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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99화 (19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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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의 사정

내가 크림힐트를 보낼 무렵 니아가 내게 와서 말했다.

“여긴 진짜 적이 없네……. 엄청 조용하고…….”

어둡고 음산한 지하 감옥을 지나와서 그럴까.

책들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오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대서고의 벽은 커다란 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화사한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그 빛이 실내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나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나비들과 어우러져 더없이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해냈다.

우릴 쫓던 거대 석상들도 건물 안에 들어온 후부턴 별 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

휴식하기엔 제격인 것이다.

“여기서 좀 쉬다 갈 거니까 누나도 좀 쉬어.”

“다키 넌 뭐할 건데?”

“나는 필요한 것들 좀 챙기게.”

이 넓은 대서고에는 고리타분한 고서들만 있는 게 아니다.

크림힐트에게 알려준 빙결 마법서처럼 다양한 종류의 스킬 북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검법서나 유미가 사용할 수 있는 주술서도 있다.

대서고는 쉬어가는 장소임과 동시에 스킬 북 파밍을 위한 장소인 것이다.

일정을 알려준 뒤 일행들과 함께 도서관 중앙으로 향했다.

넓은 홀에는 여신상과 함께 쉴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오래 방치된 탓에 먼지 쌓인 곳이 많았으나 그것만 좀 감수한다면 한숨 돌리기엔 최고였다.

일행들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나는 여신상을 기점으로 스킬 북이 있는 책장을 파악했다.

책장의 수가 워낙 방대해서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구조 자체는 게임이랑 같은데다 각 책장에는 특징적인 문장들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제비 모양 책장에서 검법서를, 여우 모양 책장에서 주술서를 찾은 뒤 다른 책장들도 둘러봤다.

당장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팔거나 새로 생긴 동료들에게 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기왕 찾는 김에 니아를 위한 전술서도 찾아봤다.

스킬 북을 얻는다고 해서 즉시 스킬을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헤베에게 가져다주는 걸로 바로 습득할 수 있으나 게임 세계의 주민들은 자기 나름대로 정독하고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모은 책들은 일단 가방 안에 잘 챙겨뒀다.

‘안티오페도 파티원이 되면 좋을 텐데.’

책장을 뒤지던 도중 전사와 관련된 서적을 발견하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파티원 중 유독 활발하고 살가워서 그럴까.

크림힐트 못지않게 그녀가 탐나기 시작했다.

사실 파티의 밸런스를 생각하면 안티오페는 크림힐트와 카시아 보다 훨씬 더 내게 필요하다.

현재 고정 파티 멤버로 있는 건 나나와 유미 이렇게 두 사람 뿐이다.

니아와 제이드랑도 많이 친해졌지만 장원 공략이 끝난 뒤에도 같이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앞에 있을 일을 생각하면 아마 한동안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런 나에게 딜탱인 안티오페는 무척 탐나는 인재가 아닐 수 없다.

‘스쿨드한테 둘 다 내놓으라고 할까?’

날 납치하고 동료들을 살해하려 한 대가는 아직 제대로 받지 않았다.

크림힐트를 빌려주는 건 일시적인 보상, 내가 가지고 있는 패를 생각하면 훨씬 더 많이 뜯어먹을 수 있다.

정 자기네 파티원이 소중하다고 하면 내 쪽에서 조금 더 딜을 하여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노출증 걸린 변태 마법사랑 구릿빛 피부의 복근 미인이 내 파티원으로 들어온다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장원 공략이 끝난 다음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다.

그렇게 한창 책장들을 뒤지던 나는 방 하나를 찾아냈다.

방문 옆에는 연구실이라 적힌 낡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는데 다름 아닌 크림힐트가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크림힐트?”

“응……?”

그녀의 뒷모습을 본 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크림힐트를 불렀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게서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걸까?

살짝 빨개진 귀를 보면 그런 것 같다.

“여길 용케 찾았네? 안에서 뭐하고 있었어?”

“……포션 조제.”

반가운 어투로 물으니 크림힐트는 나지막하게 대답해줬다.

다행히 대화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포션도 만들 줄 알아? 의외네.”

“잘 하는 건 아니야. 그냥 나랑 동료들한테 유용한 것만 좀 만들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며 크림힐트는 작업대 앞에 서서 열심히 약초를 갈고 즙을 우려냈다.

본인 말로는 잘 하진 못한다고 했는데 막상 그녀의 솜씨를 보면 숙련된 약사와도 같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조합법을 그대로 따라서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나 같은 경우엔 관련된 지식은 있어도 약초학이나 포션 조제 스킬이 없어서 알아도 못 만든다.

스킬 없이 시도하려 했다간 내 몸이 안 따라줘서 실패작을 만들어내고 말 거다.

반면 크림힐트는 제대로 된 포션을 몇 병이나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두 스킬 모두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당신은 여기 왜 왔는데?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

조제에 집중하면서 크림힐트가 물었다.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말투가 이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기분이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거리를 두려고 했던 그녀가 먼저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웃음기를 담아 대답했다.

“나도 여기에 볼 일이 있어서. 찾을 게 있거든.”

“찾을 거?”

“응, 별 건 아니고 그냥 농작물이야.”

그리 말하며 씨앗들을 모아놓은 찬장을 둘러보았다.

한동안 둘러본 끝에 나는 메밀 씨앗이라고 적힌 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처음 메밀 관련 퀘스틀 받을 때는 어디에서 구해야할지 조금 난감했다.

그런데 조금만 기억을 다듬어 보니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이 연구실에는 장원에서 수확하는 약초, 농작물들에 관한 기록과 샘플이 전반적으로 보관되어 있다.

아테르니아에서 메밀을 재배했다면 이곳에 씨앗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확히 맞춘 것이었다.

이걸로 도깨비들의 퀘스트도 완수할 수 있게 됐다.

그녀들이 원하는 메밀은 아니지만 이것만 전해줘도 알아서 할 거다.

“당신이 그런 거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네. 농사라도 지으려고?”

씨앗이 든 병을 차원낭 안에 넣을 무렵, 크림힐트가 말을 걸어왔다.

살짝 비꼬듯이 말했지만 악의는 없었다.

그냥 성격이 좀 꼬여서 자기도 모르게 저런 말투가 나오는 것이리라.

“부탁 받은 거라서 그래. 메밀 요리 먹고 싶다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런 거라면 카민에서 구해도 됐을 텐데…….”

“어? 그래?”

내 질문에 크림힐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줬다.

“메밀은 산간 지역에서 잘 자라잖아. 카민은 산과 강이 맞닿은 지역이고. 품질도 거기서 나는 게 더 좋을 거야.”

하긴, 카민은 율리아나 인근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를 자랑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님페아 강 하류에 위치해 있어서 농사에도 적합하며 어업 또한 발달하여 무척 풍요로운 곳이다.

그곳에서 재배되는 메밀은 여기서 십년 넘게 썩힌 씨앗보다 훨씬 좋을 것이다.

“그건 또 몰랐네. 알려줘서 고맙다 크림힐트. 나중에 들려야겠어.”

“보고 있기 답답해서 말해준 거야……. 고마워할 필요 없어…….”

감사 인사를 건네자 크림힐트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어쩐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감사를 받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겠지.

참 귀여우면서도 골치 아픈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이었다.

‘오우야…….’

크림힐트 쪽을 보다 보니 그녀의 뒤태 또한 눈에 들어왔다.

엉덩이를 내민 채 약을 달이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음란했다.

슬링샷 비키니에 시스루 로브를 걸친 차림이다.

그 상태에서 뒤쪽으로 엉덩이를 내밀면 풍만한 엉덩이가 훤히 보인다.

예쁜 곡선을 그리는 등과 함께 말이다.

군침이 싸악 도는 광경이다.

둘만 있는 장소라서 그럴까,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야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눈 호강을 하고 있을 무렵 크림힐트가 웬 포션 한 병을 내게 넘겼다.

“……마셔.”

“이게 뭔데?”

“몸에 좋은 거. 당신 근접 딜러치고는 엄청 물몸이잖아. 이거 마시면 그나마 나아질 거야.”

병 안에는 밝은 노란색 액체가 들어가 있었다.

넥타르랑 비슷한 색이었는데 얼핏 보면 망고 주스 같기도 했다.

내가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자 크림힐트는 한숨 섞인 어투로 말했다.

“이상한 거 안 넣었어…….”

“그거야 모르지. 네가 갑자기 몸보신하라고 약을 다 지어주는데 의심 안 하고 배기겠어?”

원작에선 노란색을 띄는 독극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허나 마냥 몸에 좋은 거라고 하니까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그렇게 확인을 하고 있을 무렵 눈앞에 아이템창이 떴다.

황금빛 포션.

밝은 금색을 띄는 포션. 심신에 활약을 올려주는 약초들을 배합하여 만들었다. 복용 시 생명이 5 증가한다.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효과였다.

그것을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크림힐트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내 물음에 크림힐트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얘기했다.

“난 딱히 한 거 없어. 그냥 여기 있는 재료들이 좋았을 뿐이야. 다른 곳에선 수십만 아웬을 줘야 살 수 있는 희귀 재료가 많이 있었거든.”

그리 말하며 크림힐트는 자신이 사용한 재료들을 하나하나 보여줬다.

내가 아는 재료들도 있었지만 모르는 재료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걸 보고 재료 아이템 또한 DLC로 추가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귀한 걸 나한테 먹이겠다고? 안티오페도 있는데?”

생명력을 올려주는 포션이라면 나보다 안티오페에게 더 유용할 거다.

어떤 직업군이든 생명력은 높아야 좋지만 딜탱인 그녀에겐 더욱더 중요하니까.

더군다나 안티오페는 크림힐트의 동료고, 나는 그녀를 노예처럼 부리고 입장이다.

크림힐트 입장에서 누가 더 중요한 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으리라.

그런데 내 물음에 크림힐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던전 공략하면서 내 몫은 없을 거라며. 난 계약 내용대로 했을 뿐이야.”

말하는 동안 그녀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뺨도 살짝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걸 보고 이 포션이 그녀 나름의 보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자신을 안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겠지.

크림힐트의 의도를 깨달은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잘 마실 게. 너도 필요한 재료 있으면 챙겨. 마력 올려주는 배합도 있을…… 으엑!”

황금빛 포션을 홀짝이면서 크림힐트에게 말할 때였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끔찍한 맛에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 포션, 보기엔 망고 주스 같아서 엄청 달달해 보였는데 막상 먹으니까 존나게 맛없다.

쓴 건 기본이고 이상한 냄새까지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본 크림힐트는 웬일로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쿠후훗……!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쓴 법이야. 참고 마셔.”

“너 진짜 이상한 거 넣은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 찝찝하면 나주던가.”

태연하게 손을 내미는 크림힐트.

놀리듯이 말하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이템 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끔찍한 맛을 느끼면서 나는 끝내 포션 한 병을 다 비웠다.

너무 맛없어서 바로 넥타르 한 병을 다 들이켰다.

어차피 여신상에서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으니 지금은 내 혀를 위해 쓰기로 했다.

“으으으…… 더럽게 맛없네…….”

헤베의 향기가 담긴 음료를 마셨는데도 별로 나아지진 않았다.

포션 특유의 맛이 입안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생명 스탯이 5 오르면서 최대 생명력이 150이나 증가했다.

이걸로 내 최대 생명력은 780이 됐다.

아직 좀 부족하긴 하나 상당히 오른 편이다.

다른 스탯에 투자하느라 생명에 투자 못했던 걸 생각하면 감지덕지했다.

“잘 마셨어……. 확실히 몸에는 좋은 거 같네.”

“잘 됐네, 토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 마신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을 무렵 크림힐트는 다른 포션들을 몇 병인가 더 만들었다.

각각 색이 다른 걸로 보아 생명력 증가 포션은 하나만 만들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나머지 포션들에게도 관심이 갔지만 저 정도는 크림힐트한테 양보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녀가 없었으면 있는 줄도 몰랐을 테니까.

확인해보니 나한테는 별로 필요 없는 효과들이기도 했고.

그보다 난 크림힐트에게 더 관심이 갔다. 정확히는 음탕하게 내민 그녀의 엉덩이에 말이다.

유미 때문에 그럴까?

아까부터 여자들 엉덩이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아예 반쯤 헐벗은 크림힐트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크림힐트가 날 은근 꼴받게 해서 혼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멀뚱히 그녀의 뽀얀 엉덩이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것을 찰싹 때렸다.

“아앙?!”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크림힐트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곤 얼굴을 붉히면서 반사적으로 날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라 그런지 난데없이 엉덩이를 맞는 건 부끄러운 듯했다.

“가,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물어보는 크림힐트.

그에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한 번 때려보고 싶어서 때렸어. 왜, 기분 나빠?”

“으읏…….”

내 말에 크림힐트는 분하다는 듯이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안 나빠.”

“……!”

그 말을 듣고 나는 오해에 휩싸였다.

음흉한 마음으로 때렸는데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마치 난 엉덩이 맞는 게 좋으니까 더 때려달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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