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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79화 (17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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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잃은 장원

“어쩌죠, 다키님?! 거부라도 써볼까요?!”

조급해진 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놈 인내력이 높아서 거부는 아예 먹히지도 않아. 다른 방법도 마찬가지고.”

“그럼 어떻게 해요?! 저희 이러다가 꼼짝없이 죽게 생겼어요!”

나나의 말을 들으며 마차 구조를 스윽 훑었다.

사람들이 뭉쳐 있어서 자력으로 부수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쓸 수 있었다.

“나나야, 지금 당장 장벽 깔아.”

“장벽이라면 보호의 장벽이요……? 그걸로 어쩌려구요?”

의아한 얼굴로 묻는 나나. 다른 이들도 내게 비슷한 눈빛을 보냈다.

그들과 한 번씩 시선을 맞추며 침착한 어조로 계획을 설명했다.

“우리 주위에 장벽으로 육면체를 만드는 거야. 그러면 마차가 추락해도 우리들은 안전할 수 있어.”

“아! 그런 방법이!”

내 말을 듣고 나나가 손뼉을 쳤다. 일행들도 놀라면서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나나의 법술로 안전장치를 만들자는 거지?”

“정말 그걸로 되는 거야?”

기발한 생각이라고 받아들이는 한편 우려의 기색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게 현실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조치를 취해도 낙사하는 건 매한가지였을 거다.

허나 이곳은 현실의 법칙에서 벗어난 게임 세계, 이곳만의 대처법을 사용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래, 보호의 장벽은 단일 피해를 무조건 상쇄해줘. 장벽으로 만든 큐브 안에 들어가면 장벽은 부서질지언정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일행들도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나는 곧장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고, 안티오페는 놀란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대장, 검사 아니었어? 어떻게 법술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는 거야?”

“내 마법도 이상할 정도로 잘 알았고…….”

안티오페가 질문을 시작하자 크림힐트 역시 의심스러운 기색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크림힐트는 리단의 설명을 듣지 못한 듯했다.

하기야 그녀는 당시 노예 입장이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누구도 먼저 얘기해 주려 하지 않았을 거다.

괜히 내가 영웅의 환생이란 걸 떠벌리고 다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 꺼낼 얘기는 아니었기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주워들은 거야. 지금은 그런 얘기 보다 살아남는데 집중…….”

카각! 카가각!!

“……!”

내가 그녀들에게 대답하려는 순간 마차 안에 박혀 있던 발톱들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천둥새의 발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진 마차를 부숴버릴 정도로 강하게 쥐고 있었는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젠장, 이 자식 슬슬 놓으려 하고 있어!”

“나나야 영창은?!”

점점 풀리는 발힘을 보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나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대한 빛의 신이시여! 당신의 위광으로 저희를 보호해주세요……!”

그러는 동안에도 나나의 입에선 영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절반 정도 밖에 장벽을 깔지 못했다.

위험하다. 이대로 가다간 육면체를 만들지 못하고 추락해버릴지 모른다.

운이 좋으면 그것만으로도 살 수 있을지 모르나 높은 확률로 절반 이상의 인원이 밖으로 떨어져 나갈 거다.

낙하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는 것은 덤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장벽을 즉발 슬롯에 넣어두라고 하는 건데……!’

만약 그렇게 했으면 우리는 진즉에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을 거다.

허나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천둥새는 끝내 발힘을 완전히 풀어버렸고 마차는 지상을 향해 수직 낙하했다.

“으, 으아아아악!”

“떨어진다아악!!”

사방에서 일행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어어어억!!”

나 역시 급격한 추락으로 인해 반사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창밖을 보니 구름이 보였다.

이 미친 천둥새 새끼 대체 얼마나 높이 올라온 거야?

덩치 큰 괴조답게 비행하는 고도 또한 평범한 새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그 말은 우리들이 살 가능성이 한없이 낮아진다는 뜻이었다.

“위대한 빛의 신이시여! 당신의 위광으로 저희를……! 아이코!”

떨어지는 와중에도 나나가 계속해서 주문을 영창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보호의 장벽은 영창문이 긴데 그걸 낙하 도중에 읊으려니 계속 끊기는 것이었다.

방금 전에도 마차 벽에 머리를 박아서 거의 다 완성된 주문이 보기 좋게 끊어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낙담하고 말았다.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가?

장원에는 아직 발도 못 들였는데?

구름이 보일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바닥에 닿는 순간 즉사다.

천둥새는 우리는 떨구는 즉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서 놈을 이용해 뭘 해볼 수도 없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땅과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변태 사제! 이거 물어!”

“우후웁?!”

갑자기 크림힐트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푸른색 액체가 담겨 있는 포션이었다.

얼핏 보면 마력 회복 포션이랑 비슷했는데 그 색이 좀 더 옅었다.

마치 크림힐트 본인의 눈동자와 같은 하늘색이었던 것이다.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나나에게 포션을 먹인 크림힐트.

얼떨결에 한 병을 모조리 비운 나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크림힐트에게 물었다.

“푸하앗! 갑자기 뭘 먹인 거예요?! 오, 오옷?!”

말하는 도중 나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감탄을 터뜨렸다.

마치 각성제라도 맞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뭐지?

나나의 반응을 보며 의아해 하던 와중 그녀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영창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위대한빛의신이시여당신의위광으로저희를보호해주세요위대한빛의신이시여당신의위광으로저희를보호해주세요!!”

순식간에 나머지 영창을 마쳐버린 나나.

래퍼를 능가하는 영창 속도를 보고 포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영창 속도 포션!’

캐스팅의 속도를 대폭 늘려주는 포션으로 매우 희귀한 포션 중 하나다.

주문 사용자들의 국민 스킬인 고속 영창과 비슷한 효과를 가졌지만 제조법이 까다로워 원작 유저들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그것을 크림힐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절묘한 상황에 놀라는 와중 나나가 만든 장벽은 완벽한 정육면체를 형성했다.

어느덧 우리 모두는 금빛으로 빛나는 큐브에 감싸이게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바닥과 충돌했다.

콰과아아아아앙!!

거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어마어마한 진동이 지상을 덮쳤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마차가 추락한 지점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원래 같았으면 나와 일행들도 오체 분해되어 먼지 속에 섞여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사지 멀쩡한 상태로 일어설 수 있었다.

큐브 형태를 이룬 보호의 장벽이 낙하 충격을 모조리 흡수해준 것이었다.

“케헥! 콜록! 콜록! 다들 괜찮아?!”

“괜찮아요 스승님……!”

“사, 살았다! 살았어! 살았다고~!”

온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묻자 일행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도 마음 같아선 쾌재를 부르고 싶었다.

그간 수많은 위험을 겪어봤지만 방금처럼 심장이 쫄깃해지는 상황은 없었다.

이번에야 말로 영락없는 죽겠구나 싶었는데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짓말 안 하고 지릴 뻔했다. 오늘 밤에는 나나랑 같이 자야지.

“우와앙~! 죽는 줄 알았어요, 다키님! 무서워요, 안아주세요~!”

간신히 영창을 성공해낸 나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안겼다.

그녀도 참 어지간히 무서웠나 보다.

자기가 실패하면 일행이 다 죽을 상황이었는데 부담감이 장난 아니었겠지.

나는 울먹이며 안긴 나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줬다.

열심히 한 여자친구를 남자친구로서 칭찬해줄 시간이다.

“그래, 그래 수고 많았어. 네가 우릴 살렸다. 크림힐트 너도.”

나나를 달래주면서 크림힐트에게 말했다.

내 아이디어와 나나의 법술만으론 상황을 타개하기 힘들었을 거다. 전부 크림힐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칭찬을 건네자 크림힐트는 지팡이를 몇 번인가 휘둘러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안하면 나까지 죽으니까 그런 거야. 당연한 일로 유난 떨지 마.”

“으…… 말하는 싸가지하곤.”

냉담한 어투에 나나가 표정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참 한 마디 한 마디가 정 떨어지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애교로 보였다.

이에 공감하듯 안티오페가 그녀에게 헤드 락을 걸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크림~! 이런 건 칭찬 받아야지! 이야~ 어쩜 그리 절묘하게 영창 포션을 가지고 있었어?”

“놔 티오…… 숨 막혀…….”

“웃을 때까지 안 놔줄 거다 뭐~”

안티오페의 가슴에 파묻힌 크림힐트는 마구 바동거리며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얼굴은 무표정인데 괴로워하는 기색이 보여서 은근 웃겼다.

그렇게 두 사람이 괴상한 애정 표현을 하고 있을 때,  제이드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말했다.

“기왕 쓰는 거 좀 더 일찍 써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진짜 낙사하는 줄 알고 쫄았잖아.”

확실히 크림힐트가 포션을 빨리 꺼냈다면 우리는 보다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있었을 거다.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멍드는 일도 없었겠지.

제이드의 지적에 크림힐트는 쌀쌀맞은 어투로 반박했다.

“이건 우리 클랜에서 만들어낸 시험 포션이야. 원래라면 너희들 앞에서 꺼내면 안 되는 거라고.”

“시험 포션?”

예상외의 발언에 나는 살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자 크림힐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병을 보여줬다.

“응, 예전에 유적지에서 발견한 포션을 참고해서 만들어낸 거야. 부작용이 있을까봐 나도 가급적 안 쓰려 했는데, 다행히 괜찮은 것 같네.”

“으잉?! 그러면 지금 날 상대로 임상 실험했다는 거예요?!”

달갑지 않은 사실에 나나는 당황스러운 어투로 크림힐트를 노려보았다.

그녀를 마주본 크림힐트는 장난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 얼굴이 파랗게 변하면 부작용인 줄 알아.”

“얼굴이 어쩌고 저째요?! 지금 내가 아오오니로 변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나나도 여자라서 그런지 피부에 관한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가 생각해도 얼굴 전체가 파란색이 되는 건 좀 끔찍할 것 같다.

만약 정말 부작용이 나타나면 과거에 재미 삼아 만들었던 고인물 캐릭터처럼 되지 않을까.

“어찌됐든 살았으니 됐잖아. 천둥새도 가버린 것 같으니까 우리도 슬슬 움직…….”

니아가 신경전을 벌이는 나나와 크림힐트를 말리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아……!

콰과아아앙!!

“……!!”

“……?!”

난데없이 거대한 창 같은 게 우리들 옆에 내리 꽂혔다.

갑자기 날아온 창대에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악하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저, 저게 뭐야?!”

“창……?! 아니, 아니, 화살이잖아……! 엄청나게 큰 화살이라고!”

충격적이게도 사람 키보다 더 큰 그것은 거대한 화살이었다.

인내하는 자의 신전에서도 봤던 대형 화살.

그걸 보고나서야 나는 우리가 어디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염병할…….”

이곳은 아테르니아의 밀밭이다.

성벽 앞에 광활하게 깔린 밀밭에는 비단 밀만 자라있지 않았다.

주위에는 방금 전에 꽂힌 것과 같은 대형 화살들이 수도 없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화살들은 어김없이 사람이나 몬스터의 시체를 관통한 상태였다.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은 우리도 곧 자신들처럼 될 거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없는 경고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 지 되새기게 해줬다.

“다들 빨리 내 쪽으로 보여! 절대 떨어지지 마!!”

상황을 인지한 나는 차원낭에서 깃발을 꺼냈다.

인면지주가 만들어준 푸른색 부엉이 깃발이었다.

불경한 자의 둥지에서 얻은 공략 아이템을 활용할 때가 온 것이었다.

콰과아아앙!

콰와앙!!

“꺄아아아악……!!”

“이런 젠장, 저놈들 본격적으로 쏘기 시작했어!”

깃발을 꺼내는 와중에도 또 다른 화살이 바로 옆에서 박혔다.

주변에 피어난 흙먼지 때문에 명중률이 떨어진 듯했다.

흙먼지가 없었다면 벌써 우리 중 셋 이상은 화살에 맞아 꼬챙이가 돼버렸겠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광경이었으나 그래도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깃발을 펼쳤으니 더 이상 이쪽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저건 또 뭐야?! 발리스타?!”

“분명 성벽에서 날아왔어요……!”

날아오는 화살을 보며 제이드가 소리쳤다.

신내림으로 위험을 느낀 유미 또한 성벽을 가리키며 일행들에게 경고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화살의 정체를 얘기했다.

“그래 발리스타야. 유미 말대로 성벽 위의 놈들이 쏘고 있는 거고.”

“그러면 얼른 도망가야지! 이대로 있다간 저격당한다고!”

“괜찮아, 깃발을 들고 있는 동안 놈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아. 오히려 자기편이라고 인식할 거야.”

초조해 하는 일행들을 보호하듯 깃발을 더욱 넓게 펼쳤다.

그걸 본 일행들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끝내 내 말을 믿었다.

내 말을 인정해주듯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살을 쏜 발리스타는 다시금 잠잠해졌다.

“진짜네……?”

“아무 것도 안 날아오잖아?”

성벽 위를 올려다 본 일행들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허나 문제는 발리스타만이 아니다.

원작 게임과 같은 기믹이 발동된다면 슬슬 방해꾼들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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