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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97화 (19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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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의 사정

그걸 보고 제이드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여긴 아테나의 거처 바로 앞이잖아. 여신님은 성문에서 봤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배회 중인 아버지를 우연히 마주친 걸 거야. 평소엔 여기 있을 수밖에 없어.”

“특별히 이유라도 있는 거냐?”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니아를 돌아보았다.

“누나네 아버지는 약 때문에 장원으로 왔지?”

“……! 다키 너…… 그걸 어떻게…….”

내 말에 니아도, 제이드도 눈에 띄게 놀랐다.

경악하며 묻는 니아를 보며 나는 적당히 말을 지어냈다.

“가족도 있는 사람이 죽을 각오로 장원에 들어왔다면 이유는 하나 밖에 없으니까.”

과거 아테나는 지혜의 장원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발달한 도시였다.

그 중에서 가장 발달한 기술 중 하나가 의술이었다.

아테르니아의 약사들은 법술로도 고치지 못하는 질병을 특수한 의약품을 통해 쉽게 고치곤 했다.

그래서 아테르니아엔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왔으며 이는 던전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이 생지옥이라는 게 알려진 후에는 발길이 뚝 끊겼지만 말이다.

공중정원은 그 고도로 발달된 의학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다.

단순히 예쁘라고 꾸며놓은 정원이 아니라 각종 약초들을 제배하고 이를 약물로 가공하는 시설인 것이다.

약을 구하러 온 사람은 거기 있을 수밖에 없다.

“맞아…… 아빠는 약을 구하려 했어. 엄마의 병을 낫게 하려고…….”

내 말을 듣고 니아는 자신의 사정을 좀 더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니아가 철이 들 무렵 불치병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고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성과는 전무했다.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니아가 15살 정도 됐을 무렵엔 더 이상 손 쓸 방도가 없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바로 장원에서 들어오게 된 계기였다.

“잠깐…… 니아네 아빠가 떠난 건 10년 전이라 하지 않았어? 그러면 니아네 엄마는 이미…….”

“티오…… 그 이상 말하지 마…….”

이야기를 듣던 중, 이후의 이야기를 직감한 안티오페가 충격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크림힐트가 그녀를 제지했지만 이미 늦었다.

허나 니아는 화내거나 불쾌해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크림힐트. 이미 다 지난 일인걸.”

한 차례 숨을 고른 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엔 하늘 높이 뻗은 새하얀 거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아테나의 신전에 가까워진 것이었다.

“아빠가 실종된 후 엄마는 머지않아 집을 나갔어.”

“집을 나가? 갑자기 왜?”

“글쎄…… 자기가 죽는 걸 딸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나 보지.”

그렇게 말하는 니아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부모님의 짓궂은 장난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억지로 짜낸 것 같은 그 미소를 보니 내 가슴이 다 미어질 것 같았다.

“그때부터 엄마든, 아빠든 누구 하나라도 찾으려고 했던 거야. 그래도 하나 밖에 없는 딸인데 부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

홀가분하다는 어조로 말하는 니아였지만 그녀 역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태연한 척 하고 있으나 그녀는 신전으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을 느낄 것이다.

“미안해, 괜히 이상한 얘기해서……. 이제 곧 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감성적이게 됐네…….”

이야기를 마친 니아는 고개를 돌리며 눈가를 긁었다.

흘러나온 눈물을 감추려고 그러는 거겠지.

“누나가 왜 미안해. 내가 물어본 건데.”

“그것도 그러네. 그나저나 나도 죽을 때가 됐나~ 왜 이리 입이 가벼워진담~”

뒤늦게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건지 니아는 밝은 표정으로 농담을 던졌다.

당연하게도 효과는 1도 없었다.

이 시점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플래그 밖에 안 된다.

농담은커녕 이 앞의 일을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죽음을 앞둔 비운의 히로인이나 던질 법한 대사였던 것이다.

니아가 눈물을 꾹 참으며 앞장서서 걸을 때, 나는 진중한 어조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누나, 미리 말해두는데.”

“응?”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날 돌아보았고, 나는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으름장 놓듯 말했다.

“내가 있는 한 누나는 여기서 절대 못 죽어. 살아 돌아가서 나랑 한 약속 지켜야지.”

“다키야…….”

내 말에 니아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와의 재회는 무척이나 비참할 거다.

너무나 가슴 아픈 결말이 그녀를 죽음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허나 그런 일은 내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내 목표는 전원 온전히 생존해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다.

그 다음엔 니아 누나랑 퇴폐적인 NTL 섹스를 하고 말거다.

동료의 비극적인 희생이니, 아버지를 따라 죽는 효녀 같은 시나리오는 필요 없다.

던전에 들어올 때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정했다.

“참 나, 왜 내가 할 말을 네가 하는데? 누가 보면 네가 남친인 줄 알겠다, 인마!”

한창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 제이드가 익살스러운 어투로 내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그의 농담에 나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뺏기기 싫으면 잘 해봐. 난 그럴 생각 없지만 내가 좀 멋있어야지.”

“이 새끼가……?”

도발을 섞어서 말하자 제이드가 분개하듯 날 노려봤다.

물론 진심으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전부 분위기를 밝히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잘 먹혔는지 계속 우울해하던 니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 푸흡……! 흐흣! 아하핫! 둘 다 뭐라는 거야. 진짜 웃겨!”

남들 보기엔 별로 웃긴 얘기가 아니겠지만 니아는 완전 빵 터지고 말았다.

아예 배를 잡고 웃기를 잠시.

그녀는 나와 제이드, 그리고 동료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빠 따라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정말이지?”

“그럼. 처음 여기 올 땐 어떤 기분으로 와야 할지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아.”

거기까지 말한 니아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아테나의 신전은 코앞까지 와 있었다.

가까워지는 신전을 보며 니아가 활기차게 말했다.

“엄청 늦었지만, 아빠를 위한 장례식을 치를 거야. 미련 없이 가실 수 있게, 당신 딸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 거라고 말해주면서.”

요 근래 들었던 것 중 가장 신박한 패드립이군.

그녀의 멘탈이 얼마나 강한 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누나가 그렇게 말해주니 우리도 기운이 나네. 다들 그렇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동료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동료들도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듯 한 마디씩 꺼냈다.

“그야 물론이죠! 얼른 언니네 아버지를 구해드리러 가자구요!”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부디 극락왕생하실 수 있도록……!”

“딸이 이렇게 훌륭한 전사가 됐으니까 아버지도 분명 기뻐하실 거야. 그렇지 크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뭐, 편히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긴 할게.”

“크림도 참. 이럴 땐 좀 더 상냥하게 말해줘도 좋을 텐데.”

동료들의 격려에 니아는 한껏 미소 지었다.

눈가에는 저절로 눈물이 맺혔지만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다들…… 정말 고마워.”

비록 각자 다른 목적과 이유로 모였지만 여기 들어온 이상 같은 배를 탄 동료다.

모험가 중 사정없는 사람이 없기도 해서 다들 니아에게 공감해주는 것이리라.

‘그나저나 저 녀석들까지 진심으로 격려해줄 줄은 몰랐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새삼 노르니르의 세 사람을 다시 보게 됐다.

안티오페는 그냥 싸움에 미친 광전사인 줄 알았는데 나름 정이 많았고, 크림힐트도 츤츤거리긴 하지만 내심 니아가 기운 차리길 바라는 듯했다.

카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안쓰러워하며 계속 니아의 마음을 달래줬다.

처음엔 영락없는 사이코패스 집단인 줄 알았는데.

지금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 스쿨드만 병신이고 클랜원들은 의외로 인간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길 잠시.

우리는 마침내 신전 앞에 도착했다.

멀리서 봤을 때도 웅장했지만 가까이서 보니까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건물이었다.

고층 건물 저리 가라할 성이 높이 뻗어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드넓은 신전 부지가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무너져 내리거나 수몰됐으나 아름다움 잃어버리진 않았다.

“다른 곳이랑 분위기가 딴판인걸.”

“그러게 말이에요. 여기서 수영해도 되겠어요.”

그림처럼 아름다운 신전 부지를 보며 일행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확실히 아테나가 거주했던 곳이라 그런지 다른 곳과는 차원이 달랐다.

허리까지 차오른 물은 사파이어처럼 청아한 파란색으로 빛났고 곳곳에는 초목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 위에는 아름다운 곤충들이 날아다녀서 이곳이 던전이라는 걸 순간 잊게 만들었다.

우리가 지나온 지역들이 전형적인 다크 판타지였다면 아테나의 신전은 마치 아름다운 멸망 세계를 보는 것만 같았다.

“경치 예쁘다고 방심하진 마. 보기에는 예뻐도 은근 위험한 곳이야.”

“하긴…… 대서고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내 경고에 수긍한 니아가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대서고에 도착하려면 신전 부지를 통과해야 하고 신전 부지는 아주 넓다.

이동 중에 다른 적과 마주쳐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다키, 여기선 어떤 몬스터가 나오냐?”

내가 일행들에게 경고할 때 제이드가 동물 친구인 타이토를 날려 보내며 물었다.

시야 공유를 사용해 정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를 보며 나는 기억나는 대로 말해주었다.

“히포그리프가 나오긴 하는데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수도 적고 활동하기엔 아직 이르거든. 그보다 커다란 석상 같은 것 좀 찾아봐.”

“석상?”

내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 보다 상세히 묘사해줬다.

“창하고 방패 든 석상이야. 정확히는 움직이는 석상이고.”

“마침 입구에서 찾았는데…… 설마 저런 놈들이 우릴 공격하는 거냐……?”

공중에서 수색해서 그런지 제이드는 빠르게 석상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에 나는 낭패하며 이야기했다.

“아 하필이면 거기냐…… 골치 아파졌네.”

내가 언급한 석상은 아테나 시전을 수호하는 경비병들이다.

크기만 10미터에 달하며 통상적인 수단으론 처치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생명력과 방어력을 가졌다.

원작 게임에선 랜덤하게 신전 주위를 정찰하며 플레이어를 공격하곤 했다.

허나 가끔 가다가 입구에 틀어박혀서 안 움직일 때가 있다.

이때는 크나큰 위험을 감수하고 강행 돌파해야 하는데, 지금이 딱 그때인 것이다.

“어떻게 할까? 타이토한테 유인이라도 시켜 봐?”

시야 공유를 유지한 채 제이드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타이토가 어그로 끄는 정도론 꼼짝도 안 할 거야. 걔네도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거든.”

타이토에게 어그로 스킬이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아쉽게도 어그로 관련 스킬은 곰이나 늑대처럼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동물들에게만 붙는다.

매 사냥꾼이 거의 유일하게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다.

“에잇! 뭘 고민하고 있어! 석상 같은 건 그냥 다 때려 부수면 되지!”

“그놈들 크기 보면 그런 말 못할 거다…….”

저돌적으로 말하는 안티오페에게 제이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이 다 같이 덤빈다고 해도 석상들을 쓰러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덩치에 걸맞게 움직임이 느리고 패턴도 단순하지만 패링도, 방어도 안 되는데다가 범위가 넓어서 회피마저 어렵다.

인내력 또한 일반적인 몹들 하곤 비교조차 안 돼서 매 순간 슈퍼 아머를 켜놓은 것과 다름없기도 하다.

사실상 신전 앞의 석상들은 몬스터라기 보단 던전의 기믹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어떻게 처치하느냐를 고민하기 보단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고민을 거듭할 때였다.

[키아아아앗!!]

머리 위에서부터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그것은 틀림없이 맹금류의 울음소리였다.

“적인가?!”

“그러고 보니 슬슬 동 트고 있었네요……!”

지금까지의 경험 때문인지 일행들은 울음소리만 들어도 조건반사적으로 무기를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새가 우리를 공격하러 온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 위를 올려다봤는데, 그곳에는 새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비행하고 있었다.

맹수의 앞발과 말의 뒷다리를 가진 커다란 생물체.

그것은 고고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로 창공을 가로질렀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있는 곳으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 히포그리프다! 다들 피해!”

“우와앗!!”

“꺄아악!”

창처럼 내리꽂히는 히포그리프를 보며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이에 일행들은 재빨리 몸을 날려 놈의 급강하를 피하려 했다.

히포그리프의 강하 공격은 막을 수 없다.

슈퍼 아머가 있어서 저지도 못하는데다 괜히 방어하려 했다간 이어지는 잡기 공격에 당해서 큰 피해를 입고 말 거다.

거기까지 상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었으나 다행히 일행들 모두 내 말을 잘 따라줬다.

짧은 시간 동안 모두 히포그리프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회피하고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놈은 우리를 향해 돌진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앞에 사뿐히 착지한 것이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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