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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감옥
생존력이 높은 니아와 안티오페 역시 위험한 건 마찬가지.
이에 관해 설명하자 일행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숨어서 공격하는 걸로 모자라서 그런 저주까지 건다고……?”
“아주 그냥 양심 빻은 새끼들이네요!”
확실히 종합적인 위험도는 지하 감옥의 몬스터들이 새 인간들 보다 높을 것이다.
새 인간들은 공격 의사를 보이기 전엔 행동하지 않는데다가 정적 마법으로 쉽게 저주를 차단할 수 있다.
허나 이놈들은 직접 공격해서 저주를 걸기 때문에 방어나 회피 외에는 답이 없다.
심지어 공속과 이속도 엄청나게 빠르다.
꼼수가 아닌 순수한 피지컬로 상대해야 하는 놈들인 거다.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야.”
“또 뭐가 문젠데?”
이미 진저리가 난다는 듯 묻는 제이드였지만 난 더 역겨운 사실을 전해야했다.
“놈들은 정신 계열 마법도 사용해. 당하는 순간 본인 의지하곤 상관없이 자살 충동이 일어나는 능력이야.”
“자, 자해 주문을 사용한단 건가요?”
흠칫 놀라며 묻는 유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은 아니지만 비슷해. 특히 유미 너랑 크림힐트는 조심해야 되고. 너희들이 맞았다간 다른 사람들까지 말려들 테니까.”
근접 멤버들은 자해해봤자 자기 혼자 피해 받으면 그만이다.
허나 유미랑 크림힐트 같은 경우 주문을 시전하다가 다른 이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이 자해 능력은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자해하도록 만들기에 필연적으로 범위 주문이 튀어나온다.
유미가 저 좁은 지하 감옥 안에서 원령쇄도라도 썼다간 전멸각까지 볼 수 있을 거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거, 걱정 마세요! 그런 사술에는 굴복하지 않을 거예요……! 할머니가 저랑 함께 해주시는 걸요……!”
불길한 생각 때문인지 유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유미는 웬일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주문과 저주는 그녀의 전문분야다.
거기에 여우신이라는 뒷배까지 있으니 자신을 가질 만도 하다.
실제로 주술사들이 저주나 디버프 관련 저항력이 높기도 하고 말이다.
“나도 멍청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걱정 마.”
크림힐트 역시 차분하게 자신감을 드러냈다.
중거리 공격이 주된 크림힐트는 유미 보다 위험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피지컬을 생각하면 믿을 만하다.
나랑 싸울 때도 패턴이 다소 단조로웠을 뿐이지 상황 판단과 움직임 자체에는 괜찮았으니까.
“아무튼 슬슬 위험한 구간이니까 다들 조심해. 유미랑 크림힐트는 최대한 뒤로 빠지고.”
“네, 스승님……! 조심할…….”
유미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쉬이이이익!]
“히익……?!”
천장에서부터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유미는 서둘러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천장에서 떨어진 적은 이미 유미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슈카아아악!!]
“꺄아아아악!!”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지르는 유미.
절체절명의 순간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머리가 씹히는 일은 없었다.
이 구간의 기습은 이미 다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입을 들이대!”
쐐애액!!
왼손에 맺힌 냉기가 순식간에 비수로 바뀌었다.
그것은 빠르게 내 손을 떠나 습격자에게 날아갔고 총알 같은 속도로 놈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쉬키이이익……!!]
비수에 맞은 반동으로 유미의 옆에 떨어진 습격자.
놈은 땡볕에 나온 지렁이처럼 추하게 발악하다가 끝내 피를 쏟으며 죽었다.
“뭐, 뭐야?!”
“벌써부터 습격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태에 일행들은 당황하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들을 진정시키며 난 유미에게 다가갔다.
“진정해, 그냥 잡몹 하나가 기습한 거뿐이야.”
그리 말하며 유미의 곁을 확인하자 상반신은 뱀이고 하반신은 사람인 기괴한 괴물이 쓰러져 있었다.
그걸 본 일행들은 모두 소름이 돋았는지 몸을 떨었다.
“새 다음엔 뱀이냐…….”
“아니, 왜 상반신이 뱀이냐고요! 보통은 반대 아니에요?!”
제이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시체를 살폈고, 나나는 참 본인다운 불만을 토로하며 발로 뱀 인간을 툭툭 쳤다.
그들이 뱀 인간의 생사를 확인하는 사이 나는 유미의 상태를 점검했다.
“괜찮아, 유미야? 어디 다친 데 없어?”
“네, 네…… 저, 저는 괜찮…… 아, 아앗?!”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미가 안정을 되찾으려던 순간이었다.
“어……?”
나와 유미는 거의 동시에 스타킹이 흠뻑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수도의 물 때문은 아니었다.
스타킹을 적신 액체는 차가운 물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어쩐지 따뜻한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액체는 틀림없이 유미의 실금일 것이다.
가까이 다가갈 때 뭔가 자극적인 냄새가 난다더니 저것 때문이었다.
“스, 스승님…… 이,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실금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유미는 반쯤 울먹이듯이 말했다.
어느덧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고 한껏 오므린 다리는 바들바들 떨렸다.
뭔가 변명을 해보려 했지만 여기서 뭐라 말해봤자 그녀만 비참해질 뿐이었다.
얼마나 부끄러울까.
피치 못한 상황이었다곤 해도 여자애의 마음이 나락으로 내리꽂히는 순간일 거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유미를 진정시켰다.
“시, 신경 쓰지 마 유미야. 깜짝 놀라서 그런 거잖아. 던전 공략할 때는 누구나 그럴 수 있어.”
실제로 뱀 인간의 생김새는 익숙한 내가 봐도 좆되게 무서웠다.
사람과 뱀의 무서운 부분만 골라서 만든 것 같은 외형인데 저런 놈이 갑툭튀 하면 좀 놀라겠는가?
내가 가디스 던전을 VR로 플레이했다면 유미처럼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감대 형성은 유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유미는 아예 울 것처럼 훌쩍이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흐, 흐윽……! 흐그읏……!!”
“어, 어어……?”
긴 앞머리 너머로는 눈물이 맺힌 게 보였다.
어지간히도 수치스러운 모양이다.
내 위로가 전혀 먹히지 않았던 건 덤이고.
“아 진짜 뭐 하는 거야! 그냥 모른 척 해주면 덧나?!”
난처함을 느끼고 있을 때 니아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유미를 내게서 떨어뜨린 뒤 차분한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괜찮아 유미야. 네가 이상한 게 아니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흐으읏……!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누구 남는 옷 있는 사람?”
울먹거리며 사과하는 유미를 니아가 최대한 달래줬다.
니아도 아버지의 일 때문에 많이 심란할 텐데 참 대단하다. 어른스럽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이리라.
반면 제이드는 니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 다른 놈들이 냄새 맡고 오면 큰일이잖아. 여자애 오줌 냄새는 더 자극적이니까 얼른 갈아입는 게 좋을…… 아악!”
퍼허억!
나름 진지하게 의견을 내려는 제이드였으나 그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니아의 메이스가 날아온 것이었다.
“그게 애 앞에서 할 소리냐?! 진짜 어이가 없어서!”
메이스로 제이드의 다리를 후려친 니아가 힐난을 퍼부었다.
그에 제이드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항의했다.
“아니 왜!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아!”
“됐으니까 좀 닥쳐!”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던전에서 냄새 스택을 쌓으면 적들에게 발각되기 쉬워진다.
더럽혀진 옷가지는 그대로 버리거나 냄새가 퍼지지 않는 차원낭에 넣어두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그걸 굳이 유미 앞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맞는 말이라도 가끔은 묻어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한없이 경박한 제이드가 참 한심해 보였으나 동시에 고맙기도 했다.
혐성은 상대적인 거다.
제이드 덕분에 나는 반사적으로 젠틀한 놈이 되었다.
“내거라면 맞을 거야. 이거라도 좀 입혀.”
“아, 고마워 크림힐트.”
제이드를 한창 두들겨 패고 있을 때 크림힐트가 옷을 하나 꺼냈다.
그녀도 나름 상급 모험가인지라 차원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러워진 옷도 크림힐트가 적당히 세척한 뒤 자기 가방에 넣어서 급한 문제는 해결됐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이놈은 뭐야? 얘도 그냥 뱀 인간이라 무르면 돼?”
유미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구석으로 갈 무렵, 안티오페는 쓰러진 뱀 인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놈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정확한 이름은 라미아야. 지하 감옥의 제일 많이 나오는 몹이지.”
“엑…… 라미라고요? 이게요?”
내 설명에 나나가 못미더운 어투로 물었다.
라미아라고 하면 보통 아름다운 여성의 상반신에 뱀의 하반신을 가진 몬스터를 떠올릴 것이다.
비록 사람을 해치는 위험한 괴물이지만 외견만큼은 아름답다는 식으로 말이다.
허나 대충 매체에서 알려진 것과 달리 가디스 던전에선 그런 눈요기 거리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몬스터는 몬스터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있는 건지, 극소수의 여성형 몹들은 제외하면 다들 이렇게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추종자라는 족속들 자체가 기괴함, 흉측함을 기본으로 깔고 가기 때문에 설정을 지키기 위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가 아는 라미아와는 여러 의미로 정 반대인 몹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처럼 벽이나 천장에 붙어서 공격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조심들 해. 말했던 대로 맞으면 저주 쌓이니까 나나는 바로 해주 주문 써주고.”
기습에 특화된 놈들이라 그런지 생명력이나 방어력은 별로 높지 않다.
그래도 공격력만큼은 맹금의 기사와 맞먹는 수준이라 한 대만 맞아도 피가 훅훅 까이고 말 거다.
거기까지 설명하자 나나는 벌써부터 울상을 지었다.
“으으…… 여기서도 존나게 고생하겠네요…….”
“너 덕분에 우리가 사는 거야. 힘내, 나나야.”
제이드가 나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할 때였다.
“그나저나 당신, 아까 썼던 주문은 뭐야?”
“응?”
크림힐트가 갑자기 추궁하듯 물었다.
그제야 나는 일행들에게 새로 얻은 스킬을 설명하지 않았단 걸 떠올렸다.
칼만 휘두르던 내가 갑자기 마법 비슷한 걸 날렸으니 이상하게 보였으리라.
“이번에 새로 얻은 스킬이야. 네가 쓰는 마법하고는 좀 달라.”
“영창도, 마력 소모도 없이 그 정도 냉기를 뿜어내는 건 처음 봐…… 대체 어떤 원리야……?”
대충 설명하고 넘어가려는데 크림힐트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수년 간 냉기 마법을 수련해온 그녀 입장에서 혹한의 비수는 경악할 만한 것이리라.
화승총이나 쓰던 조선시대 엽사들한테 에땁을 보여주는 것과 비슷할 테니 말이다.
“어허, 노예가 말이 많다! 노예 주제에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냐!”
“칫…….”
크림힐트의 질문이 이어지려는 도중 나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끼눈을 뜬 채로 자신과 마주하는 나나를 보며 크림힐트는 혀를 찼다.
맞는 말이라서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듯 했지만 쉽게 물러서지도 않았다.
“노예라도 알 건 알아야지. 무조건 숨기는 게 답인 줄 알아?”
“댁한테는 숨기는 게 당연하죠!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데 우리 정보를 뭐 하러 상세히 알려줘요?”
“어떤 주문인지도 모르고 내 마법과 연계하면 마력 폭발이 터질 수도 있어. 그쪽은 그래도 상관없나 봐?”
날카롭게 지적하는 나나에게 크림힐트 또한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반박했다.
크림힐트가 마신화 스킬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단순 호기심도 있지만 본인 말대로 사고를 예방을 위해서기도 하다.
가디스 던전에는 주문 조합 시스템이라는 게 존재한다.
별 건 아니고 각기 다른 주문을 동시에 사용하면 특수한 효과가 발동되는 협동 시스템이다.
대체로 주문의 효과를 극대화하거나 새로운 효과를 부여해서 이득을 취하는 시스템이지만 무조건 좋은 효과만 있는 건 아니다.
간혹 파티원들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트롤링 효과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크림힐트는 그것을 우려하여 혹한의 비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 한 것이리라.
점점 더 거세지는 신경전 속에 뛰어들어 나나와 크림힐트를 제지했다.
“둘 다 그쯤 해. 같은 편끼리 목소리 높여봤자 좋을 거 없잖아.”
“저 년이 꼴받게 하잖아요! 노예 주제에 존나 꼴리게 생겨 가지고!”
“……네가 이해해. 크림힐트도 나쁜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었으니까.”
뭔가 말이 좀 이상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나나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 말이다.
나나를 적당히 잘 달랜 후 크림힐트에게도 말했다.
“내 스킬이랑 네 주문이 섞인다고 마력 폭발이 일어나진 않아. 그리고 궁금하면 더 친해진 다음에 말해줄게.”
“……알겠어.”
나나도 그렇고 크림힐트도 그렇고 자기들끼리는 엄청 열심히 싸우다가 내가 끼어드니까 쉽게 얌전해졌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뭔가 내 말은 귀 담아 들어줘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다음 루트를 확인할 무렵, 구석에서부터 유미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