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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95화 (19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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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의 사정

다른 옥졸들 보다 훨씬 큰 몸을 이끌며 돌진해오는 간수장.

얼핏 보면 무작정 달려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키이이이잇!!

“크으윽?!”

“뭐야……! 머리가 갑자기……! 꺄아악!”

놈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일행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정신 간섭이 시작된 것이었다.

조금만 더 놈의 능력에 노출되었다간 누구 하나는 자살 충동에 빠지고 말 거다.

“나나야! 나 나간 다음에 장벽 다시 펼쳐!”

“네?! 다키님은 어쩌려고요?!”

“난 괜찮으니까 빨리!”

나나에게 재촉하며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간수장은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적들에게 지속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압도적인 딜링이 없는 한 접근전으로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원거리에서 공격하려 해도 기동성이 워낙 좋아서 금세 거리를 좁혀온다.

놈에게 대응하기 위해선 정신 공격을 막아주는 포션을 섭취해야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런 물건이 없다.

구하기도 힘든데다가 나한테는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하아압!”

촤아아아악!

신보로 거리를 좁힌 뒤 달려드는 놈에게 섬격을 날렸다.

반격 효과의 발동으로 청백색 뇌광이 신속하게 놈을 베었다.

[키하아아악!]

순간 멈칫한 간수장이었으나 놈은 더욱더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자살 충동 능력을 극대화시키려는 것이리라.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내가 신령이 다니는 길에서 왜 와호를 잡았겠는가.

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였다.

하얀 짐승의 부적

와호의 털을 엮어 만든 기이한 부적. 와호를 숭배했던 어떤 주술사가 만들었다. 소지하고 있을 시 정신 계열 상태이상을 무조건 저항한다. 단, 혼령형 적에게 받는 피해가 방어력을 관통하며 빙의에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치명적인 페널티가 있는 대신 정신 계열 상태 이상을 전부 저항할 수 있는 아이템, 하얀 짐승의 부적.

한동안 가지고 있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쓸 일이 없었으나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

부적의 영향으로 나는 놈의 정신 공격에 일절 영향을 받지 않게 된 것이었다.

“소리만 지르지 말고 공격을 해봐! 할 줄 아는 게 빼액 거리는 거 밖에 없냐?!”

촤악! 촤악! 촤아악!

연달아 검을 휘두르며 놈을 도발했다.

그러자 간수장도 정신 능력이 통하지 않는 걸 알아차렸는지 육탄전에 들어갔다.

머리와 팔에 달린 뱀들을 이용해 내게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팅! 팅! 티딩!!

티잉! 티이잉!!

[쉬카아아악!]

[쉬이익!!]

흉측하게 생긴 뱀들이 나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워낙 민첩한 공격이어서 피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 피하려 하면 오히려 엇박자로 쫓아와서 공격에 맞게 될 거다.

그렇기에 나는 아예 방어 패링으로 놈들의 이빨을 하나하나 다 쳐냈다.

몇 초 동안만 해도 수십 번의 공격이 날아와 쉽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할만 했다.

날 고통스럽게 했던 놈 중 하나인 만큼 공격 박자 같은 건 오래 전에 외워둔 것이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처음 장원에 들어왔을 때 거짓말 안 하고 이놈한테만 스무 번은 넘게 죽었다.

처음에는 정신 공격에 대응하지 못해서 죽었는데, 대응 수단을 갖춘 뒤에는 지랄 맞은 패턴 때문에 계속해서 죽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더욱 집요하게 덤볐다.

패턴을 파악하는데 전념하고 놈의 약점을 밝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

내가 이토록 여유롭게 간수장과 맞설 수 있는 건 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던 덕분이다.

[쉬카아아앗!!]

그렇게 자잘한 공격을 연달아 튕겨내자 간수장은 양손의 뱀을 하나로 모으더니 빠르게 뻗었다.

뱀들이 얽혀 만들어진 포탄이 위협적으로 날아왔으나 나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거 써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카아앙!!

초록색 빛이 감긴 검으로 놈의 뱀들을 날렵하게 쳐냈다.

반격 스킬 사영격의 효과였다.

방금 전의 일격 패턴은 일반적인 패링이 안 먹히는 대신 스킬로 쉽게 튕겨낼 수 있다.

나는 그걸 노리고 재빨리 사영격을 발동한 것이었다.

공격을 쳐낸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놈의 목을 베어 넘겼다.

푸화아아악!!

[키이이이이익?!]

검은색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약점을 공격당한 놈은 순간 그로기 상태에 빠졌고 나는 힘껏 점프해서 놈에게 왼팔을 휘둘렀다.

당연히 내 왼손은 마신화한 상태였다.

“잘 가라!”

퍼허어어억!!

지상으로 낙하하면서 그대로 놈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지면과 격돌한 간수장의 머리는 토마토처럼 으깨졌고 이후 크고 작은 뱀들이 기생충처럼 튀어나왔다.

간수장의 몸은 발악이라도 하듯 미친 듯이 경련했지만 얼마 안 가서 힘없이 늘어졌다.

정말 죽는 모습까지 역겨운 놈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칼에 묻은 피를 털 때 동료들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이햐아! 역시 다키님! 저런 뱀 새끼는 상대도 안 되군요!”

“굉장해! 진짜 대박이었어, 대장!”

“저런 괴물을 장난감 다루듯 가지고 놀다니…… 구원자의 재목이라는 말이 과장은 아니었구나.”

그들은 모두 감탄어린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나나를 필두로 안티오페도, 카시아도 날 거듭 인정했다.

자신들은 손도 못 대는 괴물을 혼자서 처리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너무 멋있으셨어요, 스승님……! 바, 반해버릴 뻔했어요……!”

유미도 웬일로 적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얼굴을 붉히며 힘겹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원작 게임하면서 스무 번씩 죽은 걸 여기서 보상 받는구나.

호감도 게이지가 따로 표시되었다면 지금쯤 여성진들의 호감도가 눈에 띄게 올라갔을 것이다.

내가 동료들의 환호성을 만끽하고 있을 때 나나가 문득 유미를 보며 말했다.

“에엥~? 반할 뻔한 게 아니라 이미 반한 거 아니에요~? 유미 쟝 얼굴 완전 빨개졌는데?”

“마, 말이 그렇단 거예요……! 저 같은 게 어떻게 스승님을 좋아하겠어요……!”

놀리듯 말하는 나나에게 유미는 당황을 금치 못하며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허튼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어떻게든 자신의 본심을 숨기려는 듯했다.

그 말은 즉 나한테 이성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데다가 자존감도 낮아서 당당히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던전에 들어오면서 한층 더 끌리게 된 것이 눈에 보였다.

던전 끝나면 유미도 적극적으로 꼬셔봐야겠는걸.

복장이 바뀌어서 그런지 유미가 예전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헤베와 나나로 꽉 차 있던 내 마음 속에 유미가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다친 사람들은 나나한테 치료 받고, 주문 사용자들은 마력 보충해둬. 정비 끝나면 바로 출발할 거야.”

“이코르는 어떻게 할까? 내가 좀 캐둬?”

내가 일행들에게 지시할 무렵 제이드가 사냥칼을 꺼내며 물었다.

그에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얘기했다.

“이코르 채취는 건너뛰려고. 형도 그냥 숨이나 돌리고 있어.”

여기까지 오느라 시간을 꽤나 소비했다.

아직 새벽녘인 건 변함없지만 머지않아 새들이 활동을 시작할 거다.

적어도 해가 뜨기 전에는 영주성에 도달해야 한다.

영주성에 도달하기 전에 새들과 마주치면 공략이 훨씬 더 지체될 테니까.

가는 길에 확인할 것도 있으니 시간을 맞추려면 아쉽더라도 이코르는 포기해야 한다.

“그래, 시체는 나중에 와서 뒤질 수도 있으니까. 빨리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내 말에 제이드가 무거운 얼굴로 동의했다.

그는 한 시라도 빨리 니아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듯했다.

슬픔 밖에 없는 만남이겠지만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로서 그냥 방치해둘 수 없는 듯했다.

여자친구의 고통을 빨리 끝내주고 싶기도 할 테고.

그리하여 우리는 전리품을 뒤로 하고 지하 감옥을 나아갔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몇 번 더 라미아들과 조우했지만 무리 없이 처치할 수 있었다.

조금 전 대규모 습격과 달리 대부분 한 마리씩 기습하는 정도였다.

기습 위치만 사전에 숙지만 하고 있다면 크게 위험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 다들 저기 좀 봐!”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을 지나길 몇 분, 선두에 있던 안티오페가 활기찬 목소리로 얘기했다.

“빛이야! 출구인가 봐!”

그녀 말대로 복도 끝자락엔 은은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침내 상층으로 향하는 나선 계단에 도착한 것이었다.

“드디어 이 좆같은 데를 벗어나겠네요! 으! 역시 지하 던전은 질색이라니까요!”

출구를 찾자 나나는 환호와 질색을 번갈아 했다.

어둡고 소름끼치는 배경에 크툴루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적들이 연달아 습격해왔으니 싫을 만도 하겠지.

나도 RPG에서 굳이 공포 게임을 경험하고 싶진 않았기에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복도를 벗어나니 넓은 홀이 나타났다.

천장이 높게 뚫려 있는 홀 안은 벽면을 따라 계단이 나 있고 맞은편에는 또 다른 복도가 있는 식이었다.

“천둥새가 저기 갇혀 있던 걸까?”

홀에 도착하자마자 카시아가 맞은 편 복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맞은 편 복도는 눈에 띄게 파괴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발톱 자국이나 시커멓게 탄 흔적도 있어서 딱 봐도 천둥새가 지나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맞아, 저쪽으로 쭉 가면 큰 새장이 나오는데 거기 갇혀 있었어.”

“그렇게 큰 놈이 이 좁은 길에서 활보했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운데.”

이곳에서 벌어졌을 참상을 떠올리며 제이드가 말했다.

우리가 며칠만 더 일찍 출발했다면 그 현장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높은 확률로 속수무책 당했겠지.

“사내가 돼서 뭐 그런 걸로 무서워 하냐? 어차피 그 놈은 해골 뱀한테 물려 죽었을 텐데~”

몸서리치는 제이드를 보며 안티오페가 태연하게 웃었다.

본인도 천둥새 앞에서 쩔쩔 맸으면서 저렇게 태연한 척이라니.

아마 자신이 쫄았던 걸 감추기 위함이리라. 제이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천둥새 보고 기겁하던 녀석이 잘도 말하는구만. 지금도 그놈 다시 나타나면 빽빽 소리 지를 거면서.”

“뭐, 뭐?! 야! 내가 언제!”

지적받은 안티오페는 크게 성을 내며 제이드를 노려봤다.

자기도 모르게 도끼를 들어 올리는 걸 보니 엄청 창피한 모양이다.

“여기서 말싸움할 시간 없어. 살아있는 적도 없어 보이니까 뭐 좀 확인하고 바로 올라가자.”

실랑이 벌이는 두 사람을 채근하며 나는 반대편 복도로 향했다.

원래라면 이곳에서 한 차례 더 전투가 벌어져야 정상이다.

홀 중앙과 올라가는 길에서 옥졸 무리가 일제히 덤벼드는 것이다.

지하 감옥에서 제일 빡센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천둥새가 쓸어버리고 간 영향인지 옥졸들이 죄다 죽어 있었다.

다들 발톱에 찢겨서 장기자랑을 하고 있거나 겉바속촉으로 구워진 것이었다.

천둥새의 탈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반대편 복도를 나아가자 내가 말했던 거대한 새장이 나타났다.

“헤에엑…… 뭔 새장이 이렇게 커요?”

“새장이 아니라 건물 뼈대 같아요…….”

거의 3층 건물만한 새장을 보며 일행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야말로 천둥새 전용으로 만들어둔 것 같은 새장이다.

이 정도 크기라면 용도 들어가겠지.

성문만큼 커다란 새장문은 거칠게 뜯겨 나가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아이템 회수를 시작했다.

천둥새가 머물렀던 곳에는 여러 아이템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건 천둥새의 깃털이었다.

수 십 년 동안 놈이 갇혀 있던 장소라 그런지 금색의 깃털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다들 지금부터 깃털 좀 모아줘. 한 사람 당 서른 개 씩은 있어야 돼.”

“엑, 깃털은 갑자기 왜?”

“화살이라도 만들게?”

내 요구에 안티오페는 황당해 했고 제이드는 깃털 하나를 집으며 물었다.

그에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안티오페를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게 다가오자 나는 안티오페의 몸 곳곳에 깃털을 붙여줬다.

“뭐, 뭐하는 거야? 깃털은 왜 붙이는 건데?”

“일종의 보후구야. 정확히는 새들한테 붙잡히는 걸 방지하는 거지.”

“붙잡히는 걸 방지해?”

의아해하는 일행들에게 나는 좀 더 상세히 설명해줬다.

이제부터 등장할 적들은 대부분 맹금의 기사처럼 자유롭게 비행이 가능하다.

놈들은 주로 낙하 공격이나 납치 같은 공중전을 기본으로 한 패턴을 자주 사용한다.

한 번만 붙잡혀도 하늘 높이 올라가 떨어뜨리기에 새들의 납치 패턴은 무척 위험하다.

자칫하면 그대로 낙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몸에 천둥새의 깃털을 둘러두면 놈들이 납치 패턴을 사용하지 못한다.

깃털에서 흐르는 은은한 전류가 놈들의 접근을 막아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빠짐없이 챙겨. 보스전 직전까지 유용하게 쓰일 거야.”

“으우우…… 이거 왠지 찌릿찌릿한 게 기분 나쁜데.”

“좋게 생각하자구요, 티오 쟝. 깃털이 아니라 전동 로터 붙인 거라고 생각하세요!”

기괴하기 그지없는 나나의 발상에 한 차례 경악하며 일행들은 깃털을 모았다.

그들이 깃털을 모으는 틈에 나는 다른 아이템을 회수했다.

새장 안에는 깃털 말고도 귀중한 아이템들이 많았다.

혈석 조각이 세 개나 나왔고 암브로시아도 하나 나왔다.

거기에 더해 웬 신기하게 생긴 나무 조각상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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