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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65화 (16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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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

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세이나에게 이야기했다.

“고마워요 세이나 씨. 마침 마차 한 대 필요했는데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요.”

내 인사에 세이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 사무장으로서 지시 자항을 이행한 것뿐입니다. 감사하려든 서천 클랜과 바리 여신에게 감사하세요.”

뭐랄까, 처음부터 대체로 그런 분위기였지만 세이나의 언행 하나하나엔 나를 향한 불만이 드러나 있었다.

여전히 내가 장원으로 들어가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상대하는 입장에선 다소 불쾌하지만 마냥 기분 나빠할 일도 아니다.

어찌 보면 그녀의 반응이 가장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게임 세계의 관점으로 봤을 때 아라크네의 이코르를 연구하는 것은 장원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다.

반면 내가 그걸 들고 장원에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거다.

그녀 입장에선 비정상적인 지시를 내리는 윗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겠지.

덩달아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죽으러 가는 날 보며 답답함을 느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기적을 보여줄 생각이다.

고작 다섯 명이어서 장원을 클리어하는 업적을 현실로 끌고 올 거라 이 말이다.

이참에 그녀에게도 이야기해두는 게 좋겠다.

나는 제시에게 마차 사용법을 들으면서 이야기했다.

“세이나 씨.”

“네?”

“아라크네 이코르 말인데요, 그거 이미 써버렸어요.”

내 말에 세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악스러운 얼굴로 동공을 확대하는 그녀였지만 나는 더한 말을 꺼냈다.

“지금쯤 솜씨 좋은 대장장이 누님이 칼로 만들어뒀을 거예요. 당연히 연구 재료로 쓸 수도 없겠죠.”

“그, 그게 무슨……!”

내 폭탄 발언에 세이나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입에선 순간 오만가지 욕설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못 잇는 세이나를 보며 나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성공할게요. 이기고 돌아오면 세이나 씨도 기분 풀어요.”

자신감이 가득한 어조로 말한 뒤 마차에 올라탔다.

세이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쯤 그녀의 머릿속에선 다 끝났다는 생각 밖에 없으리라.

괜한 미움을 받은 것 같지만 상관없다.

가장 큰 기쁨은 가장 암담할 때 찾아오는 법이니까.

내가 장원 공략을 마치고 오면 세이나도 날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마차에 올라타자 앞쪽 창문을 통해 마부가 보였다.

길드 측에서 마부를 따로 붙여준 덕분에 누구 한 명이 마차를 몰 필요는 없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반드. 너무 무리하진 말고요.”

우리의 승차를 확인한 후 제시가 마부에게 말했다.

마부석에 앉은 사람은 웬 주황색 로브를 뒤집어 쓴 남성이었다.

얼굴에 이상한 가면을 써서 수상쩍기 그지없었는데 제시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판타지 세계여서 저 정도 괴상함도 용납이 되는 건가.

새삼 게임 세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문을 품게 됐다.

이럴 거면 내 팬티 차림도 이상하게 보지 말던가.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아가씨. 사고 없이 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제시의 인사에 반드라는 남성도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목소리만 들어선 멀쩡한 사람인 거 같은데 보면 볼수록 기분이 묘했다.

마치 추리물에서 대놓고 나온 범인을 엔딩까지 지켜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우리는 이상한 마부와 함께 성문으로 향했다.

에보니는 길드에서 지원해준 백마와 함께 마차를 끌게 됐다.

똑똑한 녀석이라서 그런지 마부가 별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였다.

같이 마차를 끄는 다른 말도 에보니의 지시에 따르는 듯했다.

“네 말 진짜 똑똑한데? 행동거지가 무슨 사람 같아.”

문득 에보니를 지켜보던 제이드가 흥미롭다는 어조로 말했다.

사냥꾼이라서 그런지 그는 동물들에게 관심이 많은 듯했다.

원작 게임에서도 사냥꾼 빌드를 타면 동물 친화 능력을 얻게 되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종속의 인이란 거 새겨서 그런 거 아니야? 그거 새기면 말 잘 듣게 된다던데.”

“말 잘 듣는 거랑 똑똑한 건 다르지. 시킨 일 잘 하는 거랑 자기 스스로 잘 하는 게 같진 않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종속의 인이란 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게 해주는 거지, 딱히 말의 지능 자체를 높여주는 주문은 아니다.

그렇다면 에보니가 자체적으로 똑똑하단 건데, 동물에 대해 잘 아는 제이드가 봐도 놀랄 정도면 에보니가 보기보다 굉장한 말인가 보다.

“진짜 마구간에서 구한 녀석 맞아? 저런 애를 마구간에서 그냥 냉큼 내준다고?”

“가격이 좀 셌던 거 빼곤 별 거 없었는데…….”

“흐으음…… 그렇단 말이지…….”

내 말을 듣고 제이드의 흥미는 의심으로 바뀌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마차를 끄는 에보니를 예의 주시했다.

기분 탓일까, 에보니 역시 고개를 돌려 잠깐 마차 안쪽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제이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동조하고 싶진 않았다.

가디스 던전의 말들은 그래봤자 탑승물에 지나지 않는다.

뭐 유니콘 정도 되는 녀석이라면 모를까, 그냥 덩치만 클 뿐인 에보니한테 특별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리는 없다.

그냥 평범한 말치곤 똑똑한 편에 속하는 거겠지.

그리 생각한 나는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마차 타는 것도 생각보단 나쁘지 않네.’

성문을 넘을 때까지 마차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자동차 같은 승차감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았다.

내부 구조도 깔끔했고 좌석도 편안했다.

벨벳 쿠션이 주는 푹신함은 장기간의 여행에도 전혀 피로감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다섯 명이 들어와도 공간이 남아돌 정도로 넓고 쾌적했다.

“앗, 다키님! 이것 좀 보세요!”

내가 등받이에 기대며 바깥 풍경을 구경할 때였다.

나나가 좌석 밑에서 웬 상자 하나를 꺼내고 있었다.

“그건 또 뭐야?”

“길드에서 넣어준 거 같은데요? 안에 뭐가 되게 많아요.”

나나의 말을 듣고 나도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쯤 나나가 상자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온갖 보급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와, 이게 다 뭐람?”

“정말 이것저것 많이 들어 있네요……?”

꽉꽉 채워진 상자 내부가 공개되자 니아와 유미도 고개를 내밀었다.

나나가 발견한 상자에는 생명력, 마력, 기력 포션이 각각 스무 병씩은 들어 있었다.

한 병만 최소 1천 아웬씩은 하는 포션들이 스무 병씩이라니.

안에 들어 있는 포션만 해도 6만 아웬은 거뜬히 넘을 것이다.

더군다나 포션들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생명력 포션 하나를 집어든 니아는 깜짝 놀라며 얘기했다.

“이거 서천에서 직접 만든 거잖아! 다른 데서 만드는 포션보다 훨씬 비싼 거라고!”

“왜 더 비싼데?”

“그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좋으니까 그렇지! 서천이 괜히 제약 분야에서도 1위인 게 아니야.”

니아가 설명해주길 서천은 무력적으로 강대한 클랜이지만 제약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제조한 포션은 성능부터가 다른 곳에서 만든 곳과 차원이 다르다.

다른 곳은 회복도 오래 걸리고 출혈과 골절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에 반해 서천제 포션은 한 번에 생명력을 회복시키는데다 출혈과 골절까지 치료한다는 것이다.

설명을 들은 나는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포션을 내려다보았다.

‘개사기잖아……?’

원작의 포션은 넥타르의 전형적인 하위 호환 아이템이었다.

30퍼센트의 생명력을 회복하는데 무려 10초나 걸리는 효율 낮은 회복템이었던 것이다.

유일한 장점이라곤 소지 제한이 없다는 것뿐.

그래서 원작의 플레이어들은 넥타르를 다 쓰고 나서야 그때부터 포션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이 포션은 회복도 한 번에 하는데다가 부상도 치료한다.

듣기만 해선 넥타르 보다 고성능의 포션인 거다.

게다가 특수 제작한 유리에 담아 파손의 위험도 없다고 하니 사실상 횟수 제한 없는 넥타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좋은 포션이 있으면 넥타르 쓸 필요가 없겠는데?’

내 플레이 성향 자체가 최대한 안 맞는 거라 넥타르를 쓸 일은 거의 없었다.

나나까지 있으니 넥타르가 회복 아이템으로 나설 일은 더더욱 없어질 거다.

하지만 넥타르의 기능은 비단 회복뿐만이 아니다.

장원에 도착하면 넥타르의 또 다른 기능이 개방된다.

다수의 회복 수단을 갖췄으니 그 기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리라.

“먹을 거랑 온풍구 같은 것도 들어 있어요! 어라? 이건 또 뭘까~?”

“아…… 그건 아마 텐트일 거예요. 축소 마법으로 크기를 작게 한다고 들었어요.”

내가 포션을 보며 놀라고 있을 때 나나는 계속 보급품 상자를 뒤졌다.

상자에는 포션 외에도 던전에서 먹을 보존 식량과 야영 장비 등이 들어있었다.

던전 공략에 필요한 물품들은 전부 마련해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테르니아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모양인지 정작 저주를 막아주는 아이템은 없었다.

물론 나나가 있으니 그 부분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큰돈 들여서 보급품을 준비하지 않아도 됐으니 이편이 더 좋았다.

특히나 눈여겨볼 것은 노란색으로 빛나는 금속 구슬이었다.

금속 구슬을 발견한 나나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보여주었다.

“다키님 이건 뭘까요? 온퐁구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나나 말대로 그것은 뜨거운 바람을 낼 때 사용하는 온풍구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허나 온풍구와 다르게 조금씩 스파크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벼락 폭탄이란 거야. 던지면 폭발하면서 범위 안에 있는 적들을 전부 감전시켜.”

“헤엑, 개쩌네요! 한 번 던져 보고 싶어요!”

“마, 마차 안이니까 제발 참아주세요……!”

내 설명을 듣자 나나는 눈을 빛내며 벼락 폭탄을 던졌다 받았다 했다.

그것을 본 유미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나나를 말렸다.

물론 나나도 생각이 있으니 진짜 던지진 않겠지만 그녀의 눈을 보면 꼭 장난으로 그러는 것 같진 않았다.

그보다 벼락 폭탄이라니. 이 부분은 꽤 센스 있는걸.

조류형 적이 나오는 장원에선 이보다 더 유용한 아이템이 없다.

말했듯이 조류형 적은 기본적으로 전격 속성에 추가 피해를 받기 때문이다.

수량이 3개 밖에 안 됐지만 위험하거나 수적으로 열세일 때는 이것만한 해결책이 없을 거다.

이런 마법 폭탄들이 엄청난 고가임을 생각하면 서천 클랜이 진짜 작정하고 지원한 모양이었다.

‘바리 쪽에서 이렇게 나오면 나도 클랜 가입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새삼 서천 클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문득 니아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바로 장원에 들어가는 건 아니라면서?”

그러고 보니 유미, 니아, 제이드한테는 아직 성소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지.

지금 바로 설명해줄까 싶었지만 마부석에 앉은 반드 씨가 신경 쓰였다.

질문 받은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적당히 대답했다.

“남쪽 던전 주변에 내 거처가 있어. 거기서 최종 정비한 다음에 출발할 거야.”

어느덧 마차는 성문을 지나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들으며 세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처가 남쪽 던전에 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거기엔 동굴이랑 숲 밖에 없잖아.”

“혹시 뭔가 숨겨놓은 거라도 있으신 건가요……?”

역시나 세 사람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들은 여명의 투사에 대해서도, 성소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니까.

세 사람 입장에선 난데없이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 밖에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성소에 대해서 직접 설명해주기도 뭐했다.

반드 씨의 존재를 차치하더라도 난데없이 난 여신의 선택을 받은 영웅이다, 지금부터 여신님을 뵈러 갈 거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믿기 힘들 테니까.

“도착하면 어련히 알게 될 거야. 이상한데 안 끌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결국 나는 다시 한 번 대답을 회피한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푸른색 하늘과 뭉게구름이 멋졌다.

탁 트인 평원의 전경과 아름다운 꽃밭을 보니까 절로 힐링되는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보며 동료들은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그래도 당장은 군말 없이 자기 할 일을 했다.

숲 한 가운데에서 정비를 한다는 말이 수상쩍긴 해도 아예 용납이 안 되는 수준까지는 아닌 모양이다.

“뭐, 파티장이 말하는데 들어야지.”

“던전 근처에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건지 참…….”

제이드는 동물친구를 어깨에 앉힌 채 활시위를 점검했고 니아는 나나랑 이야기를 나눴다.

나나랑도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둘 다 워낙 친화력이 좋아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금방 트인 것이다.

나도 조용히 경치 구경이나 하려고 할 때였다.

유미가 슬쩍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응? 유미야 왜? 뭐 할 말 있어?”

나나랑 같이 있던 그녀가 다가오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에 유미는 일부러 앞머리를 더욱 내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보였는데, 뭔가 굉장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저……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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