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84화 (184/217)

184====================

성벽을 넘어서

‘형벌의 목걸이라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이템이다. 효과 자체도 생소하다.

몬스터들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주변 몬스터의 공격성을 극대화하는 효과라니.

몬스터의 디버프 능력이라면 모를까, 원작에선 이런 효과를 가진 아이템은커녕 비슷한 것조차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야.’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왼팔을 바라보았다.

이 느낌, 게임 세계에 온 첫날에도 받은 적이 있다.

또 다른 보상 상자에서 검은 산양의 뿔을 꺼낼 때와 똑같은 기분이다.

내가 모르지만 확실하게 효과가 명시되어 있는 아이템.

그렇다면 또 다시 DLC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DLC에선 인면조들이 이런 아이템을 떨굴 예정이었습니다, 라고 하면 이야기가 간단해질 거다.

허나 나는 그것이 정답이 아니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라? 다키님 이 아이템 효과 있는데요……? 북방의 이교도들이 뭐시기……,”

“……그래, 아무래도 DLC 아이템 같아. 원래라면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아이템이야.”

나나가 다시 짚어준 부분을 읽으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북방이라 하면 틀림없이 율리아나 북쪽 너머의 설원지대를 말하는 것이리라.

원작 게임에선 개발 기간의 문제로 언급만 되었을 뿐 실질적으로 구현된 지역은 아니었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당장 트롤 슬레이어들이 사용했던 무기는 북방에서 만들었다는 설정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여기가 율리아나 최남단이라는 것이다.

당장 같은 나라인 율리아나 북부까지 가기 위해서도 몇 주는 족히 걸리는 곳이다.

그런데 북방의 이교도들이 만든 목걸이를 장원의 몬스터, 정확히는 아테르니아의 주민이었던 자가 걸고 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타 지역의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는 몬스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아이템과 몬스터지 않은가.

만약 이것이 개발진의 의도였다면 설정 붕괴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무언가를 의심해야 한다.

이를 테면 누군가가 일부러 인면조에게 목걸이를 걸어줬다거나.

“헤엑…… 그러면 저희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있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다른 동료들 몰래 추측을 공유하자 나나는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의 의견에 나는 고민스럽게 답했다.

“거기까진 모르겠어…… 제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될 것 같아.”

북부는 엄청 멀고, 장원은 10년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있는데 평범한 NPC가 북방에서 목걸이를 구해 인면조에게 걸어줬다는 걸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

허나 또 다른 플레이어가 있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대체 뭐 하러 인면조에게 목걸이를 걸겠는가?

아니, 이유를 따지기 이전에 인면조가 얌전히 목걸이를 받아줬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의문은 커지고 답은 점점 멀어져갔다.

“천둥새도 원래 밀밭까지 못 나오는 몹이라면서요. 그럼 누가 몹 가지고 장난질 치는 거 아니에요?”

내 대답에 나나가 확신에 찬 어투로 반박했다.

그녀 말도 일리는 있다. 굳이 경계를 삼갈 필요도 없고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나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한테 우호적일 가능성은 낮겠지.”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가뜩이나 빡센 던전인데 이상한 놈이 방해까지 하면 큰일이잖아요.”

고의일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미 두 번이나 방해를 받아왔다.

어디까지나 몬스터로 장난질 치는 플레이어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지만 말이다.

만약 그 사람이 작정하고 우리를 노린다면 큰 위험이 따르리라.

“그래, 내가 잘 경계할 테니까 나나 너는 지원하는 데만 집중해. 너무 걱정하진 말고.”

“알겠어요, 다키님! 다키님만 믿을게요~”

나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나나는 애교스럽게 달라붙으면서 어깨를 비벼왔다.

애교 부릴 때는 참 귀여운 앤데 말이야.

이렇게 귀여운 애가 어쩌다가 광기어린 변태가 되어버린 걸까.

새삼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도 나는 전리품 회수에 집중했다.

수상쩍은 흔적을 발견하긴 했지만 다행이 근처에 다른 적들은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죽은 인면조로부터 마음 편히 이코르를 뜯어낼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안 주는 새 인간들과 달리 이놈들은 그래도 썩 커다란 이코르를 뱉었다.

“이것 좀 봐! 이놈들 이코르 크기도 크고 빛도 강해! 이 정도면 1000아웬은 거뜬히 받겠는데!”

갓 뜯어낸 이코르를 확인하며 제이드가 쾌재를 불렀다.

1000아웬이면 어지간한 몬스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높은 이코르란 뜻이다.

놀의 이코르가 고작 50아웬.

미니 보스로 분류되는 와호의 이코르조차 500아웬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 가치를 실감할 수 있을 거다.

던전에서 줄곧 살아온 놈들인 만큼 이코르가 발달한 것이겠지.

이래서 던전이 돈이 되는 거다.

인면조처럼 약한 몬스터만 몇 마리 잡아도 벌써 35000아웬이 넘는 거금을 벌었으니 말이다.

“여기 온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이 정도 수입이라니~ 매일 여기만 오고 싶다~”

생생한 이코르에 뺨을 비비며 안티오페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평범한 장기하고는 다르다 해도 인면조 몸속에서 꺼낸 건데, 거기에 잘도 얼굴을 비비는구나.

뭐, 아마조네스는 피와 살육으로 흥분하는 변태 사이코패스 종족이니 새삼 놀랄 것도 없다.

저걸 생으로 씹어 먹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설정집에 말하길, 일부 아마조네스는 야만족 전사들이 적의 생간을 씹어 먹듯 처치한 몬스터의 이코르를 취한다고 한다.

그게 신체의 원초적인 힘을 강화시켜준다고 믿어서라고 했나, 아무튼 부족 전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보면 꽤 끔찍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안티오페의 부족엔 그런 문화가 없는 듯했다.

“그러면 어디 한 입~ 아앙~”

“야! 전리품 함부로 먹지 마!”

내가 안심하자마자 안티오페는 입맛을 다시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걸 본 나는 재빨리 안티오페에게 달려가 그녀의 이코르를 가로챘다.

“앗! 뭐야 대장?! 왜 남이 먹는 걸 뺏고 그래?!”

“왜 그러긴, 계약 조건 잊었어? 이중에 네 몫은 없는 거 몰라?”

안티오페의 불만을 묵살하며 나는 이코르를 차원낭 안에 넣었다.

먹을 것을 빼앗긴 그녀는 볼을 크게 부풀리더니 분개하며 소리쳤다.

“내, 내가 무슨 닭인 줄 알아? 아까 했던 말도 잊어버리게?!”

“그러면 왜 몰래 집어 먹으려 한 건데?”

“이잇!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노예라도 먹을 건 먹어야지!”

이코르가 어떻게 먹을 거냐.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느끼며 안티오페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코르를 빼앗은 이유는 내 수익을 챙기기 위해서라기보단 안티오페의 괴악한 식성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더군다나 여기 있는 인면조들은 한 때 사람이었다.

그들의 장기를 먹는 건 식인과 별 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아마조네스인 안티오페는 식인조차 개의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걸 직접 보고 싶진 않았다.

“마, 맞아요! 이코르는 먹을 게 아니에요! 사자의 시신을 먹는 건 천벌 받을 짓이에요!”

내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을 때 유미도 조심스레 거들었다.

유미는 이코르를 회수하는 내내 인면조들의 극락왕생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옆에 있던 동료가 그 시체를 씹어 먹으려고 하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겠지.

“으으…… 알겠어! 안 먹으면 되잖아! 꼴랑 이코르 하나 가지고 치사하게…….”

온몸으로 불만을 표현한 안티오페였으나 그녀는 결국 이코르 포식을 포기했다.

다소 찍어 누르듯 이야기해서 그럴까, 그녀의 얼굴엔 분한 기색도 있었다.

그래도 자기 입장을 알아서인지 더 이상 말대꾸 하지는 않았다.

단순해보이면서도 은근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다.

그걸 본 나는 피식 웃으며 안티오페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너무 아쉬워하진 마. 나도 진짜 무상으로만 굴릴 생각은 없으니까.”

“흥! 그러면 어쩌려고? 우리는 노예라서 전리품 분배도 안 해준다면서?”

“너희가 잘만 해주면 노예 취급할 필요도 없지. 계속 지금처럼만 해. 그러면 못해도 너희가 한 만큼은 떼어줄 테니까.”

안티오페 뿐만 아니라 크림힐트, 카시아를 보며 말하자 그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깜짝 놀랐다.

특히 안티오페는 눈을 반짝이면서 내게 되물었다.

“저, 정말이야 대장?!”

“이런 걸론 구라 안 쳐. 너처럼 잘 싸워주는 파티원한테 그 정도도 못 해주면 내가 양아치인 거지.”

“그, 그런가아아~? 하, 하긴! 내가 좀 하지이~! 아하핫!”

가볍게 칭찬까지 건네주자 안티오페는 헤벌쭉한 표정이 되어선 머리를 긁적였다.

이 녀석도 브릴린트 누나처럼 칭찬에 약한 모양이다.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다루기는 쉬운 녀석이군.

그 점이 귀여워서 더 마음에 든다.

처음 만날 때부터 요염한 아마조네스를 가장했으면서 속은 어린애 같았던 것이다.

내가 안티오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카시아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 누나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우리는 너희들을 위협했었는데…….”

마냥 좋아하는 안티오페와 달리 카시아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모양이다.

뭐 크림힐트가 벌인 만행은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하다.

내가 설령 노르니르 클랜에 들어간다 해도 절대 잊지 않을 거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일과 보상 분배는 다른 이야기다.

원한이 있다고 이걸 계속 키우면 좋을 게 하나 없다.

언젠가는 펑 하고 터져서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던전 공략 도중이지 않은가.

과거에 있었던 분쟁 보다는 팀워크와 사기를 우선시해야 할 때다.

내가 계속 노예 취급만 하고 아무런 보상도 없을 거라 못 박아두면 세 사람이 과연 열심히 싸울 수 있을까?

스쿨드의 명령이 있다 해도 사람의 심리상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반면 내가 계속 그녀들을 인정해주고 화해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면 그녀들은 자진해서 공략에 임할 거다.

보상 분배는 비단 그녀들 좋으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보다 확실하고 안정적인 공략을 위한 투자인 것이다.

“누구 씨하고 다르게 난 그 일로 계속 왈가왈부할 생각 없어. 지금은 서로 챙겨주기도 바쁘잖아. 안 그러냐, 크림힐트?”

“읏…….”

지목 받은 크림힐트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얼음장 같은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지는 게 보였다.

계속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지만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리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전리품 회수가 끝났다.

일행들이 모은 이코르는 니아가 받아서 내 차원낭 안에 넣어줬다.

“자, 여기. 다 합쳐서 딱 35개야. 다행히 훼손된 건 없더라고.”

“수고했어, 누나. 던전 끝나고 나눠줄게.”

“그래, 그래. 그나저나 이렇게 전리품 회수나 하고 있어도 되는 거야? 빨리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니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무리하게 진행해봤자 다굴 밖에 안 맞아. 갈 수 있는 길은 뚫어 놓되 천천히 진행하는 게 좋지.”

“그렇지만 한 곳에 계속 있다가 다른 놈들이 더 오면 어떡해? 여긴 몬스터도 많잖아.”

니아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자기 위치에서 잘 벗어나지 않지만 그 중 일부는 맵 전체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게임 세계의 영향도 있으니 그런 순찰형 몬스터들 외에 더 많은 개체가 장원 안을 자유롭게 활보할지도 모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설령 온다 해도 단체로 몰려다니진 않을 테니까. 소수로 배회하는 놈들은 우리끼리 충분히 처치할 수 있어.”

몬스터들의 대규모 이동을 유도하려면 건물이 무너질 정도의 굉음이 나야할 것이다.

그게 아닌 이상 위험한 적들이 우르르 몰려들 일은 없다.

내 이야기를 들은 니아는 불안해하면서도 수긍했다.

“알겠어, 그럼 물건만 찾고 안전지대로 가는 거지?”

“응, 거기서 하룻밤을 보낼 거야. 본격적인 공략은 내일 새벽부터 하자.”

가방을 고쳐 메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들은 나를 따라 방앗간 쪽으로 걸어갔고 니아는 확실히 알아두기 위해 질문을 이었다.

“새벽이라면 몇 시쯤?”

“오전 5시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 그때는 새들도, 다른 정예 몬스터들도 똑같이 졸릴 시간이거든.”

새벽 5시는 주행성인 잡몹들에겐 이른 새벽, 야행성인 정예들에겐 늦은 밤이다.

즉 잡몹과 정예를 가리지 않고 장원 몬스터의 활동이 가장 적어지는 시간인 것이다.

그때 움직이면 귀찮은 적들을 대부분 스킵하고 본성까지 직행할 수 있다.

‘인원도 자원도 놈들을 다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적들은 가급적 무시해야 한다.’

늘 말하지만 가디스 던전은 몬스터를 많이 잡는다고 좋은 게임이 아니다.

스킵할 수 있는 전투를 최대한 스킵해가면서 한정된 자원으로 적들을 돌파하는 게 던전 공략의 핵심이다.

자잘한 구간들을 제쳐도 갈 곳은 많다.

고작 8명이서 장원 곳곳을 정벌하는 것도 힘드니 일단 아테나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진행하는 게 좋으리라.

일행들에게 공지한 뒤 나는 앞장서서 방앗간에 발을 들였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기 전, 나나와 니아를 차례대로 가리킨 뒤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안쪽에는 나랑 나나, 니아 누나만 들어갈게.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대기해.”

“하긴, 저 좁은 데 여럿이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적들이 더 올지도 모르고요.”

내 판단에 동의한 일행들은 밖에서 정비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유미 말대로 다른 적들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니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뭐, 유미의 신내림이 있다면 기습당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나머지 일행들을 밖에 두고 나와 두 사람은 방앗간 내부로 진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