 축소된 버전이나 다름없다.

어디 그뿐이랴, 방어력과 가드 게이지도 엄청 높고, 상태이상 저항까지 달고 있다.

평범한 방법으론 그를 저지할 수 없다.

동결도 홀딩도 안 통하는 요지부동의 괴물인 것이다.

“당황하지 마! 상태이상은 안 먹혀도 피해는 그대로 들어 가! 원딜들은 거리 벌리면서 계속 딜링하면 돼!”

카가아아앙!!

공격을 튕겨내며 일행들에게 지시했다.

나도 틈이 날 때마다 스킬을 써서 공격을 가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거의 보스급의 생명력을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명도참이나 비수 차지 같은 공격을 날리면 그나마 큰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언제 끊길지 모르는 연속 공격 때문에 막고 피하기도 급급했다.

“니아! 정신 차리고 얼른 와서 탱킹해! 네가 멀뚱히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고!”

머뭇거리는 니아에게 안티오페가 소리쳤다.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니아는 엘레나의 갈기를 잡아당겼다.

“미안……! 가자 엘레나!”

[키하아아앗!!]

울음을 삼키며 니아가 무기를 들어올렸다.

엘레나도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힘차게 포효하면서 알버트를 향해 달려왔다.

“다들 피해! 이대로 들이받을 거야!”

순식간에 육박해온 엘레나가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소닉붐에 범접한 충격이 일어났고 한순간 공간이 일그러졌다.

콰아아아앙!!

“크오오오옷!!”

말보다 큰 엘레나가 들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굳세게 버텼다.

대리석 바닥이 박살나고 갑옷이 찌그러졌으나 알버트 본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것이었다.

[키하아아앗!!]

이후 상반신을 들어 올린 엘레나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알버트를 할퀴었다.

그제야 알버트는 거의 처음으로 움찔거렸다.

카가가가각!!

“크하아아아아악!!”

물론 한 번의 공격만으론 전투의 판도를 바꾸지 못했다.

엘레나의 접근에 알버트는 더욱더 날뛰며 둔기를 휘둘러댔다.

온몸에 달린 날개를 이용하여 이리저리 날아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콰앙! 콰아앙!

콰가아아앙!

종횡무진 이동하며 바닥을 내리치는 알버트.

그가 한 번 둔기를 휘두를 때마다 새로운 크레이터들이 생겨나고 지축이 흔들렸다.

니아와 엘레나는 그런 알버트를 일일이 쫓아가며 다른 이들을 보호했다.

“모두 물러서! 도발이 먹히지 않아! 한 곳에 멀뚱히 있다간 공격당할…… 크흐읏?!”

“아아아아아악!!”

콰과아아앙!!

엘레나와 함께 알버트를 추적하자 그의 메이스가 니아의 방패를 강타했다.

몇 번이나 알버트의 공격을 막아낸 방패는 눈에 띄게 찌그러져 있었다.

방어 패링을 사용하지 않으면 브릴린트가 만들어준 방패로도 버티기 힘들다.

성벽의 기사는 매 공격마다 방어력과 내구도를 감소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격에 엇박자와 반박자가 섞여 있어서 니아로선 패링하기 힘들 것이다.

“아빠……! 이제 그만해!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 없다고!”

“크오오오오오오!!”

부서져 가는 방패로 알버트를 밀어내며 니아가 힘겹게 소리쳤다.

물론 알버트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연이어 공격을 가했다.

니아에게 돌아온 것이라곤 매섭게 날아온 메이스와 날카로운 깃털뿐이었다.

지금의 알버트에겐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거다.

허나 니아는 저 타락한 몸속에서 아버지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자신이 진심을 담아 호소하면 아버지가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다.

“돌아온다고 약속했으면서……! 돌아오면 엄마랑 같이 놀러가자고 했으면서 이게 무슨 꼴이냐고!!”

“크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아악!!”

“아빠가 이런 모습으로 괴로워하는 거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카가아아앙!!

거의 울부짖듯이 소리치면서 니아가 메이스를 휘둘렀다.

당연하게도 알버트는 그 공격을 방패로 막아냈다.

“엘레나아아아아악!!”

퍼허어어억!!

“아흐윽……!!”

그 후 곧바로 반격을 날린 알버트.

그의 묵직한 메이스가 니아의 어깨를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엘레나가 고통어린 신음을 터뜨렸다.

“니아 누나!!”

“니아!!”

이를 본 우리들은 일제히 니아를 부르며 알버트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명도참을 날리며 알버트를 견제했고, 제이드는 계속해서 화살을 퍼부어 피해를 누적했다.

허나 알버트도 쉽사리 당해주지 않았다.

명도참은 허공으로 비상하여 피해냈고 제이드의 화살은 방패로 막아냈다.

우리의 공격을 상쇄해낸 후엔 한 차례 기를 모아 거대한 충격파를 날렸다.

“아아아아아악!!”

콰가가가가각!!

“……!!”

메이스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는 빛나는 구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제이드를 향해 날아갔고 제이드는 그대로 공격에 노출되고 말았다.

“이런 젠장할……!”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애초에 범위가 너무 넓어서 피해도 맞을 거다.

제이드도 이를 깨달았는지 양팔을 교차하여 얼굴을 막았다.

물론 그 정도로 충격을 줄이긴 힘들 거다.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공격을 버텨내려 할 때였다.

“물의 정령이여!”

“하아앗!!”

카시아의 외침과 동시에 제이드의 앞에서 맑은 물이 솟아났다.

직후 크림힐트가 빙하 주문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의 앞에는 거대한 얼음 바리케이트가 형성되었다.

콰차아아앙!!

“으아아아악?!”

“크흐읏……!!”

얼음 방벽과 충격파가 충돌하자 수많은 파편들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뒤에 있던 크림힐트와 제이드 역시 충격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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