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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98화 (19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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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의 사정

“뭐, 뭐야? 왜 공격 안 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와 안티오페가 연달아 의문을 표했다.

다음 순간 카시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우리들에게 말했다.

“잠깐만…… 저 아이 우리랑 싸우려 온 게 아니야. 다른 괴물들처럼 이성이 없지도 않아.”

듣고 보니 우리 앞에 나타난 히포그리프는 멀쩡해보였다.

몬스터를 상대로 이런 표현을 쓸 줄은 몰랐는데, 눈도 똘망똘망하고 흉포한 기색도 없었던 것이다.

녀석은 아름다운 은빛 날개를 접으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꾸국, 꾸구국.]

놈이 지목한 것은 선두에 있는 니아였다.

위협적인 느낌이라곤 전혀 없는 울음소리를 내며 접근해온 히포그리프.

방패를 든 채 놈과 대치한 니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얘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뭐 원하는 게 있나……?”

“히포그리프가 이러는 건 나도 처음 보는데…….”

히포그리프는 테이밍이 가능한 대표적인 몬스터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에게 우호적인 것은 절대 아니다.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선 공격성이 덜하지만 자신 보다 약해보이거나 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은 가차 없이 공격한다.

히포그리프 기준으로 우리가 자신 보다 강해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말 보다 훨씬 큰 히포그리프는 맹금의 기사들도 먹잇감으로 삼을 정도로 강하다.

천둥새 같은 규격 외의 괴물들을 제외하면 장원 생태계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한 몬스터다.

그런 놈이 왜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걸까.

의문과 혼란이 뒤섞이고 있을 무렵, 니아가 입을 열었다.

“어……? 얘, 너 그 목걸이…….”

“목걸이라고……?”

니아의 말을 듣고 우리는 일제히 히포그리프의 목을 확인했다.

풍성한 깃털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녀석은 웬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자, 잠깐만 확인해 봐도 될까? 괜찮지?”

[꾸구욱.]

무기를 내려놓은 채 히포그리프에게 다가간 니아.

그녀는 천천히 녀석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숨을 집어삼켰다.

당장이라도 히포그리프의 발톱이 니아를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히포그리프는 멀뚱히 니아를 바라볼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목걸이의 문장을 확인한 순간.

니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거…… 우리 아빠 목걸이야…….”

“뭐?!”

화들짝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제이드였다.

나랑 동료들도 제이드 못지않게 놀랐다.

“아저씨의 목걸이라니…… 여신님이 말한 거랑 다르지 않아?”

“정확히는 내가 아빠한테 준 목걸이야…… 무사히 돌아오라는 의미에서 부적으로 만들어드렸었는데…….”

거기까지 들은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고인물로서의 감각이 반응한 것이었다.

“혹시 이 녀석, 누나네 아버지가 길러준 거 아니야?”

“아빠가? 히포그리프를?”

니아의 물음에 수긍하며 첨언했다.

“장원에서 약을 찾으려면 꽤 오래 조사해야 됐을 거야. 그동안 새끼였던 이 녀석을 만나서 돌봐줬다고 하면 앞뒤가 맞긴 해.”

자만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빨리 진행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내 덕분이다.

장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혼자 이곳을 탐색하려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내가 예상하길, 니아의 아버지는 탐사 기간 중 홀로 남겨진 새끼 히포그리프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 새끼가 다 자라서 이 녀석이 된 거겠지.

내 의견을 듣고 니아는 히포그리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야? 우리 아빠가 널 돌봐준 거니?”

“꾸국~ 꾸구국~”

조심스럽게 히포그리프를 쓰다듬으며 묻는 니아.

질문 받은 히포그리프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얼굴을 내밀었다.

날카로운 부리로 니아를 쪼아버리는 게 아닐까 식겁했지만 쪼기는커녕 그녀의 뺨에 얼굴을 비벼댔다.

“자, 잠깐만…… 간지러워……! 아하핫!”

부드러운 깃털의 감촉에 니아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보고 있던 제이드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말했다.

“저 녀석…… 니아를 엄청 좋아하잖아……?”

“그럴 만도 하지. 히포그리프들은 가족 간의 유대가 깊거든. 누나한테서 아버지의 기척을 느끼고 저러는 걸 거야.”

히포그리프의 눈에는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 니아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색채를 찾아낸 것이겠지.

그런 히포그리프에게 있어 니아는 십년 만에 만난 자신의 자매일 것이다.

저렇게 애정 표현을 하며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것도 DLC에서 나올 스토리였을까?

아버지를 찾으러 온 딸과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충직한 짐승.

이쯤 되면 히포그리프와 만나는 게 필수 루트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문득 나나가 의견을 냈다.

“앗! 그러면 이 친구가 저희를 위층으로 데려다줄 수 있지 않을까요? 날아서 가면 석상 놈들도 그냥 무시할 수 있잖아요!”

나나의 말에 우리는 그녀와 히포그리프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건 좀 힘들지 않겠어……? 우리 인원이 몇 명인데.”

순간 솔깃한 제이드였으나 그는 곧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그에 나는 히포그리프 쪽으로 다가가며 반박했다.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뭐? 어떻게 하려고?”

“등에 탈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지만 다리에 매달려 갈 수 있어. 줄 같은 걸로 연결하면 더 편하겠지.”

히포그리프를 가리킨 채로 일행들에게 설명했다.

“이 녀석이라면 대여섯 명 정도 끌고 가는 건 일도 아닐 거야. 물론 그럴 마음이 있어야겠지만.”

히포그리프는 자신 보다 훨씬 큰 사냥감도 붙잡은 채 비행할 수 있다.

공식 일러스트의 히포그리프는 아예 거대한 물소를 들고 비행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 녀석에게 이 정도 인원을 나르는 것 정도야 간단한 일이리라.

물론 매달려 가는 사람들은 꽤 불편하겠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말하자 니아가 히포그리프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얘…… 이런 부탁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래……?”

[꾸국, 꾸구욱!]

니아의 말에 날개를 크게 펼치는 히포그리프.

놈은 언제라도 날아오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동의의 표현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에보니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판타지 세계의 동물이라 그런지 사람 말을 정말 잘 알아듣는다.

그 모습을 본 니아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아빠를 구하고 싶은 거구나…… 그래, 같이 가자.”

[꾸우욱~!]

니아의 말에 히포그리프는 몇 번인가 날갯짓했다. 의욕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 모로 느껴지는 게 많은 순간이었다.

“좋아, 다들 얘 다리에 줄 묶어. 나나랑 유미는 나랑 같이 위에 타고.”

히포그리프와 교감한 뒤 니아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나는 차원낭에서 밧줄을 꺼내 일행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니, 이 친구 이름은 뭐로 할 거예요?”

“응? 이름?”

“그냥 얘, 얘 하고 부르면 정 없잖아요. 예쁜 이름으로 불러줘야 더 친해지죠!”

나나는 이미 히포그리프가 니아의 펫이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이렇게나 살가운 녀석인데 펫으로 못 삼을 것도 없지.

야생성이 남아 있는 게 좀 걱정되지만 던전 공략이 잘 끝난다면 탈것으로 삼아서 데리고 다녀도 괜찮을 것이다.

“그것도 그러네. 그러면…….”

일행들이 다리에 밧줄을 묶고 있을 때 니아는 히포그리프의 목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잠시, 추억에 젖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엘레나로 할래.”

“엘레나요?”

“그거 분명 니아 씨의 중간 이름…….”

이름의 뜻을 알아챈 나나와 유미는 조금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에 니아는 서글프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빠라면 분명 그렇게 지었을 것 같거든. 내 말이 맞지 엘레나?”

[꾸국, 꾸우욱~!]

이름으로 불러주자마자 히포그리프, 아니 엘레나는 눈에 띄게 좋아했다.

아무래도 니아가 정확하게 맞춘 모양이다. 그 사실이 참 신기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나저나 얘 여자애 맞아? 엘레나라 지어놓고 남자애면 웃길 거 같은데.”

“내가 확인했으니까 줄이나 마저 묶어.”

안티오페의 말에 대답하며 제이드는 다른 사람들의 줄을 체크해줬다.

그도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적잖게 울적할 것이다.

시종일관 경박하고 익살스럽던 그가 저렇게 무덤덤할 정도니 말이다.

엘레나의 다리에 밧줄을 묶길 몇 분.

우리는 끝내 비행할 준비를 마쳤고 니아가 엘레나에게 이야기했다.

“다 됐어 엘레나. 우리를 아빠한테 데려다줘.”

[키아아아앗!]

조금 전과 다르게 날카로운 포효를 내지른 엘레나.

녀석은 앞으로 나아가며 천천히 날갯짓하더니 이내 하늘 위로 비상했다.

“우, 우와앗!”

“으으읏……!”

점점 높아지는 고도에 일행들은 저마다 비명을 터뜨렸다.

등에 탄 사람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나처럼 밧줄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었다.

특히나 크림힐트는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는 지 눈에 띄게 무서워하는 기색이었다.

“크림힐트! 너 괜찮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크림힐트를 보며 물었다.

바람 소리 때문에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 부름에 크림힐트는 애써 태연한 척 이야기했다.

“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바람이 너무 세서 그런 거야……!”

“눈 감으면 위험해! 아래만 안 보면 괜찮으니까 눈은 좀 떠봐!”

“시, 싫어! 눈을 뜨는데 어떻게 아래를 안…… 꺄아아아악!!”

크림힐트와 대화하던 도중 엘레나가 속도를 높였다.

멀리서부터 땅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쿵! 쿵! 쿵!

[그극…….]

[그그극…….]

신전 앞을 지키는 석상들이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병사처럼 생긴 그것들은 창과 방패를 들어 올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엘레나는 놈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히야……! 진짜 크네?! 저런 거랑 싸워야 했던 거야?!”

“그러게 내가 뭐라 했냐! 어마어마하게 크다 했지!”

다가오는 석상들을 보며 안티오페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석상들은 마치 거대 로봇물에 등장하는 로봇들 같았다.

그만큼 크기도, 움직임도 박진감 넘쳤다.

워낙 굼뜬 놈들이다 보니 엘레나가 이 속도만 유지해도 잡히지 않을 거다.

다만 크림힐트는 계속 무서운 경험을 해야겠지.

어쩌다가 내 쪽으로 온 그녀는 반사적으로 날 와락 끌어안았다.

“어? 크림힐트?”

“……!”

자기도 모르게 포옹한 그녀를 보며 나도 당황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러자 크림힐트는 순간 얼굴을 화악 붉히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니까…… 착륙할 때까지만 이렇게 있어줘……”

“그, 그래.”

너무나 간절한 부탁에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크림힐트가 안기자 그녀의 커다란 가슴과 부드러운 살결이 내 몸에 비벼졌으니 말이다.

시원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느끼는 그녀의 몸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나도 줄을 붙잡지 않은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훌륭한 여체를 만끽했다.

그렇게 한동안 위로 올라가던 도중 니아가 적당한 착륙 지점을 발견했다.

“괜찮은 곳 찾았어! 발코니처럼 보이는데 저기 착륙할게!”

“그래! 고도 조심하고! 더 올라가면 위험하거든!”

하늘을 확인한 뒤 니아에게 이야기했다.

이대로 최상층까지 올라가면 잡몹들과 싸울 필요 없이 보스전을 치룰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진짜 자살 행위다.

우리가 올라가는 동안 상층의 몬스터들은 결코 가만있지 않을 거다.

놈들 역시 비행이 가능하니 곧장 추격해오겠지.

이동과 공격이 제한되는 이 상태에선 놈들에게 제대로 대응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대서고 발코니에 착륙했다.

“후하아! 살다 살다 히포그리프를 다 타보네! 엄청 재밌었어! 그렇지 크림?!”

엘레나의 안정적인 착륙 덕분에 우리는 사뿐히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착륙하자마자 신나게 떠드는 안티오페를 보며 크림힐트는 냉담한 어투로 말했다.

“아니…… 재미없어…… 다신 안 할 거야…….”

그와 동시에 나한테서 떨어진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항상 냉정한 척 하더니 엄청 부끄러운 모양이다.

저 녀석도 보다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새삼 크림힐트를 다시 보며 나 역시 일행들과 함께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서고는 이름처럼 수많은 책과 책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과 바닥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수의 책장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심지어는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도 있었다.

이곳에 있는 고서만 해도 족히 수십만 권은 넘으리라.

이 정도 양의 책을 한 평생 동안 다 읽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와아아…….”

그걸 본 크림힐트는 웬일로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다른 이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그녀처럼 두근거림을 느끼지는 않았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이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크림힐트.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 나는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엔 유독 신기해 보이는 책들이 가득했다.

“마법 관련 서적은 저쪽이야. 얼음 마법은 엘크 문양 책장을 찾아봐.”

“……!”

내 조언에 크림힐트는 화들짝 놀라더니 슬쩍 날 바라보았다.

그리곤 얼굴을 붉히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 고마워…….”

그 후 멋쩍어지기라도 했는지 빠르게 책장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게 갭모에라는 건가.

너무 귀여워서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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