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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그 자체
“물론 그냥 데려가는 건 아니에요. 일종의 노예 계약이라고 생각하세요.”
[노, 노예 계약?!]
“크림힐트는 파티원이 아닌 노예로서 참가합니다. 공략이 끝날 때까지 제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전리품 분배에서도 제외되죠.”
분개하는 스쿨드에게 나는 내가 원하는 조건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당연히 스쿨드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말도 안 된다는 어투로 반박에 나섰다.
[웃기지 마! 그건 그냥 크림힐트랑 같이 자살하겠다는 소리잖아?! 절대 안 돼! 죽고 싶은 혼자 죽어!]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강경하게 거부하는 스쿨드.
이대로라면 그녀를 내게 넘겨주지 않을 것 같다.
이상한 일도 아니지.
그녀 입장에선 난데없이 자기네 식구가 노예로 팔려나가는 꼴이니 말이다.
그런 스쿨드를 보며 나는 좀 더 강하게 나갔다.
“거부하거나 허튼 짓 하면 전부 불어버릴 거예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너, 너 진짜아……!]
계속되는 협박에 스쿨드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녀에겐 굉장히 고통스러운 선택이리라.
내 말에 따르면 클랜원이 사지로 끌려간다.
그렇다고 따르지 않으려니 오늘 있었던 부당한 행위들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신의 자존심과 클랜에 큰 타격이 가게 되는 것이다.
“으으읏……!”
눈빛으로 온갖 욕을 한 스쿨드는 곧 손톱을 깨물며 고민했다.
보아하니 크림힐트는 그녀에게 꽤 중요한 인재인 모양이다.
고작 클랜원 한 명과 클랜 전체의 명예를 두고 저울질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스쿨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문득 크림힐트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여신님. 다녀올게요.”
[크림힐트?!]
쉽사리 결단을 못 내리는 여신과 다르게 크림힐트는 태연히 동행 의사를 밝혔다.
당연히 스쿨드는 그녀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다.
[너 미쳤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간다는 거야!]
“잘 알고 있어요. 장원이 어떤 곳인지는 스쿨드님이 귀 아프도록 들려주셨잖아요.”
[알면서도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너 거기 들어가면 진짜 죽어! 완전 미친 짓이라니까?!]
거듭 소리치는 스쿨드를 보며 크림힐트는 무뚝뚝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나쁠 거 없잖아요. 전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난데없는 말에 스쿨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기회라니……?]
“이 사람도 막무가내로 장원에 들어가려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해요. 뭔가 계획이 있겠죠.”
그렇게 말한 크림힐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는 얼음처럼 냉정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기대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녀를 마주 보면서 나도 크림힐트 말에 긍정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데, 전 자살하러 가는 건 아니에요. 반드시 클리어할 겁니다. 계획도 다 있고요.”
[말도 안 돼…… 거긴 아테나의 영토라고……! 그런 곳에서 한낱 인간의 계획 같은 게 통할 리가 없잖아!]
결연한 태도로 말했으나 스쿨드에겐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인 듯했다.
그녀도 지배신 중 한 명이니까 아테나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그녀가 비옥한 남쪽 땅을 포기하고 북부로 올라간 것 또한 아테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이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한 상대를 단신으로 상대하려 하다니.
스쿨드 입장에선 내 말이 미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난처함을 느끼고 있으려니 크림힐트가 지원 사격을 해줬다.
“여신님, 이 남자는 절 제압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어요?”
[어……? 그러고 보니 크림 너 트롤 꺼낸다고 했는데……. 설마…….]
크림힐트의 말을 듣고 스쿨드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는 스쿨드에게 크림힐트는 긍정하듯 말을 이었다.
“이 남자는 제 트롤을 두 마리나 쓰러뜨렸어요. 그것도 고작 두 명이서요. 남은 한 마리도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었을 거예요.”
[자, 잠깐! 그게 말이 돼?! 네 트롤은 썬더 드레이크 토벌에도 참전했었는데……!]
“저도 믿기지 않아요. 하지만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이 남자가 트롤 세 마리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는 걸요.”
스쿨드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떠올랐다.
경악, 의문, 감탄.
그 외에도 수많은 감정들이 번갈아서 그녀의 표정을 바뀌었고 이내 스쿨드는 크림힐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크림힐트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그러면 진짜라는 건데…….]
게임 세계에선 트롤 슬레이어의 칭호가 어지간히도 귀한 모양이다.
트롤 두 마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스쿨드도 날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녀석이라면 장원도 공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게 된 것이다.
“어차피 욕심 부리다가 이렇게 된 거 더 욕심을 부려 봐요. 제가 헌신적으로 도우면 저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잖아요.”
고민하는 스쿨드에게 쐐기를 박는 크림힐트.
연이은 설득을 듣고 스쿨드는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잠시, 날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크림힐트 보내주고 합의금까지 주면 정말 없던 일로 해주는 거지?]
“아예 묻어주진 않을 거지만 당장 까발리진 않을게요.”
[뭐?! 그러면 계속 그거 가지고 협박하겠다는 거야?!]
스쿨드의 노성에 나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반박했다.
“아니…… 그쪽은 내 동료들을 죽이려고 했잖아요. 소리 지를 입장은 아니지 않아요?”
[으우웃……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어지는걸!]
“응당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저한테 적극적으로 보상해주면 제가 여신님 클랜에 자진해서 들어갈지.”
크림힐트가 한 말은 어느 정도는 맞다.
그녀가 정말 나와 동료들을 위해 헌신한다면 스쿨드 세력에 대한 내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뀔 거다.
나중에 추가적인 보상을 떼먹기야 하겠다만 그 후에는 클랜에 정식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피해 받은 것에 대한 보상을 챙기고, 스쿨드는 날 영입할 가능성이 생기고.
이러면 서로에게 윈윈이지 않겠는가.
물론 스쿨드의 인성을 본 지금으로썬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흥…… 좋아. 욕심 부린 스쿨드도 잘못은 있으니까.]
애매한 대답을 건넸으나 스쿨드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사실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지.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였지만 지고만 있지는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손가락을 하나 편 스쿨드가 거울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녀의 발언을 흔쾌히 허락했다.
“말씀해보세요.”
[크림힐트만 보내긴 걱정 돼!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공격대를 만들자고! 그러면 너도 좋잖아!]
“공격대요?”
예상외의 제안에 적잖게 놀랐다.
공격대라…….
확실히 장원 같은 초대형 던전 공략엔 소규모 파티 보다 대규모 공격대가 더 유리하긴 하다.
개발자 오피셜로, 지혜 잃은 장원은 본래 유저들 간의 온라인 레이드를 위해 만든 지역이라고 하니까.
무엇보다 한 파티로 장원의 몬스터들을 다 상대할 필요도 없어지고, 영역 확보 또한 더 빠르게 진행된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여기서 스쿨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보상을 독점할 수 없게 된다.
대대적인 지원을 받게 되면 스쿨드는 그걸 빌미로 전리품을 요구하려 들 거다.
대표적으로 마정석 광산과 장원 몹들의 이코르를 요구하겠지.
오히려 내 쪽에서 보상을 퍼주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걸 거절할 수도 없는 게, 대규모 공격대를 꾸리면 좋으나 싫으나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나 혼자 전리품을 독식해버리면 지탄을 받는 건 스쿨드가 아닌 내가 되어버릴 거다.
스쿨드 역시 이러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 들겠지.
애초에 난 공격대 없이도 클리어할 수 있으니 그녀의 제안에는 동의할 이유가 없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소수 정예로 움직이는 게 더 편하니까요.”
[하, 하지만 장원에는 아테나의 추종자들이 득실득실 거릴 거라고! 너희끼리 다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이 되니까 도전하는 거예요. 여신님은 그냥 믿고 기다리세요. 크림힐트는 꼭 살려서 보내드릴 테니까요.”
완고한 대답에 스쿨드도 더 이상 날 꼬드기지 못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드러났다.
이 앙큼한 여신, 역시 숟가락을 얻을 속셈이었다.
[이잇! 그러면 크림힐트 동료들이라도 데려 가! 어제 봤던 애들 있잖아! 그 애들도 사실 플레티넘 상위권 실력이라고!]
“어제 봤던……? 아아…….”
스쿨드의 제안을 듣고 아마조네스 여전사와 엘프 궁수를 떠올렸다.
크림힐트도 나와 상성이 안 좋았을 뿐이지 상당한 실력이었다.
아마 나를 제외한 우리 파티원들은 한꺼번에 덤벼도 이기기 힘들 거다.
그런 크림힐트의 동료들이라면 적어도 비슷한 실력을 갖추고 있겠지.
두 명 정도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탱커랑 원딜이라 포지션이 겹치긴 하지만 더 데려가서 나쁠 거 없다.
8명이면 소규모 공격대의 적정선이기도 하고.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내일 아침까지 두 사람 숲 밖에 대기시키세요.”
스쿨드의 제안을 승낙한 뒤 나는 경고하듯 첨언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허튼 짓 하면 저도 가만 안 있을 겁니다. 제가 당해도 폭로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 기억해두세요.”
성소에 도착하는 순간 헤베와 브릴린트, 그리고 리단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전부 알려둘 셈이다.
내가 잘못되더라도 세 사람이 있는 한 스쿨드는 엄한 짓을 하지 못 한다.
설령 병력을 끌고 와 날 납치하려 들어도 금세 본인들의 만행이 탄로 날 것이다.
[알겠어, 알겠어! 스쿨드도 좋게 끝내고 싶다고! 험악한 얘기는 이쯤 하고 그만 화해하자, 응?]
다행히 스쿨드는 이 이상 일을 키우길 원치 않는 모양이다.
원대한 야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마음에 드는 모험가 한 명 끌고 오려 한 건데 그럴 만도 하다.
그녀가 한도 끝도 없이 패악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내심 안도하며 스쿨드에게 말했다.
“그건 여신님 하시는 거에 달렸죠. 필요하면 연락하겠습니다.”
거기까지 얘기한 뒤 연락을 끊었다.
스쿨드의 얼굴을 비추던 빙환경의 표면은 다시 차가운 거울로 변했다.
“당신도 참 대단한 일을 했네. 여신을 협박하다니.”
이를 지켜보던 크림힐트가 무뚝뚝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나는 빙환경을 차원낭에 챙겨 넣으며 크림힐트를 일으켜 세웠다.
“너희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그야 그렇지. 그보다 내 거울은 안 돌려줄 거야?”
“때가 되면 어련히 돌려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그리 말하며 차원낭에서 꺼낸 밧줄로 크림힐트의 손을 뒤로 묶었다.
마법사가 마법 무기를 뺏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신중해서 나쁠 거 없다.
아무리 스쿨드와 내가 타협을 봤다고 해도 돌발 상황이 벌어지지 말란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읏…… 너무 세게 묵었잖아…….”
“그러면 좀 헐겁게 묶어줄까? 아예 묶지 말고 손잡고 가자하지 그래?”
크림힐트의 불평을 묵살하고 나는 그녀 손에 묶은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크림힐트는 얌전히 날 따라왔다.
불평을 좀 했을 뿐이지 구속되는 것 자첸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의왼데. 왜 스쿨드랑 말할 때 내 편 든 거야?”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나는 불현 듯 의문을 꺼냈다.
그러자 크림힐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니까.”
“너희 여신님한테 안 좋은 선택인데?”
“내가 거기서 반대했다면 당신은 날 가만 안 뒀을 거잖아.”
크림힐트의 말을 듣고 나는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내 질문도 참 우문이었다.
그녀 말대로 크림힐트가 거기서 반대하거나 헛소리를 했다면 난 결코 가만있지 않았을 거다.
막 죽인다느니, 고문한다느니 같은 극단적인 선택지가 아니더라도 꿀밤 한 대 정도는 쥐어박았겠지.
그런 의미에서 크림힐트는 여러모로 냉철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너무 차가워서 사람의 것으로 안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행들에게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동료들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원래 같았으면 그들은 나를 따라 크림힐트가 있는 방향으로 와야 했다.
만에 하나 잘못될 걸 대비해서 내 경로는 다 말해뒀던 것이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남은 한 마리의 트롤까지 역소환 돼서 달리 위험 요소가 있지는 않을 텐데.
내가 무언가 찝찝한 기분을 느낄 무렵.
나와 크림힐트는 어느덧 일행들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하아…… 하아…… 다키야…….”
“니아 누나……?”
트롤과 싸웠던 공간에 접어들자마자 니아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날 부르는 그녀는 연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으며 표정을 보니 무척 지친 듯했다.
뭐지? 왜 니아 누나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거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친 순간.
나는 그녀가 왜 이러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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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