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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넘어서
어떻게 보면 성상납을 요구 받은 건데 안티오페에겐 불쾌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본인이 더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마조네스는 성에 매우 개방적인 종족 중 하나다.
엘프들처럼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종족이기까지 해서 항상 남자를 갈구한다.
더군다나 그녀들이 남자를 구할 때 보는 1순위 조건은 다름 아닌 무력.
이미 몇 번이나 강함을 증명한 내가 안티오페에겐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결국 안티오페에겐 나와 몸을 섞는 건 몸보신 밖에 되지 않는 거다.
“아니면 이따가 안전지대에서 한 판 할래? 괴물들은 거기 못 들어간다며?”
“뭐, 뭐?”
급기야 안티오페는 던전 안에서 떡을 치자는 망측한 제안까지 꺼냈다.
확실히 내가 휴식처로 삼을 안전지대는 몬스터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하다.
그곳에도 여신상이 놓여 있으니 잠을 자던, 섹스를 하던 도중에 공격당할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 그런 일을 하다니.
이건 정신이 해이해진 거다. 나는 진중한 어조로 따끔하게 말했다.
“장난은 장난으로 끝내. 던전에서 뒹굴자는 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는 소리야?”
“뭐 어때서 그래~ 욕구가 쌓이면 싸움도 잘 안 되는 법이라고~ 사기 증진도 되고 좋잖아! 언니랑 크림도 그렇게 생각하지~?”
한껏 진지하게 말해도 안티오페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당당하게 반론해서 그녀 말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다.
얼떨결에 질문의 대상이 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안티오페에게 대답했다.
“으으음…… 티오 말도 맞지만 지금은 다키 씨가 리더니까, 리더가 하란 대로 해야지.”
“난 관심없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말하는 크림힐트와 달리 카시아는 잠시나마 고민하는 기미를 보였다.
끝내 내 말을 따라야한다는 식으로 얘기했으나 안티오페 말에는 적극 찬성하는 것이었다.
“사기 증진 보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해. 그러니까 던전 끝날 때까진 이상한 생각 접어. 나나 너도.”
카시아까지 설득하려 들기 전에 나는 선을 그어뒀다.
그러자 안티오페는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히힛, 결국 싫단 소리는 안 하네? 대장도 내가 마음에 들었단 얘기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나머지는 던전 끝난 다음에 천천히 얘기해보자구~”
내 반박을 들어줄 생각도 안 하고 안티오페는 공략 후의 만남을 확정지어 버렸다.
솔직히 안티오페 같은 구릿빛 피부의 미녀가 떡치자고 하면 난 거절할 이유가 없다.
가슴도 나나 못지않게 크고 배에는 예쁜 복근도 있는 몸짱 미인이다.
처음 볼 때부터 나 역시 적잖은 성욕을 느꼈는데 저쪽에서 먼저 대시를 해오다니.
여기가 던전만 아니었어도 곧장 그럼여! 하고 바로 따라갔을 거다.
“으, 으흠…… 끝나고 뭘 할지 얘기하는 것도 좋은데…… 지금은 일단 저기 좀 볼래?”
“앗, 떡치는 얘기하다 보니 방앗간이!”
니아의 말을 듣곤 나나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한동안 대열을 유지하며 걸은 우리는 마침내 방앗간 앞에 도착했다.
물레방앗간이어서 물가에 있었으며 주위에는 키 큰 나무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자라 있었다.
저 나무들도 오랜 시간 버려진 흔적이리라.
자세히 보니까 건물 자체도 나무에 반쯤 집어삼켜져 있었다.
“그런데 저거…… 새 인간 아니야?”
방앗간까지 약 100미터 정도 남았을 때 제이드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뒤늦게 적의 존재를 확인했다.
“어? 그러게. 뭐가 엄청 많은데?”
“나무 주위에 몰려 있어요.”
적이 있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후엔 누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세를 낮춘 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우리 주위엔 몸을 가릴 나무와 폐허가 많이 있었다.
몸을 숨겨서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놈들의 모습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이드가 확인한 건 분명 새 인간이었다.
허나 이번에 나타난 놈들은 거리에서 만났던 놈들 보다 더 기괴하게 생겼다.
무너진 건물 곳곳에 내려앉은 거대한 새들은 크기가 어린아이만큼 큰 괴조였다.
그것만으로도 평범한 새와 충분히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놈들의 가장 해괴한 부분은 바로 얼굴이었다.
몸은 새인데 얼굴은 사람의 것이었다.
멀쩡한 사람도 아니고 기분 나쁘게 생긴 노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인면조라…… 확실히 이 근방에서 자주 나오긴 하지. 수가 이상하게 많은 거 같지만…….’
불쾌한 골짜기의 표본을 보여주는 저 새의 이름은 인면조.
이름답게 새의 몸과 인간의 얼굴이 합쳐진 몬스터다.
[끼케엑! 끼기기기긱!!]
[케흐윽……! 케흐으으윽……!!]
방앗간 주위를 점거한 놈들은 괴악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의사소통이라고 해야 할까.
정확히는 여러 놈들이 한 놈을 못 살게 굴고 있었다.
이빨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퀴면서 집단 폭행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몬스터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은 있는 법이구나.
내가 그 모습을 보며 신기해할 때, 일행들은 하나 같이 표정을 구겼다.
“으에엑…… 씹극혐…….”
“아까 본 놈들보다 더 끔찍한 놈들이 나올 줄이야.”
“진짜 징그럽게 생겼다…….”
나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욕설을 내뱉었고 제이드나 니아는 너무나 흉측한 외관에 감탄까지 터뜨렸다.
나 역시 실물로 본 인면조의 모습이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생긴 건 무슨 이토 선생님 공포 만화에 나올 것 같이 생겼는데 울음소리도 끔찍하다.
나나가 유난히 혐오하는 이유도 저 울음소리 때문일 거다.
마음 같아선 엮이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놈들이 방앗간 주위를 에워싼 이상 전투를 불가피할 듯하다.
“수가 꽤 많은데……. 보이는 녀석들만 서른은 넘어.”
“아까 그 놈들하고 다르게 이리저리 퍼져 있고.”
“그래도 우리를 보진 못하는 것 같아. 얼굴이 노인이어서 시력도 안 좋은 걸까?”
인면조의 위치를 확인한 제이드와 카시아가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카시아의 말대로 인면조는 인식 범위가 좁은 편이다.
거기에 엄폐물에 숨기까지 하면 저쪽에서 우릴 먼저 발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호구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저놈들이 인식 범위가 좁은 이유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 놈 떨어뜨리고 시작하기엔 좋을 거 같은데…… 그걸론 부족할 거 같지?”
화살을 시위에 걸며 제이드가 물었다.
현재 우리는 폐허 뒤편에 숨어 있다.
지리상 새들에겐 절대 보이지 않는 위치다. 기습을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기습하기 좋은 여건인 건 아니다.
새들이 앉아 있는 곳은 지붕 위.
게다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도 아니라 한 번에 상대하기 힘들다.
건물의 층수가 높아서 명도참 같은 범위기로 정리하는 것도 무리다.
원래 같았으면 무조건 돌진해서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있다.
궁수 둘에 마법사까지 있는데 뭐 하러 그러겠는가?
놈들의 위치를 살핀 나는 최적의 장소를 선정했다.
인면조들을 한 곳에 모을 장소를 말이다.
“엘프 누님, 바람의 정령도 다룰 수 있죠?”
내 물음에 카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어딘가 불만이 있는 어투로 이야기했다.
“누님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좋지만 내 이름은 카시아야. 기왕이면 카시아 누나라고 불러줄래?”
“네……?”
쓸데없는 부분에서 완강해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 저렇게 누나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는 걸까.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졌지만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 그냥 원하는 대로 해줬다.
“그, 그래요 카시아 누나. 저도 그럼 다키라고 불러줘요.”
“우후훗, 좋아. 그렇게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어.”
내 말에 카시아 누나는 좋아라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진짜 노르니르 쪽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다들 어딘가 좀 이상한 거 같다.
“어쨌든 바람의 정령으로 놈들 좀 유인해줘요. 그 다음엔…….”
“날지 못하도록 기류를 조종하면 되는 거지? 맡겨줘. 누나가 잘 해볼게.”
금세 내 의도를 파악한 카시아는 곧바로 바람의 정령을 불러냈다.
“바람의 아이야, 내 부름에 답해다오.”
휘이이이잉!
카시아가 허공에 손을 뻗으며 말하자 곧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회오리처럼 모여든 바람은 어느덧 자그마한 소녀의 형상을 취했다.
소녀라고 해서 뭔가 귀여운 여자애 같은 모습을 취한 건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바람이 억지로 사람의 형상을 취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녀가 정령을 부르는 걸 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면 놈들은 한동안 날지 못할 거예요. 그동안 크림힐트 네가 광역 마법 한 번 써주면 쉽게 정리될 거야.”
“……알겠어.”
지시 받은 크림힐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빠르게 영창을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어느 정도 냉기가 모여들 무렵, 나는 카시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바람의 아이야!”
휘이이이잉!!
손으로 사인을 그리자마자 카시아가 정령을 보냈다.
[휘잇~ 휙휙휘이익~ 휘이잇~]
방앗간으로 날아간 바람의 정령은 휘파람을 불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람 그 자체가 내는 휘파람 소리는 무척 신비롭고 아름다웠으나 인면조들에겐 그렇지 않은 듯했다.
[호로로로로로롯!!]
[휘꺄아아아아악!]
정령의 소리를 들은 인면조 무리는 고기 덩어리를 발견한 독수리 떼처럼 일제히 정령을 향해 날아갔다.
어떻게든 소리의 근원을 파괴하려는 듯했다.
[끼케에에에에엑!!]
[끼기이이익! 휘끼이이이익!!]
기괴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발톱을 들이미는 인면조들.
놈들은 우리가 판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인면조들이 모이자마자 바람의 정령이 곧장 소용돌이를 일으켜 놈들을 추락시킨 것이다.
[케흐으으으윽!!]
[키께엑! 케에에에엑!!]
바람을 일으키자 수십 마리의 인면조들이 쪽도 못 쓰고 떨어졌다.
놈들이 다시 비행하기 위해 날갯짓을 하는 순간, 지면에서부터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곧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놈들을 관통했다.
카각! 카가악!!
카가가가각!!
[케흐윽……!]
[키이익……!!]
얼음송곳이 놈들을 덮치자 약 30마리 정도의 인면조 무리는 허무하게 전멸하고 말았다.
생명력이 500은 되는 놈들이었으나 크림힐트의 마법 데미지가 그 수치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잘했어 크림! 카시아 언니! 제대로 먹혔네!”
절명하는 인면조들을 보며 안티오페가 쾌재를 불렀다.
다른 이들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쉽게 해결되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주위를 경계하며 인면조 무리에게 다가간 우리는 확인 사살을 하며 시체를 뒤졌다.
“장원이라고 해서 쫄았는데 생각보다 별 거 아니잖아? 이 녀석들 엄청 약한데?”
“너무 좋아하진 마. 약한 건 이놈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보다 의욕적으로 변한 제이드를 보며 나는 잔인한 사실을 전했다.
인면조는 지혜 잃은 장원에서 최약체로 평가되는 몬스터다.
비행 능력이 성가시고 새 인간들처럼 저주 수치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 위험도가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 현저히 낮다.
많이 몰려다니는 것만 제외하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몬스터인 것이다.
‘이 숫자는 나라도 좀 힘들겠지만.’
제이드에게 말하며 인면조들의 머릿수를 확인했다.
대충 세어봤는데 35마리나 됐다.
보통 이놈들이 10마리씩 몰려 다니는 걸 생각하면 세 배 이상 되는 숫자인 것이다.
‘현실성 때문에 더 많이 몰려다니는 건가? 아니면…….’
어디선가 주워들은 지식인데 새는 군집 생활을 좋아한다고 한다.
동네 공원 같은 데만 가 봐도 비둘기들이 떼 지어 몰려 있지 않은가.
인면조 역시 그러한 습성 때문에 더 많은 무리를 형성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인면조들의 수가 마음에 걸렸다.
던전 밖에서부터 나타난 천둥새도 그렇고, 이놈들도 그렇고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이 났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이렇게 구성해놓은 것 같았다.
묘한 기분으로 확인 사살을 이어갈 때였다.
“어?”
인면조들 중 유독 이상한 개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찝찝함을 느끼며 그것을 살펴봤고, 그런 나에게 나나가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다키님? 뭐 특이한 거라도 있어요?”
“응? 아니, 이걸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나나의 질문에 나는 순간 뭐라 대답해야할지 고민했다.
원작 게임을 플레이한 내 입장에서만 이상한 거지, 다른 사람 눈에는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나나는 더 궁금하다는 듯 나와 어깨를 맞댔다.
“뭔데 그래요~ 저한테도 한 번 보여주세요!”
“별 건 아니고…… 웬 목걸이를 찾았어.”
“목걸이요?”
궁금해 하는 나나에게 나는 인면조 목에서 발견한 목걸이를 보여줬다.
보석이 아닌 기이한 나무 인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주술적인 느낌이 강한 목걸이였다.
그걸 본 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이게 어때서요, 다키님?”
“내가 아는 장신구가 아니거든. 인면조들이 이런 목걸이를 하고 다닌단 얘기도 못 들어봤고.”
“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나나는 그제야 내 의문을 이해했다.
게임에 관해 전부 꿰차고 있는 내가 모르는 게 있다면 그건 확실히 이상하니까.
허나 그녀는 곧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얘들이 무조건 게임 아이템을 걸고 있으란 법은 없잖아요. 그냥 생전에 걸고 있었던 장식품일 수도 있죠.”
“역시 그렇겠지?”
나나의 말에 나 역시 맞장구를 쳤다.
여기 있는 인면조들은 전부 아테르니아의 주민이었던 이들이다.
흉측한 모습이 돼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으나 살아생전엔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생활을 누렸을 거다.
그런 이들이 목걸이 하나 정도 하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물론 디자인은 좀 특이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목걸이를 버리려던 찰나였다.
눈앞에 아이템창이 떠올랐다.
“어……?”
형벌의 목걸이.
북방의 이교도들이 명예롭지 못한 범죄자에게 걸어줬다는 불쾌한 목걸이. 착용 시 주변의 몬스터들을 끌어 모으고 몬스터들의 공격성이 대폭 상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