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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감옥
찬장으로 걸어간 헤카테는 웬 병을 하나 꺼내왔다.
포션을 담을 때 사용하는 병 같았는데 그 모양이 다소 특이했다.
아니, 얼핏 봐선 병이라기 보단 유리 공예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자줏빛으로 빛나는 그것은 석류열매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뱀이 석류 열매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테이블로 가져온 헤카테는 병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새로 얻은 힘을 사용하려면 몸 안에 내재된 마신의 힘을 직접적으로 소모해야한단다. 이 병은 그 힘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줄 거야.”
헤카테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저것이 바로 마신화 게이지를 회복시키는 아이템, 새벽의 비약이다.
정확히는 비약을 담아내는 병으로서 사용 원리는 넥타르와 동일하다.
넥타르처럼 암브로시아를 주원료로 하여 얼마든지 다시 생성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사용 횟수를 늘리려면 넥타르 병 안에 담긴 암브로시아를 저 병으로 옮겨 넣어야 한다.
“지금은 한 모금 분량 밖에 없지만 네가 가진 암브로시아를 병 안에 넣으면 몇 번은 더 쓸 수 있단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하렴.”
헤카테 역시 그에 관해서 설명해줬다.
비약의 사용 횟수를 늘리면 반대로 넥타르의 사용 횟수는 줄어든다.
허나 나에겐 별로 문제될 게 없다.
나는 가급적 안 맞는 플레이를 선호하는데다가 나나도 있으니 넥타르를 사용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그런 나에겐 넥타르 보다 새벽의 비약이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두 개 정도 옮겨 넣고 싶은데요.”
현재 넥타르의 사용 횟수는 3번.
병 안에 암브로시아가 3개 들어있기에 그렇다.
그 중 2개를 비약 쪽으로 옮기고 나머지 하나는 비상용으로 남겨둘 생각이다.
나나가 있다고 해도 언제나 힐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사시에 쓸 넥타르 하나 정도는 챙겨두는 게 좋으리라.
“그러마. 시간이 좀 걸리니 기다려주렴.”
부탁을 받은 헤카테는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그녀는 넥타르 병 안에 있는 암브로시아를 꺼내서 비약 쪽으로 넣어줬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암브로시아는 황금색 포도 알처럼 생겼다.
병에서 꺼내기만 했는데도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와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헤베에게서 나는 향기랑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리워지기도 했다.
내가 헤베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헤카테는 비약 병에 암브로시아를 옮겨 넣고 다른 작업을 진행했다.
원작 게임과 달리 분배 작업은 비단 암브로시아를 옮겨 넣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작은 절구와 각종 재료들을 가져온 헤카테는 그것들을 곱게 갈아서 암브로시아와 함께 넣었다.
종종 벽난로 쪽에 있는 가마솥까지 사용하는 걸 보면 뭔가 세세한 작업들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원작 게임에선 왜 굳이 헤카테한테 찾아가야 암브로시아를 분배할 수 있나 했는데, 이러한 이유에서였나 보다.
“그러고 보니 헤베는 잘 있니? 못 본지 꽤 꽸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을 지 궁금하구나.”
약재를 갈아 넣는 동안 헤카테가 문득 질문을 건네 왔다.
다른 메이저한 신들에 비해 다소 생소하지만 그녀 역시 엄연히 그리스 신화의 일원이다.
원전 신화 속에선 다양한 방법으로 올림포스 신들을 도왔다고 한다.
가디스 던전에서도 올림포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헤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
설정상 헤카테는 제우스의 스승 같은 존재라는데, 헤베와는 이모랑 조카 같은 관계가 아닐까.
“아이엔 산맥 중턱에 있는 성소를 지키고 계세요. 그곳에서 투사들을 불러 모으며 다가오는 황혼에 대응하고 있죠.”
헤카테의 물음에 나는 선뜻 대답해줬다.
여기서 솔직하게 대답해둬야 헤카테를 성소에서 만날 수 있다.
그녀는 오직 마신화를 해금하기 위한 NPC가 아니다.
마법의 여신인 만큼 다양한 마법 관련 상품들을 취급하는 상인이기도 하다.
무기에 속성을 불어넣는 칼조각이나 각종 유용한 소모품들은 모두 헤카테에게서 구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새벽의 비약 외에도 암브로시아를 통해 다른 유용한 회복 아이템도 제조해주니 필히 성소로 보내야 한다.
“호오, 그런 곳이 있었구나. 다른 신들도 거기 있니?”
“브릴린트 누나가 같이 지내고 있어요. 올림포스 쪽은 아니지만 도깨비들도 있고요.”
“그거 참 반가운 이야기구나. 이곳에서 지낸 지도 꽤 됐는데 슬슬 자리를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네가 찾아오기도 했고.”
성소에 대해서 듣자마자 헤카테는 곧장 흥미를 보였다.
아무래도 아는 얼굴들이 있다 테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
이제 헤카테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성소로 향할 것이다.
성소로 돌아가면 그녀가 태연하게 자기 자리를 잡고 있겠지.
그녀가 성소에서 생활해준다면 이후의 공략도 훨씬 더 편해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신님은 왜 이런 곳에 계신 거죠? 여신님이라도 살기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
헤카테의 이주에 흡족해하던 도중, 문득 오랜 의문이 떠올랐다.
원작에선 헤카테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일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다른 게임들에 비해 친절하다지만 가디스 던전도 일단 소울라이크 장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부분에선 설명이 부족한 것이었다.
질문을 받은 헤카테는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란다. 그저 추모를 하고 있었을 뿐이지.”
“추모라면 혹시…….”
“그래, 저 성 꼭대기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 말이다.”
헤카테의 말뜻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재앙신이 된 아테나를 위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리라.
비록 그녀를 구원할 힘은 없지만 한 때 알고 지낸 사이인 만큼 예우를 갖추려 한 거겠지.
태연하게 말하긴 했어도 헤카테의 얼굴엔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분명 아테나가 재앙신이 되었단 사실이 그녀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비단 아테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들 또한 마찬가지리라.
“아가야, 내가 널 왜 도와주는 것 같니?”
그녀의 심정을 헤아릴 무렵 헤카테가 문득 질문을 건넸다.
그에 나는 불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계승자여서요?”
대답을 듣자마자 헤카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란다.”
어느새 완성된 비약을 건네면서 헤카테는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슬픔과 자조로 점철되어 있는 미소였다.
“지난 10년 동안 아테나는 계속 성 안에서 틀어박혀 있었단다. 이전의 지혜로운 모습은 모두 잃고, 둥지를 지키는 사나운 어미 새처럼 말이야.”
재앙신이 되면 비단 이성만 잃는 것이 아니다.
신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추종자들처럼 인간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괴물이 되고 만다.
아테나는 히로인 보정 덕분에 엄청 추한 모습으로 변하진 않았으나 신들 입장에선 몹시 안타까운 행색을 갖추게 되었다.
“그 아이를 편하게 해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 하지만 일개 마녀나 다름없는 내 능력으론 어림도 없더구나.”
“직접 아테나님을 쓰러뜨리러 가신 건가요?”
“그래…… 물론 영주성 입구조차 돌파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며 이야기하는 헤카테.
이후 그녀는 날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너라면 대신들과 맞서는 것도 가능하단다. 힘을 잃은 여신보다 훨씬 더 쓸 만하겠지…….”
“여신님…….”
헤카테는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게 힘겨워보였다.
허나 그녀는 이윽고 내게 괴로운 부탁을 건넸다.
“그러니 부탁하마. 부디 아테나를 위한 장례를 치러 주렴. 그 아이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과연 그런 이유였구나.
헤카테는 나를 장의사로 쓰고 싶었던 것이리라.
재앙신이 된 신들의 장례를 치러 줄 장의사.
막강한 힘으로 그들을 쓰러뜨린 뒤 안식을 가져다주었으면 하는 거겠지.
그녀의 입장을 이해한 나는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여신님,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그러렴.”
“개인적인 질문이라 언짢으실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아테나님을 위해 헌신하시는 거죠?”
내가 알기로 아테나와 헤카테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혈연관계는 물론 신화에서 특별히 엮이는 일도 없다.
그런데 왜 헤카테는 아테나로 인해 이토록 괴로워하는 걸까.
단지 그녀와 같은 계통의 신이어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내 질문에 헤카테는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아련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테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어미가 없었단다. 제우스가 죽여 버렸거든.”
“왜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얻고 싶었겠지. 그 탓에 아테나는 어미 없이 자라야 했고, 나는 그 모습이 가여워 보모를 자처했단다.”
제우스의 혐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는 이야기로군.
자기 부인을, 그것도 자기 딸을 출산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인을 냅다 죽여 버리다니.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들은 내용만 봐선 제우스가 그냥 희대의 씹새끼로 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연민 때문에 보살피기 시작한 거였는데, 계속 보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이 들더구나.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으면서 모정을 느낀 거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헤카테는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신의 면모도 갖췄다.
가디스 던전은 그 부분을 차용하여 헤카테가 아테나의 보모라고 설정한 듯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정을 주며 돌봐왔을 테니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모녀나 다름없다.
그런 아테나가 재앙신이 되어버렸으니 헤카테가 느낀 상실감과 죄책감도 엄청날 것이다.
괴물 밖에 없는 던전 안에서 생활해온 것도 다 그러한 이유에서이리라.
“그토록 정을 주며 키워서인지 그 아이는 내게 누구보다 소중한 아이가 되었단다……. 다른 그 어떤 신보다 말이야…….”
아테나의 모습을 회상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헤카테는 다시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비록 재앙신이 될 때 지켜주진 못했지만, 하다못해 그 아이가 편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구나……. 부탁이다, 여명의 아이야. 아테나를 해방시켜주렴…….”
헤카테의 석류 알 같은 눈동자에는 어느덧 물기가 차올라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한테 장례라니, 좀 웃기네요.”
“응……? 그게 무슨 말이니……?”
내 말을 듣고 헤카테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헤카테를 위해 나는 차원낭을 뒤졌다.
그 안에서 가죽주머니를 하나 꺼낸 나는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테나님은 아직 추모 받을 입장이 아니에요. 제가 구해드릴 거거든요.”
“……! 그건……!”
주머니 안의 내용물, 푸른색 효안을 보며 헤카테는 아연실색했다.
워낙 차분한 분이다 보니 놀라 자빠지고 그러진 않았으나 충분히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그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거니……? 10년 전 전쟁에서 잃어버린 걸로 아는데…….”
“항상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외곽 쪽 방앗간에 숨겨져 있더라고요.”
“그럴 수가…….”
효안의 출처를 들은 헤카테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양딸의 눈이 고작 그런 곳에 숨겨져 있었으니 어이없어 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테나를 벼랑 끝으로 내몬 건 세트와 그의 군세지만 벼랑 아래로 밀어 넣은 건 눈의 소실이었기도 하고.
“눈도 찾았고, 여신님한테 도움도 받았으니 아테나님을 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예요.”
최강의 전신인 아테나.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단순히 처치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은 해봤으니까.
“그러니 믿고 기다려보세요. 따님을 다시 만나게 해드릴게요.”
* * *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았다.
헤카테의 도움으로 우리는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헤카테의 거처는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새 울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고 제대로 된 잠자리도 있었다.
게다가 여신님이 직접 식사까지 제공해줬으니 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금상첨화.
나는 이미 경험해본 일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인외마경을 생각하고 들어온 일행들에겐 다소 신선한 충격인 듯했다.
“침대에서 자고, 밥도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던전 안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줄 누가 알았겠어?”
“동감이에요. 던전 안에 들어오면 며칠 동안 잠도 못잘 것 같았는데…….”
수저를 흔들며 말하는 제이드에게 유미가 적극 공감했다.
확실히 온갖 괴물들이 들끓는 던전 안에서 이토록 편히 쉴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겠지.
어찌되었든 일찍 일어나 식사를 챙긴 우리는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아직 해가 다 뜨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일행들에겐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다들 저녁 일찍부터 잠들어서 수면 시간 자체는 충분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헤카테가 만들어준 요리에는 특별한 효과까지 있었다.
먹는 순간 잠이 확 깨이고 온몸에 활력이 도는 것이었다.
마법의 여신이라서 그런지 요리도 참 신기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헤카테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신님. 덕분에 마음 놓고 쉴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