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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81화 (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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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넘어서

안티오페의 저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파이톤 라이더 역시 어지간해선 한 방 컷 내기 힘든 놈인데 과연 크림힐트의 동료다웠다.

“좋아, 길 뚫렸다! 다들 머뭇거리지 말고 달려!”

다른 곳에서 달려오는 놈들을 대여섯 마리씩 베어 넘기며 일행들을 인도했다.

새로운 검의 효과는 정말이지 탁월했다.

언데드 병사들은 다가오자마자 수수깡처럼 썰려버렸으며 앞길을 막아서려는 골렘조차 스킬 몇 번 먹여주니 금세 모래로 돌아가 버렸다.

개개인의 저력으로는 나를 결코 막아설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놈들은 시간이 지나면 부활하고 머릿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기에 전부 죽이고 갈 수는 없다.

게임 특성상 죽인다 해서 경험치를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밀밭의 언데드 무리는 무시하는 게 답이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며 달리자 어느덧 성문을 넘을 수 있었다.

웃기게도 아테르니아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세트와의 전투에서 박살난 성문이 여태까지 고쳐지지 않은 것이다.

“다가오는 놈들은 죄다 발리스타로 쏴버리면서 성문 고칠 생각은 안 하다니…….”

박살난 성문을 보며 제이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에 나는 숨을 고르며 이야기했다.

“하아, 하아…… 이성도 없는 놈들이 뭘 알겠어. 발리스타 쏘는 것도 그냥 본능대로 하는 거지.”

“그렇구만……. 어찌됐든 우리한텐 좋은 일이네.”

제이드의 말이 맞다.

덕분에 우리는 별 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고 무사히 장원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언데드 병사들은 발리스타로 전부 입구 컷 당해서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행 역시 인면지주가 만들어준 깃발이 없었다면 발리스타 세례 때문에 진입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 이제 어쩌지? 계획 보다 훨씬 빨리 들어와 버렸는데.”

나와 제이드가 이야기가 나눌 무렵, 주위를 살핀 니아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성문을 넘자 멀리서 들려오던 소란이 훨씬 작게 들렸다.

오히려 음침한 거리와 반쯤 무너진 건물들 때문에 적막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시간이면 아직 새들의 활동 시간이야. 무리하게 진행하는 건 위험해.”

석재로 이루어진 건물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아직 노을이 전부 저물지도 않았다.

새들이 일찍 잔다고 해도 지금부터 잠들지는 않았을 거다.

“그럼 어떻게 하지? 여기서 시간이라도 때울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조금만 더 가면 안전지대가 나올 거야.”

불안해하는 니아를 안심시키며 나는 장원의 지리를 상기했다.

그녀 말대로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언데들은 이곳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근처에는 별 다른 몬스터도 없다.

몸을 숨길 은신처도 가득하니 쉬어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쉬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쉴 바에야 차라리 안전지대까지 가는 게 훨씬 낫다.

당장은 몬스터가 없을지도 몰라도 다른 놈들이 이곳까지 기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원작 게임에서도 가끔씩 그랬는데 게임 세계는 오죽하겠는가.

불안에 떨면서 쉬는 것과 편안한 마음으로 쉬는 건 차원이 다르다.

이후 안정적인 진행을 위해서라도 좀 더 전진할 필요가 있다.

“그래, 안전지대가 뭐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여기 보단 낫겠지. 여기 너무 소름끼쳐.”

“맞아요, 문 열면 바로 귀신 튀어나올 것 같단 말이에요.”

제이드와 나나가 내 말에 적극 찬성했다.

내가 보기에도 폐허가 되어버린 성문 주위는 무척이나 음침했다.

빈말로라도 쉬어가고 싶지 않은 장소다.

“그러면 대열 유지하면서 계속 진행하자. 아 그리고 가기 전에.”

이동하기 전 나는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곤 차원낭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 일행들에게 보여줬다.

“이건…….”

“장원 지도네요……?”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를 보고 일행들은 신기하단 듯이 이야기했다.

엉성하긴 하지만 지도 위에는 장원의 구조와 건물 위치, 특별한 장소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지도를 바라보던 크림힐트가 문득 질문했다.

그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도서관에서 돈 주고 샀어. 원래 역사서 안에 있던 내용인데 동전 몇 닢 쥐어주니까 떼어주더라.”

당연히 거짓말이다.

도서관에는 이렇게 상세한 정보를 담은 지도가 없다.

이 지도는 내가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 속 미니맵처럼 그린 것이다.

내 그림 실력은 썩 좋지 못하지만 아테르니아 구조를 알고 있다 보니까 나쁘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일부러 낡은 양피지 위에 그리니 새 것 같은 느낌이 없어서 다른 이들을 쉽게 속일 수 있었다.

“도서관에 이런 게 있었다니…….”

“이렇게 유용한 걸 왜 이제야 꺼낸 거야! 오기 전에 미리 봤으면 좋았잖아!”

크림힐트는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으로 중얼거렸고 안티오페는 불만스럽게 항의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반박했다.

“미리 말해줬다가 탈주하면 어쩌자고? 이거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렇게는 안 되지.”

“신중하기도 해라…….”

내 말에 카시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카시아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한 쪽 뺨을 감싸면서 묘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왜 저러는 거지, 순간 의아해진 나였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보다 일행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여기 북쪽 성문이야, 안전지대는 여기고.”

“방앗간 쪽 삼거리라…… 꽤 머네…….”

“게다가 본성하고 반대 방향이잖아. 굳이 여길 가야되는 거야?”

현 위치와 목적지를 차례대로 짚어주자 니아와 안티오페가 납득하기 힘들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테르니아는 비단 성문만 넘는다고 해서 도시가 나오는 구조가 아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길도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외곽 지역이다.

도시 보다는 촌락에 가까운 지역인 것이다.

대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본성에 들어가려면 여기서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쭈욱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해안가 쪽에 위치한 언덕에 도착할 수 있고 그곳이 아테르니아의 본성이다.

하지만 내가 지목한 물레방앗간은 메인 스트리트랑 한참 떨어져 있는 지역이었다.

굳이 편한 길을 놔두고 돌아가려 하니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해봐. 새들이 대로변이랑 외곽 중 어딜 더 선호하겠어?”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가면 적이 많아진단 거야?”

“그래, 해가 저물었더라도 저긴 별로 갈 만한 곳이 아니야. 우리 전력이면 뚫을 수야 있겠지만 전력 소비가 너무 커.”

일행들에게 설명하며 나는 본성으로 진입하는 2차 성문을 짚었다.

원작 게임에선 이곳이 헬 게이트로 불리곤 했다.

몹들은 엄청나게 많지, 정예들도 한꺼번에 덤비지, 아예 넘어오지 말란 식의 구성 때문에 피 말리는 난전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방앗간 쪽으로 가려는 건 비단 몰려 있는 몹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방앗간 근처에는 삼거리가 위치해있다.

내가 그토록 찾던 마신화 관련 NPC 또한 거기 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방앗간 삼거리에 필수적으로 들러야 한다.

“다키 말대로 하자고. 그나마 우리 중 제일 잘 알고 있는데, 분명 더 나은 길이겠지.”

내가 일행들에게 이야기한 직후, 제이드가 내 말에 힘을 실어줬다.

트롤전 이후 제이드는 나를 향한 신뢰가 한층 더 두터워진 듯했다.

자기 목숨을 살려줬을 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실력까지 보여줬으니 나를 따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좋아, 다키 말이라면 믿을 만하니까. 얼른 움직이자.”

“으으…… 귀찮게 돌아가는 건 질색인데…….”

제이드가 한 마디 해주자 다른 사람들도 순순히 따라왔다.

안티오페의 경우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 남아 있었다.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겁쟁이처럼 돌아서 가냐는 느낌이었다.

전투력에 자신 있는 녀석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허나 그녀 또한 자신이 뭐라 할 처지가 아니란 걸 알아서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길을 걷던 도중이었다.

“어……?”

“저게 뭐야……?”

“사람…… 은 아닌 것 같네.”

폐허가 된 길목에서 기괴한 모습들이 하나둘 씩 나타났다.

[아아, 아테나시여……. 저희에게 부디 자비를…… 제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괴로워…… 살고 싶지 않아…….]

[황혼이 다가온다……. 태양이 저물고 말 거야…….]

불길한 말들을 입에 담으며 나타난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이었다.

몸은 밖의 미라처럼 빼빼 마른 나체였는데 머리는 새였다.

마치 인간과 새의 불쾌한 부분만 골라서 섞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수는 자그마치 20여 마리.

수백 씩 몰려다니는 언데드 군단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지 모르나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다.

새 인간들을 자세히 본 일행은 질색하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저놈들은 또 뭐야……! 더럽게 기분 나쁘잖아……!”

“으으으, 존나 씹극혐…….”

“저게 추종자란 건가……?”

안티오페와 나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제이드는 긴장한 어투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그의 말이 맞다.

우리 앞에 나타난 것들은 추종자 몬스터 중 하나인 새 인간이다.

추종자는 재앙신에 의해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위험하다.

저 빼빼 마른 새 인간 역시 겉으론 약해 보이나 위험도로 따지면 하나하나가 지주귀에 필적하는 놈들인 것이다.

“어쩜 저렇게 심할 수가…… 저 사람들, 영혼이 끔찍할 정도로 뒤틀려 있어요……! 저건 절대 사는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유미가 특히나 더 몸서리쳤다.

주술사인 그녀에겐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일 거다.

재앙신의 영향으로 저 새 인간들의 영혼은 매우 기괴하게 뒤틀려 버렸을 테니까.

원작 게임 컷씬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저주의 영향으로 영혼이 완전히 오염되고 기형화 됐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콘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라스트 오브 월드 2를 보여주는 꼴과 같다.

“어쩔까 다키야……? 바로 공격해?”

방패를 들어 올리며 묻는 니아.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먼저 공격하지 마. 저놈들은 절대 먼저 공격하면 안 돼, 저놈들 사이로 뛰어들면 더 안 되고.”

“왜? 그냥 멀뚱히 걸어 다니고만 있잖아, 얼른 가서 박살내버리자고!”

내 말에 안티오페가 반박했다.

확실히 그녀 눈에는 새 인간들이 걸어 다니는 허수아비로만 보일 거다.

하지만 그건 엄청난 착각이다.

“괜히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말하기 전엔 아무 것도 하지 마.”

새 인간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놈들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원작 게임과 같은 패턴인 것 같다. 이쪽이 공격 의사를 보이지 않으면 선공하지 않는다.

그걸 확인한 나는 카시아를 불렀다.

“엘프 누님, 정령도 다룰 줄 안다고 그랬죠?”

“응, 조금이지만 시키는 건 대부분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지시하면 정령들 시켜서 저놈들 어그로 좀 끌어줘요, 우리랑 반대 방향으로.”

내 지시에 카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장 스킬을 시전하여 땅의 정령을 불러냈다.

“땅의 아이야, 나의 부름에 답해다오.”

짧은 영창 이후 지면이 미약하게 떨리더니 웬 동그란 물체가 땅에서 튀어나왔다. 정령술로 불러낸 땅의 하급 정령이었다.

흙 인형처럼 생긴 그것은 카시아 주위에서 통통 점프하며 명령을 기다렸다.

카시아가 준비된 걸 확인한 나는 크림힐트에게 말했다.

“그리고 크림힐트, 넌 정적 쓸 줄 안다고 그랬지?”

“그런데?”

“정령이 어그로 끌자마자 정적부터 깔아, 유미도 바로 물귀신 깔 준비하고.”

차례차례 지시 사항을 전달하자 일행들은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언데드 병사들에 비해서 훨씬 더 적은 수, 훨씬 더 약해보이는 외관.

허나 그것은 초보들을 속이기 위한 개발자들의 악의적인 설계다.

약한 놈들이라 판단하고 생각 없이 덤벼들었다간 지옥을 보게 된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뒤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흙의 정령이여!”

카시아가 명령을 내리자 땅의 정령이 빠르게 새 인간들 쪽으로 달려갔다.

일행과 정 반대편까지 달려간 놈은 발을 구르며 어그로를 끌었다.

쿵! 쿵쿵!

정령의 발 구르기에는 충격파를 발생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미세한 데미지까지 줬다.

이로써 새 인간들은 땅의 정령을 완전히 적으로 인식했다.

땅의 정령이 행동한 다음 순간.

[끼아아아아아악!]

[까아아아아아악!!]

새 인간들이 땅의 정령을 보며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고막이 찢어 것 같은 비명소리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귀를 틀어막았다.

마치 날카로운 부리로 귀를 후벼 파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명소리가 들려온 직후, 크림힐트가 주문을 완성한 것이었다.

“덴 아훈 울다한, 헤인 루스 파룰단!”

삐이이이이이.

끔찍한 비명이 순식간에 백색소음으로 바뀌었다.

머지않아 그것조차 사라져서 우리들의 귀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됐다.

덕분에 나와 일행들은 괴악한 비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허나 땅의 정령은 그렇지 않았다.

열심히 자기 할 일일 하던 땅의 정령이 어느덧 보라색 결정 덩어리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

이를 주시하던 카시아가 눈을 부릅뜨며 당황했다.

입을 열심히 움직이는 그녀였지만 정적의 효과로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물어볼 것도 없이 저게 대체 뭐냐고 묻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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