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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88화 (18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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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거리의 마녀

정곡을 찔린 나는 멋쩍은 얼굴로 동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 역시 뭘 그렇게 말하느냐는 식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내왔다.

인사차 해 본 말인데 잘 안 먹혔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은발의 여성이 말을 이었다.

“네가 누군지는 이미 다 알고 있단다. 그러니 편히 말하렴.”

“다키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여성의 말에 반응한 건 니아였다.

같이 앞장 서 있던 그녀가 되묻자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에 있는 그 문양은 여명의 계승자라는 증거. 그렇다면 아가는 필히 여명의 투사겠지.”

그녀의 말에 일행들은 나와 은발의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중 나나가 궁금증과 경계심이 반씩 섞인 얼굴로 물었다.

“언니는 누구시길래 다키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아요? 보기에 따라서 엄청 수상한 거 알죠?”

“아니, 나나야…….”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는 나나.

나는 반쯤 시비조로 변해가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여성의 반응을 살폈다.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네가 누군 줄 안다고 말하면 수상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나나와 같은 판단을 내렸는지 다른 이들도 경계하듯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태도 때문에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아닐까 싶었으나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다.

은발의 여성은 조금도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덮으며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차분히 일행과 마주했다.

본인의 담담함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시스루 복장 특유의 음란함만 한층 더 부각되었다.

주위의 광원 때문에 안쪽 속살이 더욱 훤히 비치게 된 것이었다.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성은 잔잔하면서도 상냥한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헤카테, 한 때 마법과 저승의 여신이었단다. 이 아이의 정체를 안 것도 내 과거와 관련되어 있지.”

“헤카테……? 저승의 여신이라고……?”

“그래, 동시에 교차로와 문턱, 건널목의 수호자기도 하지. 잘 부탁하마.”

헤카테의 소개에 일행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어딘가 범상치 않았다.

평범한 이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기척.

여러 신들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아, 이 사람 신이구나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고로 헤카테가 여신일지도 모른다는 건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다.

일행들이 놀라는 부분은 그녀가 신이라는 것이 아닌 바로 그녀의 관장 영역이었다.

신들이 관장하는 영역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 저승은 어지간한 신들은 손도 못 대는 영역이다.

한국 신화의 바리공주, 이집트의 오시리스 등 다른 신화만 봐도 저승을 관장하는 신들은 대체로 다 강력한 대신이지 않은가.

그런 신이 남의 던전에서 책이나 읽고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리라.

일행들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헤카테가 덧붙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존재가 아니란다. 저승의 여신이었다는 것도 전부 옛말이지.”

“그러면 신력을 잃어버리셨다는 말씀인가요……?”

자조하듯 말하는 헤카테에게 유미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헤카테는 선뜻 긍정했다.

“네 말이 맞다, 아가야. 난 오랫동안 숭배 받지 못하여 신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단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래, 지금의 난 일개 마녀와 다를 바가 없어. 신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존재지.”

신들은 추종자들에 의해서 그 힘이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한다.

많은 추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숭배 받아온 신은 여타 지배신들처럼 강력한 권능을 갖는다.

허나 반대의 경우 신력을 점차 잃고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기원전쟁 이후엔 이렇게 신력을 잃은 신들이 상당히 많아졌다는 설정이다.

싸움을 포기한 신들은 영토도, 추종자들도 얻지 못한 채 점차 잊히게 된다.

개중에는 신력의 끄나풀조차 잃어버려 인간처럼 노쇠하고 자연사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다.

헤카테 역시 그러한 신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헤카테가 자기소개를 마칠 무렵 나나가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대단하신 분인 건 알겠는데 그게 다키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건 아니란다. 그저 저 아이의 문양이 뭘 의미하는지 알 뿐이지. 그 문양의 첫 번째 주인과 마주한 적도 있으니 말이야.”

“다키님의 문양이요?”

헤카테의 대답에 나나는 반사적으로 내 왼손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손등 위엔 언제나처럼 푸른색 태양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헤카테와 만나서 그런 걸까, 평소와는 다르게 은은한 빛까지 흘러나왔다.

“저 문양은 한 때 모든 신들을 지배하고 세상에 여명을 가져다준 현자, 솔레이온의 것이었단다.”

“나 그거 들어본 적 있어…… 옛날이야기에 주구장창 나오는 이름이잖아.”

“나도…… 그 사람이 죽으면서 기원전쟁이 일어났다는데…….”

익숙한 이름인지 제이드와 니아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제우스, 오딘 같은 대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들이 과거 세상을 지배했으며 기원전쟁 도중에 사망했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그런데 유독 그들을 소환한 솔레이온은 허구의 존재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만 있어도 대륙을 뒤엎을 수 있는 신들을 수십, 수백 명 지배한 인물이라 하니 믿음이 안 갈 수밖에.

“저 아이가 문양을 가지고 있다는 건 세상을 구원할 재목이라는 뜻이겠지. 여기 온 이유도 아테나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아니니?”

모든 걸 꿰고 있는 헤카테의 말에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놀랐다.

특히나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노르니르 클랜원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대장이 구원자라고……?”

“여명의 계승자라니……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카시아의 경우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여명에 관해서 어느 정도 들어본 눈치였다.

그런 그녀조차 관련 설화를 전부 허구로 취급할 정도이니 이 이야기가 얼마나 잊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일행들이 모두 아연실색하는 와중 나는 헤카테의 물음에 대답했다.

“맞습니다, 여신님. 저희는 아테나님을 저지하고 이상 사태를 끝마치기 위해 왔어요.”

“이상 사태라면?”

“여신님께선 이미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던전 안의 괴물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피해가 속출하고 있고요.”

이상 사태에 관해 설명하며 나는 변이한 다이어 울프나 풀려난 천둥새 등을 덧붙였다.

이곳에서 지내던 그녀라면 뭔가 알지 않을까 하여 꺼냈는데, 그녀에게도 유용한 정보는 없는 듯했다.

“흐으음, 그거 참 이상한 일이로구나. 구속이 제대로 발동했다면 그럴 일이 없었을 텐데.”

구속이란 신들이 던전과 스스로에게 채워놓은 일종의 안전장치다.

기원전쟁 이후 재앙신들이 속출하면서 지배신들은 이에 대응할 필요를 느꼈다.

이미 재앙신이 된 이들은 물론, 언젠가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르는 자신에게도 말이다.

그리하여 이성이 남은 수많은 신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구속의 권능을 발휘했다.

이로써 재앙신들은 던전을 나설 수 없게 되었고, 지배신들 역시 재앙신으로 변모하면 같은 제약을 받게 된다.

“여신님도 짐작 가는 부분이 없으신가요?”

“아쉽게도 그렇단다. 이곳에서 지내고 있긴 하지만 밖으론 잘 안 나가서 말이야. 아니, 어쩌면 그 녀석이 문제인가……?”

내 질문에 대답하던 헤카테는 문득 마음에 걸리는 점을 찾았는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이라고?’

수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게임으로 따지면 어떻게 봐도 흑막의 떡밥이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려서 질문하려고 했으나 헤카테가 더 빨랐다.

그녀는 ‘뭐, 그럴 리는 없겠지’ 라며 자기 혼자 납득해버리곤 우리에게 말했다.

“그보다 쉴 곳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문득 화제를 돌린 헤카테에게 마저 질문할까 했으나 동료들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맞아요, 여신님! 아량을 베풀어주신다면 저희 모두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염치없지만 하룻밤만 묵을 수 있을까요?”

나나와 니아가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다른 이들도 은연중에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연이은 전투 때문인지 다들 한 시라도 빨리 쉬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도울 수 있지. 편히 쉬렴. 너희가 쉴 방은 위층에 마련해주마.”

“위층이라고요?”

“여기 2층이 있던가……?”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행들.

생각해보면 이 집은 위층이랄 게 딱히 없는 1층까지 건물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위로 올라가는 계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보면 안단다.”

딱!

이를 거듭 확인한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헤카테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음 순간 집을 이루고 있던 나무줄기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거실 한 쪽에 계단이 만들어졌다.

위쪽에서도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건물 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뭐, 뭐야……?”

“지, 집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어요……!”

실시간으로 바뀌는 구조를 보며 우리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한동안 나무뿌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더니 이내 헤카테가 작업이 끝났음을 고지했다.

“다 됐단다, 방은 인원수대로 만들었으니까 좋을 대로 쓰렴.”

“순식간에 집을 개조해버리다니…… 역시 여신님이구만.”

“와, 와 감사합니다, 여신님! 손수 리모델링까지 해주시고 서비스 좋으시네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다들 한순간 넋을 잃었으나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아늑한 집을 보다 쾌적하게 쓸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각각 감사 인사를 올린 일행들은 들뜬 마음으로 2층으로 향했다.

마음 편히 쉴 공간이 생겨서 모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새로 생긴 층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헤카테가 날 불러 세웠다.

“아가야, 너는 잠시 나랑 이야기 좀 나누자꾸나.”

“저랑 여신님 만요?”

“그래, 그편이 더 좋을 것 같구나.”

느닷없는 요구가 조금 의아했지만 순순히 따랐다.

안 그래도 그녀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다. 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이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주니 오히려 반가울 따름이었다.

“다키님, 안 오세요?”

“우리 먼저 올라간다, 대장~?”

내가 안 오고 있음을 눈치 챈 나나와 안티오페가 고개를 쑥 내밀며 물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손짓 하면서 테이블에 착석했다.

“먼저 가서 쉬고 있어. 여신님이랑 얘기 좀 하다 갈게.”

“앗, 무슨 얘긴데요?!”

“너는 옆에 없어도 되는 얘기…….”

단둘이서 얘기한다고 하자 나나는 또 이상한 상상을 떠올렸나 보다.

헤카테 앞이라 직접적으로 음담패설을 내뱉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미 히토미가 켜져 있었다.

괜히 질질 끌었다간 또 이상한 소리를 하게 될 거다.

나는 안티오페에게 눈치를 주며 그녀를 끌고 가라 지시했다.

다행히 안티오페는 내 의사를 알아들었고 나나를 반쯤 연행하듯 끌고 갔다.

“재밌는 동료를 두었구나. 평소에도 저러니?”

나나가 올라갈 무렵 헤카테가 미소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순간 당황스러웠으나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뭐…… 애 자체가 활발한 편이긴 하죠.”

“그거 말고. 너와 내가 교미하는 걸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데.”

“네, 네……?”

깜빡이도 켜지 않고 들어온 직설에 나는 이번에야 말로 당황을 터뜨렸다.

이 여신님 뭐지?

나나가 좀 변태 같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것만 보고 저 녀석 생각을 다 꿰뚫어봤단 말이야?

참 어마어마한 안목이다.

같은 저승신인 바리하고는 연륜부터가 달라보였다.

“부,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쟤가 좀 이상한 애거든요. 제가 나중에 잘 타이를 테니까…….”

“아아, 괘념치 말거라. 딱히 기분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부탁한다면 들어줄 생각도 있었고.”

“네?”

머리 위에 뭔가가 쿵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람? 제대로 들은 건 맞나?

혼란스러움을 느낀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헤카테에게 물었다.

“부탁을 들어준다니…… 그게 무슨…….”

“교미를 말한 거란다, 교미. 아, 인간들 사이에선 섹스라고 하니? 어쨌든 나도 해본 적이 없어서 들어줄 의향이 있다는 얘기였단다. 관심도 있고.”

이게 과연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할 말인가 싶었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순진무구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교미니 섹스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다니.

정황상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 같진 않은데 너무나 당당했다.

아니 당당한 걸 넘어서 포용력이 좋다고 봐야 하나.

내가 이 자리에서 옷을 벗어달라고 하면 고민하지 않고 벗을 것만 같았다.

“저 여신님……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 좀…….”

“응? 왜? 장성한 남녀는 만나자마자 교미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순수하면서도 원시적인 사고방식에 나는 그만 감탄을 하고 말았다.

부모가 야애니로 성교육을 하면 이런 사고를 가진 여성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대체 누가 저승과 마법의 여신의 사고방식을 이런 식으로 망가뜨렸단 말인가.

“그건 누구한테 들은 얘긴데요……?”

“제우스한테.”

씨바, 그럼 그렇지.

============================ 작품 후기 ============================

이틀이나 말없이 쉬어서 죄송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내일은 가급적 연참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곘습니다. 다들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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