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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67화 (16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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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

남쪽 숲은 굳이 경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잠깐 우리를 미행했던 고블린 몇 마리 외엔 달리 위협이 될 만한 요소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숲에 들어온 지 몇 분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잠깐, 여기 왠지 서늘한 거 같지 않아?”

문득 니아가 팔을 문지르면서 물었다.

그녀의 복장을 보면 어디는 서늘하지 않겠느냐 싶지만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요…… 어쩐지 기온이 내려간 것 같아요.”

“맞아, 아무리 숲속이라 해도 이상할 정도로 선선해.”

나나와 제이드 역시 니아의 말에 동감했다.

그 말은 곧 이 서늘함이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서늘함은 점점 추위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얼음이 옆에 있는 것 같은 냉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비가 온 것도 아니고 이제 곧 여름이 될 시기인데 갑자기 추운 건 말이 안 된다.

니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방패와 메이스를 손에 쥐며 제이드에게 물었다.

“제이드, 이 근방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는?”

질문받자마자 제이드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다이어 울프랑 고블린, 그리고 가끔 아울베어.”

“전부 냉기랑 관련된 놈들은 아니네…….”

“당연하지. 마법 쓰는 몬스터라면 모를까, 이 근방엔 그런 것들 없잖아.”

제이드의 대답에 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경계했다.

제이드 말대로 이 근방엔 냉기를 조종할 만한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몬스터 외에도 식인 개미나 만드라고라 같은 놈들이 더 있긴 하나 이놈들도 냉기와 관련이 없긴 매한가지다.

해가 쨍쨍하게 뜬 대낮이니 영체형 몬스터들일 가능성도 없다.

그렇다면 이 냉기는 어디서 느껴지는 걸까.

나도 경계심을 느끼며 칼자루에 손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쿵! 쿠웅!!

“……!”

“……?!”

조용했던 지면이 큰 소리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척 봐도 덩치 큰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뭐예요?! 어떤 놈이 땅바닥을 이렇게 흔들면서 오는 건데요?!”

“이 정도로 큰 몬스터가 이 근방에서 나타날 리 없는데……!”

전조를 느낀 일행은 재빨리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나나와 유미는 허둥지둥 주문을 준비했고 니아와 제이드는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대열을 갖췄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두 사람이기에 본능적으로 팀워크를 맞출 수 있는 것이었다.

“다이어 울프치곤 등장이 너무 요란한 거 아니야……?”

니아가 경계심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축을 울리면서 다가오는 몬스터가 고작 다이어 울프일 리는 없다.

니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럴 리 없다는 생각과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이 맞물려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인 건 아닐까 귀를 기울여 봤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소리는 일정했고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도 이족보행을 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발소리였던 것이다.

“타이토! 가서 확인해!”

[키아아아아아!]

그때 제이드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자신의 동물친구를 날려 보냈다.

은색 깃털의 매는 힘차게 날아오르더니 빠르게 숲속을 가로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야, 어떤 놈들인지 직접 봐야겠어……!”

초조한 기색으로 말한 순간 제이드의 눈이 매의 것처럼 변했다.

사냥꾼들의 스킬 중 하나인 시야 공유였다.

시야 공유

액티브

요구 스탯: 정밀 20

비용: 30

사용 조건: 활 또는 석궁 착용, 동물친구 생존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동물친구와 시야를 공유한다. 자신 또는 동물친구가 피해를 받으면 즉시 스킬이 취소된다.

시야 공유는 사냥꾼의 아이덴티티이자 매 사냥꾼이 사기인 이유다.

말 그대로 동물 친구가 보는 광경을 자신도 똑같이 볼 수 있는데, 매의 특성상 빠르게 광범위한 지역을 정찰할 수 있다.

정찰 도중 공격당할 확률도 적어서 안정적으로 위험 요소를 미리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타이토가 보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길 잠시.

제이드는 경악과 함께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돼……! 저 놈들이 왜 여기서 나와?!”

그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불안에 떨던 일행들을 더 무섭게 만들기에 충분한 리액션이었다.

“왜요, 뭔데 그래요?! 얼타지 말고 말 좀 해봐요!”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 나나. 그에 제이드는 사색이 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죽음을 예감한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표정이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제이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롤이야…….”

“뭐라고? 크게 말해 제이드! 안 들려!”

정면을 주시하던 니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자 제이드도 심란한 마음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트롤이라고 젠장! 엄청 큰 트롤이 우리 쪽으로 돌진하고 있단 말이야!!”

“뭐……?”

“트, 트롤이라고요……?”

순간 일행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지 유미와 니아의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다.

“그것도 한 놈이 아니야! 세 마리나 몰려오고 있어!”

그런 그녀들에게 제이드가 쐐기를 박았다.

마치 우리는 이제 다 죽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패닉 상태에 빠지려는 제이드를 향해 니아가 항의하듯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트롤이 무리를 지을 리가 없잖아!”

“마, 맞아요! 길드에서도 이 근방은 트롤이 살기 좋지 않은 환경이라 했어요!”

니아에 이어서 유미까지 반박했다.

두 사람의 말 중 틀린 부분은 없었다.

트롤은 한 마리씩만 출현하며 여기보단 좀 더 북쪽을 서식지로 삼는다.

원래 추운 지방에서 살던 놈들이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원작 게임에서도, 게임 세계에서도 남쪽 숲에서 트롤이 출현하는 일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제이드는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트롤 세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끄어어어어어억!]

[쿠워어어어어어!!]

나무를 비집고 나타난 거체들이 일제히 포효를 내질렀다.

칼처럼 길고 날카로운 어금니와 5미터는 될 법한 크기.

녹색 털에 뒤덮인 모습은 짐승과 사람을 반씩 섞어 놓은 것 같았다.

그렇게 초목을 해치며 다가온 트롤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살의를 내비쳤다.

놈들은 이미 싸울 생각으로 가득한 듯했다.

식인을 즐기는 놈들이 먹기 좋은 남녀 다섯을 발견했는데 덤벼들지 않는 것도 이상하겠지.

“끝이야…… 우린 이제 다 죽었어…….”

급기야 제이드는 대놓고 비관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가 쫄보여서 그런 게 아니다.

누가 봐도 세 마리의 트롤들은 죽음과 동음이의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5미터짜리 식인 괴물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는데 어떻게 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뜩이나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기로 유명한 놈들인데.

니아랑 유미도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지만 같은 생각일 거다.

허나 나는 위기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거짓말 안 하고 1도 안 무서웠다.

“이게 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오로지 황당함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트롤이지 않은가.

실제로 보니까 확실히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놈들이 가디스 던전 공식 호구몹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세 마리 씩이나 몰려 왔는데도 무섭기는커녕 의아한 마음만 들었다.

DLC의 영향으로 트롤의 배치가 바뀐 건가?

아니면 게임 세계의 변수 때문에?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놈들의 출몰은 이상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인식 범위가 그리 넓은 놈들도 아닌데 몇 십 미터 밖에서부터 우릴 향해 달려왔다는 것도 수상하다.

‘그리고 저놈들이 다가오니까 더 추워졌어.’

몸이 떨릴 정도의 추위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전부 숲 트롤이다. 얼음 능력을 가지고 있는 놈은 없다.

그런데 왜 냉기가 느껴지지?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지만 일단 눈앞에 나타난 트롤은 잡고 봐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자, 잠깐! 다키 너 지금 뭐하려는 거야?!”

쾌도를 뽑아들자 니아가 대경실색하며 물었다.

제이드도 심각한 어투로 나에게 소리쳤다.

“저건 우리가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야! 한 마리만 해도 최소 열 명은 필요한 놈들이라고! 우리 전력으론 절대 못 이겨!”

보아하니 니아도, 제이드도 이 상황을 절대 타개하지 못할 거라 여기는 듯했다.

도망만이 살 길이다. 그들의 얼굴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싸운다는 선택지 자체가 아예 배제되어 있는 것이었다.

“뭐, 그래. 트롤이 귀찮은 상대긴 하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두 사람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나는 여유로운 기색을 관철하며 말했다.

“피통은 오지게 높은데 재생력까지 좋으니까. 인내력도 높아서 어지간한 공격은 죄다 씹고 들어오고.”

그러니까 게임 세계 사람들이 무서운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상대하는 법을 알면 얘기가 달라지지.”

[크워어어억!!]

내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털던 도중이었다.

선두에 있던 놈이 나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과 함께 날아든 거대한 팔.

척 봤을 때는 오른딸잡이 발람의 딸근 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발람과 트롤의 공격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발람의 공격은 존나게 무서웠지만, 놈의 공격은 하나도 안 무섭다는 것이다.

“하하핫! 호구 새끼들 박자까지 똑같네!”

너무나 단조롭고 정직한 공격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트롤의 패턴을 한껏 비웃어주며 나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당연히 공격 패링을 위해서였다.

카아아아앙!!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지며 트롤의 팔이 튕겨져 나갔다.

별로 집중해서 휘두른 것도 아닌데 공격 패링이 성공한 것이었다.

[쿠아아아악!]

난데없이 공격이 튕겨져 나가자 트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는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 말도 안 돼!”

“저걸 튕겨냈다고?!”

니아와 제이드는 거의 기절한 것처럼 소리쳤다.

딱 내가 공포 게임하면서 갑툭튀로 놀랄 때 같은 반응이었다.

그들 눈엔 트롤의 공격이 위협적으로 보이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아크 데몬이나 발람에 비하면 너무 느리다.

거기에 더해 박자까지 정직해서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피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가볍게 패링을 성공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막히면 맞아야지!”

무방비 상태가 된 트롤을 향해 도약했다.

민첩을 높여서 그럴까, 몸이 예전보다 훨씬 가벼웠다.

살짝 지면을 걷어차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트롤의 목전까지 닿았다.

나는 그 즉시 왼팔을 마신의 것으로 바꿨다.

놈의 눈알을 쑤셔버리기 위해서였다.

푸후욱!

푸화아아악!!

[끄어어어어억!!]

피가 터져 나오면서 트롤의 눈알이 빠져나왔다.

트롤은 우렁찬 비명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재생력이 강한 놈이라 어지간한 상처는 회복하지만 눈알까지 회복하진 못할 거다.

[쿠워어어억!!]

[크하아아아!]

순식간에 동료가 당하자 다른 놈들이 나를 공격하려 들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공격당한 놈이 어지간히도 발광하는 바람에 도리어 피할 틈을 벌어주게 된 것이다.

[끄허어어어억!!]

쿠웅! 쿠우웅! 쿠구구구궁!

발을 구르고 주먹을 내지르면서 날뛰어대는 트롤 A.

놈의 거친 몸부림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고 아군에게도 피해를 끼쳤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내 머리보다 큰 눈알을 힘껏 집어던졌다.

이를 신호 삼아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잘 들어! 놈들이 팔 휘두를 땐 하나둘 센 다음에 막거나 앞으로 구르면 돼! 그러면 절대 맞을 일 없어!”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트롤의 공격을 그렇게 쉽게 피할 수 있다고……?”

내 조언에 일행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을 못 이었다.

그 중 유일하게 제 정신을 붙든 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키님 전 뭘 하면 될까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일행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일부러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공격했던 놈에게 파고들며 지시했다.

“니아 누나한테 신념의 방패 먼저 걸어줘! 한 놈 씩 잡아야 되니까 다른 놈들은 어그로 끌어둬야 돼!”

“네 다키님! 위대한 빛의 신이시여!”

지시를 받자마자 나나는 주문을 영창했다.

나나에게 지시한 즉시 다른 일행들에게도 소리쳤다.

“유미 넌 암흑으로 다른 두 놈 시야 가려! 니아 누나는 방어 대형으로 유미랑 나나 지켜주고 나나는 영창 끝낸 후에 니아 누나한테 우선적으로 힐해!”

“아, 알겠어!”

“해볼게요, 스승님……!”

지시를 받자 유미와 니아도 정신을 차렸다.

상황을 파악한 니아는 메이스를 움켜쥔 뒤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압!!”

방어력과 인내력을 강화해주는 둔기 계열 스킬, 근성이었다.

5초 동안 근력의 두 배만큼 방어력, 인내력이 상승하기에 탱커들에겐 거의 필수와도 같은 스킬이다.

쿠우웅!!

근성을 발동한 니아는 그 즉시 지면에 방패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그녀의 방패가 은색 빛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보호 범위를 넓혀주는 스킬, 견고한 철벽이다.

과연 골드 등급의 딜탱답게 탱킹과 관련된 스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나나가 신념의 방패까지 걸어주자 니아는 살아 움직이는 요새가 되었다.

안 그래도 방어력과 인내력이 높은데 피해 상쇄 효과까지 얻었으니 어지간해선 쓰러지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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