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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익의 조언자
한 차례 일행들을 살핀 후, 나는 칼자루를 움켜쥔 채 여성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에 생성된 보호막은 저 총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리라.
그녀의 발밑에 떨어진 탄피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저 총이 무조건 방어를 위한 장비라곤 장담할 수 없다.
보호막을 만드는 건 스킬이나 탄환의 효과고 공격 기능 또한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천천히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긴장한 채로 한 걸음씩 다가갔는데, 다행히 그녀는 내가 접근해도 총구를 겨누지 않았다.
원활한 대화가 가능해질 때쯤 여성에게 질문을 건넸다.
“여기 오기 전에 당신이 싸운 흔적을 봤어요.”
“…….”
“그러니 거두절미하고 물어볼게요. 지하 감옥에서 천둥새를 풀어준 게 당신인가요?”
내 물음에 여성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돌발 상황을 대비해서 이 이상 다가가진 않았다.
덕분에 언제든 여성의 행동에 대처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내가 손에 땀을 쥐며 여성의 대답을 기다릴 때.
여성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이 정도의 인원으로 저런 적한테 우왕좌왕하다니…… 정말 형편없군.”
“네?”
나와 일행들을 스윽 훑어본 그녀는 난데없이 힐난을 퍼부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물론 우리가 우왕좌왕하긴 했지만 초면부터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애초에 저쪽은 우리 사정도 잘 모르지 않는가.
당황은 점점 황당한 기분으로 바뀌었고 이는 동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뭐야?! 야! 너 지금 말 다 했어?!”
여성의 말에 발끈한 안티오페가 언성을 높였다.
크림힐트도 썩 기분 좋지는 않은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여성을 노려보았다.
“잠깐 돌발 상황이 벌어졌을 뿐이야. 다른 일행들은 저런 놈이 있는지도 몰랐고. 애초에 당신은 뭐가 그리 잘 났다고 초면부터 우릴 평가하는 건데?”
“맞아! 도와준 건 고맙지만 네가 잡은 것도 아니잖아?!”
크림힐트와 안티오페의 반박에 나와 일행들은 내심 환호했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갑작스러운 멸시에 기분이 꽤나 상했다.
그러나 총잡이 여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를 이어갔다.
“휴식을 취하려면 근처에 적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기본 아닌가? 왜 샅샅이 뒤져보지도 않고 저런 놈이 없다는 걸 확신한 거지?”
“그, 그거야…… 대장이 여긴 안전하다고 해서……”
날카로운 지적에 안티오페의 기세도 꺾이고 말았다.
그녀는 도움을 요청하듯이 반사적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총잡이 여성은 날선 어투로 안티오페와 크림힐트를 몰아붙였다.
“애당초 저 괴물은 너희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찾아왔어. 부주의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놈이 여기까지 기어 나오는 일도 없었겠지.”
“으읏…….”
여성의 시선이 크림힐트에게 향한다.
그녀는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럴 만도 하다.
맹금이 누군가의 소음에 반응했다면 그건 분명 나와 크림힐트가 노닥거리는 소리였을 테니까.
여성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나 역시 내심 부끄러워졌다.
“아잇! 도와줘서 잠자코 있었더니 진짜 꼴받게 하네! 누구시길래 우리한테 설교질이에요?! 그거나 먼저 밝히시죠?!”
거의 훈계에 가까운 설교가 이어지자 참다못한 나나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총잡이 여성의 말 중에서 틀린 부분은 없었다.
나도, 일행들도 내 지식을 지나치게 맹신하고 있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게임 세계의 변수를 경험했는데 원작에선 안 그랬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안도해왔다.
이곳은 게임 세계지만 원작 게임과는 다르다.
가디스 던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인 건 거의 확실하나 완전히 같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게임에선 안 그랬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생각은 너무나 위험하다.
어렸을 적에 키웠던 강아지를 떠올리며 사나운 맹견을 쓰다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다.
그 지식이 아예 먹히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먹힌다는 보장도 없는 모험인 거다.
“내 정체 같은 건 몰라도 돼. 다만 적이 아니라는 건 말해두지.”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무렵 여성이 무뚝뚝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유미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러면 아군이란 건가요……?”
“정확히는 경고하러 온 사람이지.”
“경고? 뭘 말이야?”
제이드까지 질문하자 여성은 이쪽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았는데, 투명한 병 안에 연보라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게 뭐죠?”
포션을 한 차례 흔들며 총잡이 여성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번에도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은신 감지 포션.”
“은신 감지……?”
“그래, 조만간 필요해질 거야.”
두서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은신 감지 포션이라니.
확실히 이 포션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은신 감지 포션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물론 말만 저렇게 하고 이상한 걸 줬을 수도 있으니 냉큼 마실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왜 갑자기 이런 걸 건네줬냐는 것이다.
“이걸로 저희 보고 어쩌란 거예요?”
포션을 내려다보길 잠시, 나는 의아한 마음을 담아 여성을 직시했다.
후드 너머엔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지만 뚫어져라 쳐다보니 여성의 입모양 정도는 볼 수 있었다.
이 와중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겁나 예뻤다.
“감다키, 넌 지금 노려지고 있어.”
“노려진다고요? 내가요?”
“그래, 천좌라는 놈들이 널 붙잡고 싶어서 안달이야. 가까운 시일 내에 네 앞에 나타날 거라고 봐.”
천좌? 날 붙잡고 싶어 한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그보다 이 여자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절 아세요?”
의구심에 사로잡힌 채 여성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미 나나와 만난 나였기에 총잡이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나나와 같은 내 시청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감다키란 이름을 바로 알고 있는 것도 설명이 된다.
갑자기 나타나서 날 도와준 것도 말이다.
하지만 여성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등을 돌리면서 자기 할 말만 할 뿐이었다.
“이 장원 안에도 한 놈 있어. 언제라도 너희를 노릴 수 있으니까 조심해. 방심했다간 죽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여성이 공중에 떠올랐다.
판초 안에 감춰져 있던 하얀색 날개가 힘차게 펄럭인 것이었다.
“……?!”
“나, 날개……?”
그 광경을 본 일행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성은 몇 번인가 날갯짓을 하더니 창문 쪽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여성은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계속 의심하고 경계해. 소울류는 그렇게 플레이하는 거야.”
“……? ……!!”
여성의 조언을 듣고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이 말,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이전에 만난 누군가에게 들었다.
아싸인 내게 다른 사람과 대화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특히나 나에게 소울라이크에 관련해서 조언을 해줄 사람은 더더욱 없다.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한 사람을 특정할 수 있었다.
“자, 잠깐! 기다려! 당신 설마……!”
다급히 총잡이를 불러 세우려 한 나였지만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날아갔다.
어느덧 대서고 안에선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새하얀 깃털 몇 장만이 허공에서 흩날릴 뿐이었다.
“가버렸다…….”
“대체 뭐하는 여자야……?”
손 쓸 틈도 없이 사라진 여성을 떠올리며 일행들은 다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덕분에 누구도 다치지 않았지만 자기 할 말만 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다니.
일행 입장에선 황당하면서도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리라.
“날개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그분도 장원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요……? 먼저 온 모험가인데 저희도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끔 도와준 거라던지…….”
문득 유미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크림힐트 쪽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닐 거야. 날개 가진 아인이 꼭 장원 안에만 있는 건 아니거든.”
“나도 들어본 적 있어. 북부에는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익인 종족이 있다던데…… 이름이 발키르였던가?”
크림힐트의 이야기를 듣고 제이드 또한 기억을 더듬었다.
크림힐트는 그의 이야기를 교정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정확히는 발키리야. 북부의 토착 종족이고 대부분이 여신 프레이야의 권속으로 들어가 있어.”
“그러면 그 후드 쓴 아가씨도 북부 출신이라는 거냐?”
“아마 그렇겠지. 무엇보다 그 여자가 쓰는 무기도 북부에서 만들어진 거거든.”
막힘없이 이야기하는 크림힐트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무기가 북부에서 만들어진 건 어떻게 안 거야?”
“크림네 언니가 여기저기서 이상한 걸 많이 모으거든. 그래서 크림도 그런 거 잘 알아.”
내 질문에 대답한 건 안티오페였다.
크림힐트도 그녀의 말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사용한 무기는 틀림없이 마도 병기일 거야.”
“마도 병기?”
“중앙 사람들한테는 좀 낯설 수도 있겠네. 쉽게 말해서 마도공학으로 만들어진 병기야.”
크림힐트가 설명하길, 북부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마법의 발달이 더뎠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 마법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법에 뛰어난 신들이 지배신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반면 북부는 펜리르를 비롯한 여러 괴물들이 패권을 잡은 지역이다.
그녀들 또한 강력한 존재고 신족의 일원이긴 하지만 마법에 관한 지식은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의 지배를 받은 북부도 마법 발달이 저조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북부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마도 기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마도공학이고 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마도 병기라 지칭한다.
“마도 병기는 북부 이외의 지역에선 거의 생산되고 있지 않아. 게다가 보호막을 전개할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이라면 북부에서 만든 게 확실해.”
보호막이 생성됐던 장소를 살피며 자신 있게 말하는 크림힐트.
그곳은 여전히 보호막의 잔재가 남아 푸른색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크림힐트의 얘기에 나는 적잖게 놀랐다.
마도공학이나 마도 병기니 내게는 전부 새로운 이야기다.
애당초 북부는 원작 게임에서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건 이 총이 DLC의 산물이라는 뜻이리라.
‘적어도 비인가 프로그램으로 만든 무기는 아니란 건가…….’
처음 총기를 봤을 때 온갖 추측을 다 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비인가 프로그램, 소위 핵이라 부르는 해킹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이었다.
흔하진 않았지만 내가 가디스 던전을 한창 플레이할 때도 비슷한 게 나오긴 했다.
그건 핵이라기 보단 총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드였지만 말이다.
석궁에 사운드랑 스킨을 입혀서 총을 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곤 했지.
크림힐트의 설명대로라면 정체불명의 총잡이 여성, 아니, 발키리의 총기는 어찌되었든 가디스 던전 본연의 아이템이 맞는 듯하다.
새삼 DLC의 규모가 어지간히도 컸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신규 지역에 신규 종족, 거기에 신규 무기까지 나오다니.
본편도 제대로 출시 못한 제노 소프트가 이런 대규모 DLC를 출시할 수 있었을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이번에는 크림힐트가 내게 질문을 건넸다.
“그나저나 그 발키리, 당신을 아는 눈치던데 둘이 무슨 관계야?”
“아…… 그건…….”
크림힐트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하다.
발키리가 나한테 했던 말을 똑같이 해줬던 사람이다.
하지만 발키리란 종족이 DLC의 일부라면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 사람, 아니 그 분은 내가 2년차에 접어들 쯤에 가디스 던전을 접었으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아.”
“에엑…… 험담만 하고 휙 가버렸는데 나쁜 사람이 아니라구?”
“험담만 하고 가다니 티오…… 그 사람이 도와줘서 다들 무사했잖아. 뭔가 경고도 해줬고.”
안티오페의 말에 카시아가 반박했다.
솔직히 일행들은 발키리가 달갑지만은 않았을 거다.
은인이긴 하지만 썩 좋은 얘기만 하고 간 건 아니니까.
그래도 나는 그게 우리를 깎아내리기 위함이 아닌, 우리에게 조언을 해주기 위한 거라고 생각한다.
말하는 투는 좀 별로였지만 말이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 난 또 나 말고도 성가신 여자가 꼬인 줄 알았어.”
내 말을 듣고 안심했는지 크림힐트는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크림힐트. 이것저것 알려준 것도 그렇고.”
“……이 정도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 저 여자 꼬장 부리는 게 싫어서 대답해준 거니까.”
“뭐라구요?! 이 년이 진짜 시도 때도 없이 꼴받게 하네!”
크림힐트의 도발에 나나는 버럭 화를 냈다.
그녀는 크림힐트에게 복수하려고 음흉한 손길을 뻗었지만 다른 일행들이 나나를 저지했다.
“그나저나 천좌라는 건 뭘까? 이것도 뭐 집히는 거 없어?”
“글쎄…… 천좌는 진짜 처음 들어보는데…….”
니아는 우리 앞에 나타난 발키리 보다 그녀가 언급한 적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나도 마음이 썩 편하진 않았다.
발키리가 은신 포션을 줬다는 건 천좌라는 놈이 은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날 직접적으로 노리고 있다 했으니 언제 어디서든 공격해올 수 있으리라.
내 예상대로 발키리가 플레이어라면 천좌란 자들도 플레이어이지 않을까?
나랑 나나처럼 게임 세계에 들어온 일부 플레이어들이 다른 플레이어들을 적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주의해야할 것이다.
발키리가 조언했던 것처럼 안일함은 버리고 매 순간마다 의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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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바꿀 게 많아서 오래 걸렸습니다. 공지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이전 스토리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수정하기 전엔 많이 고민했는데 여러분들의 응원을 듣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