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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익의 조언자
아니, 어쩌면 오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새침하게 말하긴 했어도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내가 엉덩이 때리는 것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크림힐트는 나나한테 채찍질 당할 때도 은근히 좋아했다.
유두를 발딱 세우고 보지도 젖어들 정도였으니까.
한 마디로 크림힐트는 SM을 좋아하는 변태다.
이 과도한 노출도도 수치심을 느끼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더 때려도 그녀에겐 포상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머릿속의 음란마귀가 그런 결론을 도출해낼 때였다.
[끼아아아아악!!]
“……!”
“……?!”
어디선가 찢어지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와 크림힐트는 번뜩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 소리…… 히포그리프는 아니지……?”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의 울음소리는 이렇게 소름끼치지 않는다.
우리가 들은 소리는 엘레나의 포효와는 달리 끔찍하게 뒤틀려 있었다.
게다가 난 이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대서고 안에서 이런 소리로 울부짖을 수 있는 놈은 하나뿐이다.
콰가가가각!
다음 순간 무언가가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위험을 직감한 나는 크림힐트를 끌어안은 채 지면으로 몸을 날렸다.
“조심해!!”
“……?! 꺄아앗!!”
콰과아아앙!!
크림힐트의 비명과 함께 한 쪽 벽이 박살났다.
가구를 부수며 나타난 그것은 푸른색 부리와 깃털을 가진 거대한 조인이었다.
[끼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벽을 함몰시킨 놈이 위협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그 소리로 인해 약재를 담은 병들이 일제히 깨졌고 우리도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테나의 맹금……!!”
놈의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
놈의 정체는 대서고에 자리 잡은 미니보스, 아테나의 맹금이었다.
본래는 구석진 곳에 위치한데다가 직접 움직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진행 중 마주칠 일이 없다.
의도적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싸울 일이 없는 미니 보스인 것이다.
그런 놈이 출몰 지역과 훨씬 떨어진 여기까지, 지형지물을 부수면서 날아오다니.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됐다.
천둥새가 공격했을 때와 동급으로 말이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나는 즉시 검을 뽑아들고 맹금과 대치했다.
“크림힐트! 일단 정적부터 깔아! 놈이 이 이상 소리 지르게 하면 안 돼!”
“알았어……!”
귀를 틀어막고 있던 크림힐트가 이를 악물며 주문을 영창했다.
“덴 아훈 울다한, 헤인 루스 파룰단……!”
삐이이이이이…….
맹금의 시끄러운 비명 소리가 순식간에 백색 소음으로 바뀌었다.
그것마저 없어진 후에는 주위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걸로 놈의 비명 소리는 차단됐다.
계속 듣고 있었다간 저주 수치가 미친 듯이 올라갔을 것이다.
그뿐이랴, 정신 공격 저항력이 낮은 크림힐트는 공포에 걸려서 아무 것도 못했을 거다.
[……! ……!!]
소리가 차단된 것을 깨달은 맹금은 우리 쪽으로 사납게 달려들었다.
칼처럼 날카로운 부리를 무기 삼아 날 집중적으로 쪼아대는 것이었다.
‘이 새 새끼가!’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에 나는 필사적으로 대응했다.
맹금의 공격력은 650이나 된다.
선택적으로 잡는 미니 보스인 만큼 장원의 다른 몬스터들 보다 압도적인 스펙을 가진 것이다.
나는 방어력을 감안하더라도 두 방이면 죽는다.
크림힐트의 포션이 없었다면 한 방에 죽을 수도 있었겠지. 필사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티잉! 팅! 카가앙!
연달아 날아오는 부리를 튕겨내며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신체 구조상 놈에게 딱 달라붙으면 부리 공격을 받을 일이 없어진다.
허나 놈도 바보는 아닌지라 내가 접근할 때마다 날개를 펄럭여서 거리를 벌렸다.
‘귀찮게도 하네……!’
아테나의 맹금도 나름대로 기믹이 존재한다. 선공했다면 와호처럼 편하게 잡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기습당한 나머지 나는 아무런 방비도 못했다.
지금으로선 내 쪽이 훨씬 더 불리한 것이다.
카각! 카가각!!
맹금과 공방을 펼치며 놈의 빈틈을 노릴 때였다.
후방에서 날아온 빙결검이 놈의 몸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크림힐트가 뒤에서 지원을 가해준 것이었다.
비록 정적 상태라 주문 영창은 못하지만 즉발 슬롯에 등록한 스킬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덕분에 맹금도 마구잡이로 공격하지 못했다.
빠르게 날아드는 빙결검이 놈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그것만으론 맹금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으나 크림힐트도 계속해서 마법을 퍼부었다.
쐐애액!
콰차아아앙!!
화살처럼 날아간 얼음 쐐기가 놈의 몸에 박혔다.
그것은 냉기를 뿜어내며 피격된 부위를 새하얗게 얼렸다. 동결에 걸린 것이다.
동결은 몸을 얼려서 일정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상태이상.
허나 맹금은 크기가 워낙 큰 적이라 효과가 온전히 적용되지는 않았다.
물론 크림힐트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한쪽 날개에 맞췄다.
이로써 놈은 오른쪽 날개를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나는 크림힐트가 만들어준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돌진했다.
[끼아아아악!!]
그때쯤의 정적의 효과가 끝났다.
오른쪽 날개를 쓸 수 없게 된 놈은 비명을 질러서 내 접근을 차단하려는 듯했다.
나나가 없는 지금 저주 수치가 쌓이는 건 무척 위험하다.
그러나 오히려 기회가 되기도 했다.
“딜 타임 고맙다!!”
[끼이이이익!!]
놈이 목이 찢어져라 포효 하는 와중 나는 놈의 날개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 후 놈이 고통스러워하는 틈을 타 혹한의 비수를 준비했다.
혹한의 비수의 최대 차지 개수는 6개.
하지만 비수 한 개를 추가로 차지할 때마다 1초가 걸리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써먹기 힘들다.
그것이 근거리에서 사용하는 비수라면 말이다.
하지만 놈의 비명으로 저주 스택이 쌓이는 것보단 빠르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6개의 비수를 모조리 놈의 몸에 때려 박았다.
파바바바박!!
[끼하아아아악!!]
일제히 놈의 몸을 꿰뚫는 얼음의 칼날.
아무리 미니 보스라고 할지라도 혹한의 비수 풀 차지를 맞고도 멀쩡할 수는 없다.
라미아들처럼 추가 피해를 받지는 않지만 6천이 넘는 데미지가 순식간에 박힐 테니 말이다.
놈의 생명력이 1만인 걸 고려하면 반 피가 넘도록 까였을 거다.
더군다나 내가 노린 위치는 놈의 약점인 가슴.
그로기 수치도 상당히 쌓였으리라.
나는 놈이 잠시 주춤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명도참을 날렸다.
“쯔아아아앗!!”
촤자자아악!
저승을 연상케 하는 보라색 검기가 맹금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
맹금은 피할 틈도 없이 내 검기를 곧이곧대로 맞고 말았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쳐들어온 건 실수다.
이 방은 무척 좁아서 자유롭게 회피하지 못한다.
놈의 특기인 기동성을 살리기엔 턱없이 불리한 장소인 것이다.
한 쪽 날개가 얼어붙었다면 더더욱 힘들겠지.
[끼에에에엑……!!]
덕분에 맹금은 피를 뿜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후퇴하려는 심산이었다.
놈이 문 쪽으로 튀어나가려 할 때, 나는 크림힐트에게 소리쳤다.
“크림힐트! 빙하로 막아!”
“그러려던 참이야!”
나와 뜻이 통했는지 크림힐트가 빙하를 시전했다.
허나 놈의 순발력도 만만치 않았다.
맹금은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옆쪽으로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콰과아아앙!!
문 옆쪽의 벽이 산산조각 났다.
간발의 차이로 빙하를 지나친 맹금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끼하아아악!!]
그 후 푸른색 날개를 펼쳐서 높이 날아오르는 맹금.
방을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동결의 지속 시간이 끝난 듯했다.
대서고는 천장이 높아서 비행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도주를 시도한 놈은 하늘에서 한 차례 호버링하더니 무언가를 발견한 듯 빠르게 날아갔다.
그 움직임을 보고 난 맹금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 저 새끼 우리 일행을 봤어!”
“소용없지 않아? 저 정도로 다쳤으면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아니야! 놈한텐 성가신 능력이 있다고!”
맹금의 패턴 중에는 플레이어의 마력을 흡수하여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 있다.
놈이 공중에서 기습을 감행한다면 일행들은 그 패턴에 대응하지 못할 거다.
순식간에 마력을 모조리 빨리고 놈의 생명력은 거의 최대치까지 회복되리라.
더군다나 연구실 밖에선 조금 전과 같은 극딜 타임을 노릴 수 없다.
놈이 회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와 크림힐트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 멀리 있을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피해!”
“절대 놈한테 잡히지 마!!”
수많은 책장들을 가로지르며 달리자 곧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키야, 괜찮아?!”
“잡히지 말라니, 애초에 무슨 일인데요!”
재빨리 달려오며 니아와 나나가 물었다.
일행들도 소란을 듣고 우리 쪽으로 오려한 모양이다.
그들에게 재빨리 책장 뒤로 숨을 것을 지시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천장 높이 올라간 맹금이 일행들 쪽으로 강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끼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지면으로 돌진하는 맹금.
그 모습은 마치 푸른색 투창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저건 또 뭐야?!”
“알 게 뭐야, 일단 피해! 맞으면 진짜 죽겠어!”
뒤늦게 놈의 존재를 파악한 일행들이 허겁지겁 대응하려할 때였다.
타아아아앙!!
“……!”
무척이나 이질적인, 그와 동시에 낯익은 굉음이 들려왔다.
그것이 총성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깨달음 후에는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잇따랐다.
허나 내 직감과는 달리 총성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울려 퍼진 게 아니었다.
총성과 함께 나타난 기묘한 보호막이 맹금으로부터 일행들을 지켜준 것이었다.
파지지지직!
[키기이이익!!]
그뿐만이 아니었다.
빛나는 보호막에 맹금이 접촉하자 고압의 전류가 놈의 전신을 감쌌다.
난데없이 전격 피해를 입은 맹금은 맥을 못 추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일행들은 아연실색한 채로 놈을 바라봤다.
“바, 방금 그거 뭐야? 마법……?”
“대체 누가 한 거지……?”
모두가 의아해하는 사이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야! 놈이 기절했을 때 공격해!”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무척이나 미려했지만 굳은 기개가 담겨 있어서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목소리를 들은 나는 반사적으로 맹금에게 달려들었다.
“흐으읍!!”
영문은 모르겠지만 절호의 기회다.
나는 기껏 생긴 기회를 허투루 쓸 만큼 미련하지 않다.
단숨에 놈에게 육박한 나는 마신화한 왼손으로 맹금의 머리통을 쑤셨다.
카각!
푸후우우욱!!
[끼에에에에엑!!]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맹금.
머리통이 꿰뚫린 놈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나는 끝장을 내기 위해 팔을 비틀어 뇌를 휘저었다.
손에 잡힌 뇌를 한 움큼이나 뜯어내자 맹금도 단말마를 지르며 숨을 거뒀다.
[키히익……!]
그것이 맹금이 낼 수 있는 마지막 비명이었다.
놈이 부리를 벌리는 걸 본 나는 식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너무 오랫동안 저주에 노출되어 있어서 저주 수치가 위험한 지경까지 쌓인 것이었다.
아라크네 세트의 저주 저항력이 없었다면 진즉에 골로 갔을 거다.
놈의 죽음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의를 위해 마련된 것 같은 높은 단이 보였다.
칠판과 책 더미로 이루어진 그곳앤 웬 새하얀 망토를 두른 여성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판초 형태의 망토는 후드가 달려 있었으며 얼핏 봤을 때는 날개를 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후드를 꾹 눌러쓰고 있어서 여성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윤기가 흐르는 진갈색 장발과 망토로조차 가릴 수 없는 몸매를 보고 얼마나 미인인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봐선 별로 이상한 점이 없었다.
얼굴을 가린 점이 좀 수상하긴 했으나 평범한 모험가의 범주에선 벗어나진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소지하고 있는 무기였다.
그녀는 특이한 형태의 장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은색을 베이스로 화려한 장식과 문양이 가미된 그것은 현실의 총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장총임에도 불구하고 실린더가 달린 걸 보면 어느 모로 보나 가공의 총기였다.
‘누구지……?’
위화감으로 가득한 그 모습을 보며 놀랄 무렵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언니! 덕분에 살았어요!”
한동안 당황스러워하던 나나가 상황을 파악하곤 감사 인사를 건넸다.
허나 그녀도 막무가내로 고마워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레 니아의 뒤로 빠지며 그녀를 경계했다.
그녀도 적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다른 일행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경각심은 늦추지 않았다.
여성이 언제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의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관찰했다.
“도와주신 건 진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인사하기 전에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