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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66화 (16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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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유미.

뭔가 중요한 말을 할 생각인가 보다.

나는 그녀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옆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잖아.”

“네, 네……! 감사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미는 옆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곤 한 차례 숨을 고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 계속 궁금했던 게 하나 있는데요…….”

“궁금한 거? 뭐가 궁금한데?”

운을 띄우는 유미에게 묻자 그녀는 한 차례 내 차림새를 살폈다.

그리곤 질문하기에 앞서 확인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우선 스승님은 검사이신 거죠……? 주술사가 아니라…….”

“그렇지……? 주술 같은 건 하나도 쓸 줄 몰라.”

“그런데 어떻게 원령 쇄도에 대해서 알고 계셨던 거예요……? 다른 주술들도 그렇고……. 평범한 검사치고는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아서…….”

유미의 의문을 듣고 나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았다.

원령쇄도는 주술 중에서도 나름 중상위권에 위치한 스킬이다.

그런 스킬을 알고 있다는 것은 게임 세계 기준으로 주술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주술사인 유미 입장에선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자신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주술을 나 같은 근접 계열 직업이 알고 있다니.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벼, 별 거 아니야. 여기저기 여행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알게 된 거지. 원령쇄도 쓰는 주술사도 많이 만나봤고.”

“그, 그런가요……?”

“그래, 그래. 원래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나랑 상관없는 지식들도 주워듣기 마련이야.”

괜한 의심을 받고 싶지는 않아서 적당히 말을 지어냈다.

이 세계에서 나는 아주 먼 타지에서 온 방랑자라는 설정이니까 충분히 먹힐 거라고 본다.

내 예상대로 유미는 그 말 한 마디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의심을 완전히 지운 건 아니었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더 이상 캐묻지 않는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유미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허튼 소리.”

“응……?”

갑자기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분명 유미의 것인데, 말투라던가 분위기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내가 잘못들은 건 줄 알았다.

그 목소리가 유미의 입에서 나오는 줄도 몰랐다.

내가 그렇게 당황하는 사이 유미는 날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도 참 조악하구나. 고작 그런 헛소리로 신의 눈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어쩐지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바로 앞자리에는 제이드가, 조금만 떨어진 곳엔 나나와 니아가 있음에도 유미의 목소리만 들렸다.

거기에 더해 유미의 모습도 조금 전과 어딘가 달랐다.

눈매는 날카로워졌으며 머리카락에선 보라색 빛이 은은하게 흘렀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돌변한 유미와 함께 다른 이들로부터 단절된 것이었다.

“여우신……?”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할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유미가 내림받은 신이 그녀의 몸을 차지한 것이리라.

“호오, 본녀까지 단번에 알아보다니. 꼬리도, 본모습도 꺼내지 않았건만. 역시 네놈은 평범한 칼잡이 따위가 아닌 모양이로구나?”

내가 반사적으로 이야기하자 유미, 아니 유미에게 빙의한 여우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와 동시에 거만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턱을 괴더니 다시금 날 쏘아붙였다.

“처음 볼 때부터 묘했지. 몸에 비해서 기량이 그간 봐온 어떤 무인들 보다 뛰어나다니. 어찌 보아도 정상은 아니지 않느냐.”

“아니, 잠깐만요 신령님…… 무턱대고 의심하지 마시고 제 얘기를 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일단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신의 빙의는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원작 게임에선 이벤트씬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었는데, 대체로 신이 권속을 지키기 위해서 행하곤 했다.

지금도 그러한 상황일 거다.

유미도 그렇고, 여우신도 그렇고 주술에 관해 이상하리만큼 잘 아는 나를 수상쩍게 여겼겠지.

특히 유미 보다 더 많은 걸 간파한 여우신은 날 위험요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질문은 본녀가 하겠다.”

“억……?!”

내가 여우신에게 반박하려 할 때였다.

등받이에 기댄 여우신이 갑자기 내게 발을 내밀었다.

스타킹에 감싸인 유미의 예쁜 발로 내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신발도 벗고 올라가서 부드러운 촉감이 얼굴에 그대로 닿았다.

말을 틀어막는 태도가 짜증날 만도 한데,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스타킹과 발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 때문에 불평할 틈이 없었다.

“시치미 뗄 생각 말고 네 녀석의 정체를 밝히어라. 대체 뭐하는 녀석인 게냐?”

“으웁……! 으부웁!”

여우신은 비단 발로 입을 막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입에다 가져단 발을 위아래로 비벼댔다.

덕분에 스타킹의 부드러운 감촉을 안면 전체로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포상에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더 해달라며 애원하고 싶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쾌락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이내 여우신의 다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푸하……! 아니 말을 하라면서 입을 틀어막으면 어떻게 말해요?!”

“어머, 그것도 그렇구나. 본녀의 실수다. 미안하다.”

내 항의에 여우신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사과했다.

물론 미안한 기미는 1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내 눈앞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서 오히려 열 받았다.

“아무튼 본녀는 네놈 정체를 알아야겠다. 애초에 우리 아가를 사지로 끌고 가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정체까지 숨기다니, 용납할 수 없다!”

다른 쪽 발로 내 얼굴로 내밀며 소리치는 여우신.

이러다가 발 페티시 생기겠다. 여우신도 은근히 유미의 매력을 어필하고 있는 거 아닐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녀의 다른 쪽 발도 붙잡았다.

“유미한테 이미 말했잖아요. 그냥 여행하면서 이것저것 알게 된 것뿐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네놈 거짓말은 조악하다. 진실이 아닌 게 뻔히 보인다 이 말이다.”

그리 말한 여우신은 아예 수영하듯 다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녀를 보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내가 6천 시간 동안 쌓아온 실력과 지식을 어떤 식으로 포장해야하지?

방법을 궁리하던 나는 문득 다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나와 여우신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아마 여우신의 권능으로 주의를 돌리게 해뒀을 거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들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료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면 다소 과감한 선택지를 골라도 되겠지.

나는 조금 더 고민하는 척 하고 마지못해 말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네요, 신령님한테만 특별히 말씀드릴게요. 대신 유미나 다른 동료들한텐 말하지 마세요.”

“호오? 대체 무슨 비밀이 있기에 그렇게나 조심스러운 게냐?”

내가 입을 열 기미를 보이자 여우신도 귀를 쫑긋거렸다.

어느덧 유미의 머리 위에는 보라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여우귀가 생긴 것이다.

내심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사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고요.”

“인간이 전생의 기억을? 그거 참 흥미로운 이야기로구나. 계속 말해보아라.”

먹힌다.

여우신은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시 그렇구나, 싶은 태도로 빠르게 수긍했다.

그녀 입장에선 내 지식과 실력을 이해할 방도가 없으니 당연하다.

나는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걸 참으며 이실직고하는 척을 했다.

“제 전생은 올림포스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단편적으로 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저는 신의 피를 이어받은 전사였던 것 같고요.”

“흐으음~ 그 변태 녀석들 피를 이어받은 전사라. 그렇다면 그 정도 무력도 이해가 가는구먼.”

말을 꺼낼 때마다 여우신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녀의 안색을 한 번 살핀 나는 잡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숨긴 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굳이 대놓고 말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감춘 것뿐이에요.”

“그래, 그렇게 복잡한 과거사가 있었다면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만도 하지. 본녀가 이해하마.”

이제야 의심을 지운 듯 여우신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허나 의심이 사라졌다고 해서 경계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장원이란 곳에 들어가는 것도 네 과거사와 관련되어 있겠구나, 그렇지?”

한층 더 날카로워진 눈으로 여우신이 날 꿰뚫어봤다.

내 과거와 지혜 잃은 장원은 개뿔 아무 상관도 없다.

하지만 나는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여, 역시 신령님이시군요. 거기까지 눈치 채신 겁니까?”

“카하핫! 그렇고말고! 본녀의 눈썰미를 얕보지 마라. 본녀가 얼마나 대단한 신령인데~”

내가 조금 띄워주니까 여우신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유미가 할머니라고 불러서 점잖은 성격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방정맞다.

말이 신령이지 성격만 봐선 애니에서 나오는 로리할멈 같았다.

“신령님 생각이 맞아요. 저는 전생에서부터 이어져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장원으로 가는 겁니다. 그걸 위해 동료들을 모은 거고요.”

이 이상 가만히 두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내가 서둘러 이야기하자 여우신은 아예 자리에 드러누웠다.

유미의 모습으로 저러니까 뭔가 적응이 안 됐다.

“뭐, 우리 아가가 자진해서 참가한 거니 이 이상 뭐라 하진 않으마. 그래도 스스로의 정체를 솔직하게 밝힐 수 있는 녀석이니 믿을 만은 하구나.”

전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는데.

“기왕 이렇게 이야기도 나눈 거 본녀도 도와주도록 하마. 네놈도 우리 아가를 도왔으니 답례를 해야겠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우신은 갑자기 협조적으로 나왔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여우신의 원조를 받게 됐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도와줄지는 모르나 그래도 나름 신인데 유용한 도움을 주지 않을까.

정확히 어떻게 도와줄 거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거침없이 달리던 마차가 정차하더니 앞쪽에서부터 반드 씨가 우리를 불렀다.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말씀하신 대로 남쪽 숲 초입입니다.”

“어이쿠, 이제 그만 가봐야겠구먼. 아무튼 우리 아가 잘 부탁하마.”

반드 씨의 말을 듣고 여우신도 모습을 감췄다.

그와 동시에 단절되어 있던 공간도 원래대로 돌아갔고 동료들이 나와 유미를 인식하게 됐다.

“얼른 가자, 그 거처란 게 어떤 건지 좀 보여주라고.”

“저도 빨리 보고 싶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들이 내게 채근했다.

나 역시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고, 여태까지 빙의되어 있던 유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어, 어라? 내가 뭐하고 있었지……?”

아무래도 빙의되어 있었을 때의 기억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잠깐 졸은 거 아니야? 나한테 기대서 꾸벅거리던데.”

“지, 진짜요?! 죄송해요 스승님……!”

내 거짓말에 유미는 화들짝 놀라며 허리 숙여 사과했다.

나는 그런 유미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그녀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태워주셔서 고마워요 반드 씨. 저희는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니까 오전 7시쯤에 다시 와주세요.”

“알겠습니다. 시간 맞춰 모시러 오죠.”

내 부탁을 들은 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몰았다.

에보니는 우리와 함께 성소로 가고 그는 원래 마차를 끌던 백마와 함께 율리아나로 돌아간 것이다.

마차도 같이 성소에 들여놓으면 좋겠지만 불편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반드 씨에겐 미안하지만 귀찮더라도 왕복을 해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반드 씨를 돌려보낸 뒤 우리는 숲 속으로 발을 들였다.

숲은 오늘도 참 평화로웠다.

가끔 왜소한 고블린 몇 마리가 얼핏 보이긴 했지만 우리를 보자마자 도망치거나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그런 고블린들을 보며 나나가 홀장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다키님, 저기 보세요! 고블린 새끼들이에요! 잡아 족치죠!”

던전에서 고블린들에게 시달린 탓일까.

나나는 고블린들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 모양이다.

홀장을 움켜쥔 그녀의 얼굴에선 살기가 엿보였다.

“저런 거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저 정도 규모론 우리한테 덤비지도 못할 테니까.”

유난히 적의를 드러내는 나나에게 니아가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니아의 조언에 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 왜요? 그래도 몬스터잖아요?”

“몬스터여도 죽고 싶진 않은 거지. 결과가 뻔한 싸움인데 뭐 하러 덤비겠어?”

이번에 대답한 건 제이드였다.

말을 마친 뒤 그는 바닥에서 주운 돌멩이를 하나 집어 고블린들에게 던졌다.

[키이이이잇!]

[크랄타! 크탈라 쿤 다!]

발밑에 돌멩이가 떨어지자 고블린들은 허겁지겁 도망쳤다.

남쪽 던전에서 덤벼들던 고블린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꼴사납게 도망치는 고블린들을 보며 제이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런 놈들은 보통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놈들이야. 한 마디로 낙오자들이지.”

“낙오자…….”

“그래. 본성이 어디 안 가서 행인을 노리곤 하는데, 모험가들은 무서워해서 조금만 겁줘도 쉽게 도망쳐.”

제이드의 설명에 나나와 유미가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베테랑은 다르네요.”

“그러게요……, 공부가 돼요…….”

두 사람의 말에 나 역시 동감했다.

확실히 니아와 제이드를 보면 숙련된 모험가라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지금도 그냥 평화롭게 걷고 있는 듯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수시로 주위를 경계하거나 흔적을 확인하는 등 언제라도 기습에 대비할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행동들은 의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에 배인 것처럼 보였다.

과연 골드 등급이 괜히 골드 등급이 아니구나.

나도 새삼 니아와 제이드의 사주 경계를 보며 이것저것 배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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