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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익의 조언자
“아무렴 어때. 당장 고민하고 있다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우리는 다른 목적도 있고.”
고민하는 우리들을 보며 시원스레 말하는 안티오페.
그 말을 듣고 나와 일행들도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맞아…… 천좌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 후 니아는 천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니아의 아버지는 이성 잃은 괴물이 된 채 상층을 배회하고 있을 거다.
딸인 니아에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슬픈 일이다.
그녀로선 한 시라도 빨리 아버지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을 거다.
니아의 아버지도 문제지만 이상 사태 또한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 중이다.
정황상 장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들도 발키리 혹은 천좌와 관련 있을 것 같지만 사태의 근원인 아테나를 처리하면 당장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좋아, 그럼 슬슬 위쪽으로 올라가자. 그 여자가 한 말은 천천히 생각해보고.”
“응…….”
“그래, 얼른 가자고. 그 새대가리 때문에 너무 지체했어.”
내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니아와 제이드.
이제 곧 아버지와 만나게 돼서 그런지 이전보다 훨씬 안색이 어두웠다.
부디 누나네 아버지한테는 별 다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 *
대서고 중앙으로 돌아온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리프트를 탔다.
리프트는 쉽게 말해서 엘리베이터 같은 건데, 바닥에 있는 스위치를 밟으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구조물이다.
“와아…… 저 리프트 처음 타 봐요. 엄청 신기해요…….”
“건축 비용이 엄청나니까 웬만해선 보기 힘들지.”
신기해하는 유미를 보며 카시아가 나긋나긋한 미소로 이야기했다.
원래 세계의 엘리베이터도 싸지는 않겠지만 가디스 던전의 리프트는 그보다 더한 모양이다.
듣기론 노르니르 클랜의 본진에도 설치된 곳이 몇 곳 없다고 한다.
건축 비용은 둘째 치고 제작 기술을 완벽히 터득한 장인이 몇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구경은 나중에 하고 일단 다들 올라 타. 다 타기 전에 중앙에 있는 스위치 밟지 말고.”
동료들이 전부 탑승하도록 한 뒤 나는 바닥의 발판을 밟았다.
그러자 리프트가 안정적인 소리를 내며 위층을 향해 올라갔다.
위이이이잉.
“10년 동안 방치됐는데 잘만 움직이는구만…….”
“이래서 비싼 거구나……. 리프트 굉장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리프트를 보며 제이드와 유미가 감탄했다.
허나 그러한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머지않아 긴장한 기색이 감돌았다.
“으으…… 저 위엔 또 어떤 지랄 맞은 괴물들이 있을까요.”
“이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걸…….”
질색하듯 말하는 나나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크림힐트.
그녀들의 말이 일행 모두에게 경각심을 심어줬다.
리프트가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장원의 상층도 가까워진다.
비단 니아 누나네 아버지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장원의 몬스터들은 하나 같이 역겹지만 상층은 그러한 놈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다.
신전 밖에선 간혹 출현했던 맹금의 기사도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런 생지옥에 들어가는데 마음이 가벼울 리는 없겠지.
일행들이 심란한 마음으로 천장을 올려다볼 때, 나는 리프트 입구 쪽으로 바싹 달라붙었다.
“응? 뭐하는 거야 대장? 거기 뭐 있어?”
내 행동을 보고 안티오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나 뭐 좀 찾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
“기다리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니아까지 의아해하던 그때, 입구 쪽에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리프트를 이용해야만 진입할 수 있는 비밀 통로였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냅다 굴렀고 일행들은 그런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헤엑?! 다키님!”
“자, 잠깐! 다키 너 어디 가?!”
당황하는 일행들을 뒤로 하고 나는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리프트는 마치 새장처럼 쇠창살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도 동료들도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에게 나는 태연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금방 끝나! 다들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말할 무렵 리프트가 뚝 멈춰 섰다.
내가 비밀 통로를 이용함으로써 작동이 일시적으로 멈춘 것이었다.
저 안은 안전하니 그들도 얌전히 기다릴 수 있으리라.
맹금 때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내가 찾으려는 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찾는 데에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으리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와야 돼!”
“맞아요, 다키님! 다키님 없으면 무섭다구요!”
걱정스러워하는 일행들에게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어준 뒤 나는 본격적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내가 뛰어내린 곳은 대서고 벽을 따라 늘어진 책장 위였다.
다른 곳과 달리 조금 튀어나온 부분이 통로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책장 위를 따라 쭉 걷다 보니 벽 한 가운데에서 어둡고 음침한 복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랜턴을 꺼내들어 앞을 밝힌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분위기 한 번 으스스하네.”
정상적인 방법으론 올 수 없는 층.
그래서인지 이곳은 유독 버려진 티가 났다.
장원이 던전화 되기 훨씬 전에 발길이 끊긴 것이었다.
몇 갈래로 나누어진 복도를 나아간 나는 마침내 찾던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문에는 웬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사슬과 자물쇠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저 사슬은 물리적인 공격으론 끊어지지 않는다.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우연히 여길 발견해도 돌아가는데 급급하지 숨겨진 물건들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허나 나는 문을 열기 위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열려라.”
키이이이잉……!
촤라랑!!
문 앞에 다가선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테나의 눈을 꺼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을 가져가자 사슬이 공명을 일으키듯 흔들렸다.
몇 번이나 요동친 사슬은 끝내 빛이 되어 사라졌고 문을 막고 있던 봉인 또한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원 들어가려면 이건 꼭 챙겨 가야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문을 열자 웬 제단 같은 게 보였다.
무언가를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라기 보단 봉인해두기 위한 제단이었다.
곳곳에는 아테나를 상징하는 올빼미 모양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5개의 조각상이 오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모든 조각상들은 검은색 뱀을 발톱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조각상의 생김새 하나하나가 전부 봉인을 위한 의식이었다.
소름끼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 위에는 웬 가죽이 올라가 있었다.
윤기 나는 검은색 뱀 가죽.
그것은 방금 막 벗겨낸 듯 생생했으며 만져보니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조금씩 꿈틀거렸다.
나는 그것을 왼손으로 꽈악 움켜쥐었고 직후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봉인되어 있는 마신의 유해를 손에 넣었다.]
[추악공 보티스의 마신화 스킬을 습득했다.]
푸른색 빛과 함께 뱀 가죽이 내 왼손에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몸 안에서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헤카테가 마신화 스킬을 개방해 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검은색 뱀 가죽의 주인은 다름 아닌 마신이었다.
그 이름은 추악공 보티스.
이름처럼 추악한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상위 마신이라곤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신들의 수는 무려 72명이나 되지만 게임의 분량은 한정되어 있다.
제한된 개발 기간과 개발 인력으로 72명의 마신을 전부 보스 몬스터로 등장시키는 건 무리였을 거다.
그러한 문제로 마신들 중 보스로 등장하는 개체는 손에 꼽는다.
재앙신들도 만들기도 빠듯한데 마신들까지 하나하나 다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마신들은 이렇게 유해의 형태로 등장한다.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 처치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추악공 보티스도 그러한 마신들 중 하나다.
아이템 설명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따르면 그는 과거 아테나와 모종의 이유로 싸우게 됐다고 한다.
상위 마신답게 강력한 권능을 휘둘렀던 보티스지만 승리를 거머쥔 건 아테나였다.
그를 처치한 아테나는 이후 보티스의 가죽을 벗겨 이 제단에 봉인했다고 한다.
뭐, 그런 자잘한 스토리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건 이놈의 마신화 스킬이 비행형 적들과 싸울 때 굉장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칠흑의 뱀
패시브
요구 스탯: 없음
비용: 없음
사용 조건: 지배자의 자격 습득
습득 방법: 마신화 스킬 해금 시 보티스의 유해 획득
효과: 흑사의 마신, 보티스의 힘을 왼팔에 두른다. 그 후 왼팔에서 검은색 뱀을 소환하여 목표물을 끌어당긴다. 뱀은 시전자를 끌어당겨 목표 지점까지 빠르게 이동시킬 수도 있다. 뱀은 최대 30미터까지 늘어나며 넉백 내성이 있는 적은 끌어당길 수 없다.
칠흑의 뱀은 다른 게임의 로프 액션과 유사한 스킬이다.
먼저 배운 스킬들처럼 강력한 효과는 아니지만 입체 기동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쓸 일이 아주 많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넉백 내성이 있는 적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적을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풀링형 스킬들은 대상의 인내력이 높으면 스킬이 아예 먹히질 않는다.
아까 잡았던 맹금처럼 인내력이 높은 적들을 상대론 무용지물인 것이다.
허나 칠흑의 뱀은 그러한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다.
넉백에 완전히 내성을 가진 적들은 아라크네 같은 대형 몬스터를 제외하면 별로 없으니 말이다.
설령 끌고 오지 못한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방해할 수 있어서 다른 풀링 스킬처럼 쓸모없어지진 않는다.
더군다나 마력은커녕 마신화 게이지도 소모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개꿀이 아닐 수 없다.
이거면 상층의 비행형 몬스터들을 보다 쉽게 잡을 수 있겠지.
비수가 있기는 하지만 한 번 날릴 때마다 마신화 게이지를 1씩 잡아먹어서 그것만으론 떼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에게 대응하기 힘들다.
반면 칠흑의 뱀은 이렇게나 사기적인 성능인데 아무런 자원도 안 잡아먹으니까 훨씬 더 유용하다.
새삼 마신화 스킬의 사기성을 느끼면서 방을 나섰다.
조금 전까지 발키리가 한 말 때문에 여러모로 심란했지만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RPG 플레이하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내 캐릭터가 보다 강해졌을 때니까 말이다.
다시금 어둡고 먼지 쌓인 복도로 나온 나는 위쪽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 역시 무척이나 어두컴컴한 게 발도 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계단을 오르자 금세 빛을 볼 수 있었다.
창가로부터 쏟아지는 햇빛이 위쪽 계단을 환하게 비춘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본격적으로 상층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돔 형태로 이루어진 투명한 천장과 넓고 높은 공간.
곳곳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고 특이하게 생긴 나무들도 많이 심어져 있었다.
마치 식물원에 온 것 같은 광경 속에선 바깥처럼 다양한 곤충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아테나의 공중 정원이다.
장원이 던전화하기 전엔 중요한 약재를 재배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비행형 몬스터들의 소굴일 뿐이다.
이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무시무시한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빠르게 동료들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리프트는 얌전히 멈춰 있었다.
상층 입구에 놓인 레버를 잡아당기자 멈춰 있던 리프트가 다시금 위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키니이임!”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나나가 내게 안겨왔다.
고작 몇 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내가 엄청 그리웠나 보다.
아니면 맹금한테 당할 뻔했던 일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 그래. 나 왔어.”
어리광 부리는 나나를 쓰다듬을 때쯤 다른 이들도 하나둘 씩 리프트 안에서 나오며 불만을 토로했다.
“갑자기 뭐야! 뛰어내리는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너 인마…… 떨어지려면 미리 얘기라도 좀 해두라고.”
“미안해, 나도 갑자기 생각난 거여서 미리 말을 못 했어.”
니아와 제이드의 힐책에 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그런 날 보며 유미가 안도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스승님이 안 계신 동안 너무 불안했어요…… 빨리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으잉?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못미더웠단 거예요?”
“네? 네?! 아,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내게 꼬옥 안긴 채 나나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보나 장난치는 거였으나 순진한 유미는 그대로 걸려들어선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자기도 엄청 불안해했으면서 유미를 놀리는 꼴이라니.
뒤늦게 자기가 무서워한 걸 숨기려는 거겠지.
나나도 유미도 참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들 상태 점검해. 제이드 형이랑 카시아 누나는 화살 잘 챙기고.”
내 말에 제이드, 카시아는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화살을 들어보였다.
“걱정 마, 썬더 드레이크로 만든 화살인데 어떻게 잘 안 챙기겠어?”
“한 발도 허투로 쓰지 않을게.”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화살은 썬더 드레이크의 이빨로 만든 것이었다.
내가 장원에 오기 전에 모아둔 그것 말이다.
여기서 쓰려고 그동안 아껴왔다.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새 인간이나 인면조 같은 잡몹들에게 쓰긴 아까웠던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우리는 천천히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정원은 거의 숲이나 다름없었다.
본래 이곳의 식물들은 각자 구역을 나눈 채 가지런히 재배되었겠지만 10년이나 방치돼서 그런지 길과 재배지의 경계가 사라졌다.
대리석으로 포장된 바닥에는 수풀이 무성했고 나무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복도와 기둥은 물론 종종 보이는 건물에서도 갖가지 식물들이 영역 싸움이라도 하듯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얼핏 보면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기괴한 광경이다.
그렇게 숲과 폐허로 이루어진 층에서 촉각을 곤두세우며 나아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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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된 내용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밸런스랑 개연성 부분은 최대한 맞춰보도록 하겠습니다. 총기와 적에 관한 설정을 고칠 수 없었던 만큼 적들이 불합리할 정도로 강하게 등장하지는 않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