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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넘어서
아쉽게도 지금은 카시아의 질문에 대답해줄 틈이 없다.
나는 즉시 명도참을 날려 비명을 지르는 새 인간들을 모조리 썰어버렸다.
촤자자자작!!
[……!!]
[……!]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검기가 새 인간들을 덮쳤다.
추풍낙엽처럼 썰려나가는 새 인간들.
뒤늦게 날 인식한 새 인간들이었지만 너무 늦었다.
놈들의 능력으론 명도참을 피해낼 수도, 막을 수도 없다.
끝내 거리를 가득 채웠던 새 인간들은 모조리 두 동강 나고 말았다.
놈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피로 거리는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저것들은 대체 뭐야……?”
몇 초 후 소리가 돌아오자 옆에 있던 니아가 질색하며 물었다.
나나도 몸서리치면서 결정 덩어리가 된 땅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왜 엘프 언니가 소환한 정령이 저렇게…….”
그 말을 들은 나는 새 인간들 사이로 들어갔다.
시체들을 지나 결정화된 정령을 들어 올린 후 그것을 일행들에게 보여주며 설명했다.
“결정화 저주야. 놈들 비명을 들으면 이 정령처럼 돼. 한 마디로 즉사하는 거지.”
“그, 그게 무슨……!”
소름끼치는 설명에 일행들은 일제히 당황을 터뜨렸다.
모두 한 결처럼 동요로 몸을 떨 때, 유미 혼자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들은 적이 있어요…… 저주 중에는 사람의 몸을 보석처럼 바꾸는 것도 있다고…….”
“몸이 보석으로 변한다니…… 그게 말이 돼……?”
“네…… 처음에는 괜찮지만 일정 횟수 이상 노출되면 순식간에 온몸이 보석으로 변한다고 해요.”
유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유미 말이 맞아. 10번 정도 공격당하면 영락없이 결정으로 변해. 어떤 놈은 한 번 공격할 때마다 두 번, 세 번 공격한 걸로 취급하기도 하고.”
가디스 던전의 저주는 보통 저주 수치가 10 쌓이면 효과를 발동한다.
방금 전 새 인간들의 비명 같은 경우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적들에게 결정화 저주를 1 스택 부여한다.
그 범위가 워낙 넓어서 우리가 뭣 모르고 선공했다면 다가가기도 전에 단체로 결정 석상이 되어버렸을 거다.
놈들의 비명 앞에선 내 명도참도 소용없다.
새 인간들은 적들이 공격하려는 순간 곧장 비명을 지른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접근해 명도참을 준비했다면 20마리의 새 인간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으리라.
“잠깐, 그러면 우리는 왜 멀쩡할 수 있었던 거야?”
“맞아. 잠깐이긴 했지만 놈들 비명을 들었잖아.”
설명을 듣던 도중 니아와 제이드가 의문을 표했다.
두 사람의 질문에 나는 크림힐트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쟤가 쓴 정적 주문 덕분이지. 정적은 우리 근처로 오는 소리를 차단하거든. 10 스택이 쌓이기 전에 소리가 차단돼서 멀쩡할 수 있었던 거야.”
새들의 저주는 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이는 소리를 차단하면 저주가 통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림힐트의 정적 주문은 새들의 비명 공격을 방어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다.
정적
액티브
요구 스탯: 지성 15
비용: 마력 80
사용 조건: 마법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7초간 캐스팅한 뒤 반경 8미터 범위를 무음지대로 만든다. 무음지대 안에선 그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으며 주문 영창 또한 사용할 수 없다. 소리를 통해 발동되는 효과도 차단된다.
지성을 15박에 요구하지 않으면서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소리 관련 효과와 영창을 차단하는 개사기 주문.
마법사를 상대로도, 암살 플레이에도 유용하며 이렇게 소리 관련 능력을 차단할 때도 좋다.
즉발 주문까지는 막지 못하고 마법사가 범위 밖에서 영창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으나 장원에서는 분명 유용한 스킬이다.
이곳의 몬스터들 중 대부분은 새 인간들처럼 소리 관련 공격을 자주 쓰기 때문이다.
내가 크림힐트를 지목하자 다른 동료들이 하나둘씩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랬었구나…… 가, 감사해요 크림힐트 씨……. 덕분에 살았어요.”
“역시 마법사가 있으니까 든든하네! 우리끼리만 있었다면 영락없이 당했을 거야.”
유미가 소심하게나마 감사를 전하고 그에 이어서 니아도 크림힐트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크림힐트는 냉정한 어투로 답했다.
“저 남자도 그렇고, 당신들도 그렇고 쓸데없는 소리 할 필요 없어.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에이…… 그래도 네 공적인 건 맞잖아? 공을 세웠으면 마땅히…….”
“저기 말이야.”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니아가 웃으며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크림힐트는 이전보다 한층 더 무표정한 얼굴로 니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벌써 잊은 거 같은데, 난 당신들 전부 죽이려 했어. 그런데도 나한테 고마워?”
“아니…… 그래도 그건 지난 일…….”
“스쿨드님의 명령이 없었다면 난 지금 이 자리에서도 당신들한테 칼을 겨눴을 거야. 아니면 나랑 동료들한테만 주문을 썼을 수도 있고.”
이야기를 좋게 이어가려는 니아와 달리 크림힐트가 내뱉는 말에는 일말의 정조차 없었다.
그녀는 선을 긋든 날카로운 어투로 말을 마쳤다.
“그러니까 나한테 고마워하지도, 칭찬하지도 마. 난 당신들 노예일 뿐이야. 감사를 받으면 더 이상 노예가 아닌데 괜찮겠어?”
“…….”
연이은 직설에 니아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크림힐트가 니아의 기를 눌러놔서 그럴까.
옆에서 듣고 있던 제이드가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래, 니아. 저 녀석한테 뭐 하러 좋은 말을 해? 지금 아무리 잘 해봤자 우리 죽이려던 게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고.”
“맞아요, 언니! 본인이 노예 취급당하고 싶다는데 마음껏 부려먹기나 하자구요! 참나!”
나나 역시 상당히 기분이 상했는지 불쾌한 눈빛으로 크림힐트를 노려보았다.
반면 안티오페와 카시아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크림힐트에게 말했다.
“야 크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
“맞아…… 괜히 심술부리면 못 써. 얼른 니아 씨한테 사과하렴, 응?”
처음부터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던 두 사람은 이 상황이 썩 달갑지 않은 듯했다.
카시아의 경우 지금 대화가 이후 공략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허나 두 사람이 달래 봐도 크림힐트는 묵묵부답이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걸까.
여태까지 봐온 크림힐트는 결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현명하고 객관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그런 그녀가 구태여 자신을 노예라고 언급하며 관계를 틀어놓는 건 이상하다.
본인에게도 불이익이 가는 행동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저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럴 거다.
말로 표현 못할 불만이 있던지,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던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크림힐트를 바라봤을 때였다.
“……!”
“……?”
나와 눈이 마주친 크림힐트가 순간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듯, 이를 악물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진짜 뭐지.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너,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나나 씨. 제이드 씨도요…… 저희끼리 싸워서 좋은 거 없잖아요, 네……?”
분위기가 한창 싸할 때 유미가 나서서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다.
그런 유미를 보며 나나가 난데없이 괴상한 말을 꺼냈다.
“그러면 기분 풀리게 유미 쟝이 팬티 한 번만 보여줘요.”
“……? 네? 네……?!”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들어서인지 유미가 대경실색했다.
눈에 띄게 놀란 그녀는 나나와 다른 일행들을 빠르게 살피면서 치맛자락에 손을 가져갔다.
얼굴에는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해야 된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다른 이들도 순간 당황하여 뭐라 말을 못할 때였다.
나나가 실소를 터뜨리며 유미에게 손사래 쳤다.
“푸훗……! 아잇~ 농담이에요, 농담! 왜 그렇게 진지한 거예요 유미 쟝~!”
“노, 농담이요……?”
“그래요~ 이런 상황에서 진짜로 그런 걸 하라고 하겠어요? 제가 무슨 미친년도 아니고~”
너무나 뻔뻔하게 말하는 나나를 보고 나와 유미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아라크네 앞에서 온갖 변태 짓을 한 녀석이 잘도 저런 말을 하는구나.
그 짓을 당한 유미 본인이 어떤 심정일지 차마 가늠도 안 됐다.
“어, 어찌됐든 장원에는 이놈들처럼 저주 효과를 부여하는 놈들이 많아. 나나가 있기는 하지만 다들 조심해. 방심하는 순간 훅 가니까.”
“그래…… 무턱대고 덤벼들면 안 되겠어.”
“아, 알겠어요 스승님……!”
내 경고에 일행들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몬스터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최약체로 불리는 고블린들도 작정하고 덤비면 모험가 한 둘 정도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그러니 몬스터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허나 즉사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펙에 상관없이, 실력에 상관없이 조건만 갖춰지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니.
그건 마치 칼과 화살을 사용하는 백병전에서 누군가 기관총을 들고 온 것과 같다.
반칙이라고 분개하는 것과 동시에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크림힐트의 갑분싸, 나나의 농담 때문에 잠시 잊었지만 일행들도 모두 적잖은 공포를 느꼈을 거다.
내 손에는 칼 한 자루 밖에 없는데 상대방이 총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것과 같은 이치다.
“나나야,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너뿐인 것 같다…….”
“그, 그래! 잘 부탁한다구, 사제님!”
겁을 집어먹은 제이드와 안티오페가 나나에게 매달렸다.
그 말을 들은 나나는 괜히 또 기고만장해져선 가슴을 펴며 이야기했다.
“흐흥~ 이제야 제 진가를 알아보는군요! 다들 저한테 잘 하세요!”
참 사제가 돼서 안 좋은 것만 배웠구나.
벌써부터 파티원들을 상대로 갑질이라니. 악질 힐러의 표본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진심으로 저러는 건 아닐 테니 놔두기로 했다.
사실 나나가 으스대는 거야 진짜 악질 힐러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고 말이다.
그 새끼들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파티원 강퇴도 강요하니까.
“그럼 슬슬 움직이자. 안전지대에 가기 전에 챙길 것도 있으니까.”
“챙길 거? 뭘 챙기는데?”
발걸음을 옮기려는 와중 니아가 물었다.
나와 보폭을 맞춘 그녀는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지혜 잃은 장원은 약 10년 동안 단절되어온 마경이다.
그곳에서 챙길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남들에겐 이상히 여겨지리라.
비단 니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크림힐트는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관찰하듯이 살폈다.
본인 입장을 확실히 해서 딱히 캐물으려는 기미는 없었으나 수상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런 일행들을 보며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할 겸 입을 열었다.
“사실 난 장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비단 지도를 봐서 그런 게 아니라 숨겨진 물건이라든지 이것저것.”
“뭐? 어떻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안티오페였다.
그녀와 함께 있던 카시아도 말만 없을 뿐이지 경악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들을 한 차례 바라본 뒤 나는 일부러 의미심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도서관 말고도 조사를 좀 했거든, 너희들은 모를 정보원을 통해서.”
“정보원……?”
“아!”
정보원이라는 말에 노르니르의 세 사람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동료들은 곧장 눈치 챘다.
헤베와 성소가 정보의 근원지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사실 성소엔 재앙신들에 관한 기록과 선대 투사들이 모아놓은 정보들이 가득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공략 사이트를 참고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성소의 기록 보관소는 최고의 공략집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장원에 대해 알게 됐다고 속일 생각이었다.
다행히 계획은 잘 먹혔고 동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노르니르 친구들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아 대장~ 어떻게 안 건데~ 우리한테도 좀 가르쳐주라~ 응?”
“안 돼, 너희를 어떻게 믿고.”
“그러면 힌트만이라도! 무슨 수를 썼는지 느낌만 줘도 되니까~!”
내가 정보원에 대해 끝끝내 밝히지 않자 안티오페는 나한테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려댔다.
클랜의 이익을 위해서 정보를 캐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성격과 태도로 보건데 그냥 본인이 궁금한 걸 못 참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노르니르 애들은 경우가 오지게 없네요. 어떻게 그런 걸 맨입으로 말해달라고 할 수 있어요?”
“으, 응?”
그때 문득 나나가 우리 둘 사이에 난입했다.
매서운 눈매로 자신을 노려보는 나나를 확인하곤 안티오페는 살짝 움츠려들었다.
내가 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눈매인데 그녀는 오죽할까.
“그,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돈이라도 내?”
그래도 마냥 쫄아 있기는 싫은지 안티오페는 태연한 척 나나에게 물었다.
그러자 나나는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든 뒤 그 안에 다른 손 검지를 넣으며 말했다.
“남자를 상대로 뭘 얻어내려면 당연히 이거 아니겠어요? 던전 끝나고 방 잡아요! 처음이니까 반나절 떡치는 걸로 얘기해줄……!”
“아, 진짜 좀!”
검지를 천천히 넣었다 빼며 말하는 나나에게 빽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 미친 녀석. 자기 남친을 창남으로 만들려 하고 있어.
아니, 엄밀히 따지면 몸을 팔고 정보를 얻는 쪽은 안티오페지만 뭔가 내 쪽이 몸을 파는 기분이다.
다른 것도 아닌 나나의 이상성욕을 위해서 말이다.
내가 황당함을 느끼며 소리칠 때 안티오페는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나한테 더욱 달라붙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그쪽이라면 나도 환영이지! 대장처럼 강한 남자를 먹을 수 있다는데 내가 왜 마다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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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님의 일러스트가 나왔습니다. 작품 설정에서 큰 그림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