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예상치 못한 동행
유미에 이어서 제이드도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아침 일찍부터 기다려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는 지루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어서 빨리 모험을 떠나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듯했다.
“그나저나 다키님, 니아 언니랑 제이드 오빠도 같이 간다면서요? 어쩌다가 끼게 된 거예요?”
내가 일행들에게 사과한 직후 나나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단순한 궁금증으로 물어본 게 아니라 거의 의심에 가까운 눈빛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누구나 들어오길 꺼려하는 장원 공략 파티에 갑자기 두 사람이나 증원이 되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다.
“두 사람도 장원에 볼 일 있대. 마침 탱커랑 원딜 필요했는데 적임자라서 데려가기로 했어.”
“흐으음…… 그래요?”
내 말을 들은 나나는 흥미롭다는 듯 니아와 제이드를 살폈다.
아마 두 사람이 같이 갈 만한 재목인지 눈대중을 해보는 것이리라.
그녀 입장에선 갑자기 편승한 두 사람이 믿음직스럽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대놓고 의심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은연중에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참 철두철미한 성격이구나. 내심 그렇게 생각할 때 이번에는 유미가 안도하며 말했다.
“저희들만 간다고 했을 때는 살짝 불안했는데…… 골드 등급 선배님들이 따라와 주셔서 다행이에요.”
두 사람의 합류가 썩 달갑지만 않은 나나와 달리 유미는 전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럴 만도 하다.
서포터인 그녀 입장에선 탱커가 있는 편이 훨씬 안심이 될 것이다.
반대로 탱커가 없었다면 언제 뚫고 올지 모르는 적의 공격을 항상 걱정해야 되겠지.
나 역시 니아가 파티에 들어와 줘서 참 든든하다.
유미와 나나를 지키며 적들까지 처치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니 말이다.
“간다고 한 이상 밥값은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지 제이드?”
“그래, 이렇게 귀여운 애들이랑 같이 다니는데 못난 꼴 보일 수는 없지.”
유미를 안심시켜주려는 건지 니아와 제이드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나와 눈을 마주쳤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의식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모양이다.
물론 나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었지만 니아의 감도 보통은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저 형도 꽤 본격적으로 준비해왔는데.’
일행들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나는 제이드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죽 갑옷과 은폐용 망토를 장비한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사냥꾼이었다.
게다가 손에 들고 있는 롱보우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으며 등에는 다양한 화살이 들어 있는 화살통을 걸었다.
3강짜리 활과 특수 화살들로 무장한 것이었다.
또한 벨트 주머니엔 각종 소비 아이템들까지 가득 챙긴 듯했다.
그 모습만 봐도 제이드의 열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지만 진짜는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활시위를 점검하는 그의 눈빛에선 결연한 의지가 일렁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강제로 따라가는 것 같았던 제이드였으나 지금은 나름대로 각오를 다진 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색이었다.
초보 모험가들이 따라간다는 이야기에 선배로서 책임감도 느꼈으리라.
“다키야, 이 이상 모일 인원은 없는 거지?”
“응? 어, 맞아. 다 모였어.”
”그럼 슬슬 출발할까? 가기 전에 파티 등록도 하고.”
일행들을 한 번 훑어본 뒤 니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모험을 떠나기 전엔 파티 등록이란 것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범죄와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데 꼭 그런 이유 때문에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다.
파티를 맺은 채로 업적을 쌓으면 그만큼 실적이 더 많이 올라간다.
흔히 게임에서 파티 보너스로 경험치를 더 받는 것처럼 말이다.
전리품 분배는 물론 실적 상승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안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접수처에서 파티 등록을 마친 우리는 길드를 나섰다.
파티 등록 서류에 행선지를 적어야 했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혜 잃은 장원이라 적었다.
그 때문일까, 접수원을 시작으로 이를 엿듣고 있던 모험가들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 남자…… 정말로 장원에 들어갈 생각인가……?”
“나 친구한테 들었어, 주점에서 진지하게 얘기했다던데.”
“그러면 장난으로 하는 소린 아니란 거군…….”
“던전 하나 공략 했다고 기고만장해진 건가? 아무리 그래도 아테르니아를 들어가려 하다니…….”
“저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밖으로 향하는 내내 사람들이 우릴 보고 수군거렸다.
그 중 대부분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고작 다섯이서 장원으로 들어가다니.
수십 명이 도전해도 부족한 마당에.
자살하고 싶으면 목을 매다는 게 나을 텐데 등 온갖 부정적인 말들만 들려오는 것이었다.
“으으…….”
여기저기서 안 좋은 얘기가 들려오자 유미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유미는 나를 따라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싶다 했지.
그녀도 각오를 다졌겠지만 사방에서 안 될 거라 얘기하면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을 거다.
“유미 쟝, 저런 말들은 죄다 무시해요. 어차피 우리하곤 상관없는 얘기잖아요.”
유미가 계속 땅만 보며 걷고 있을 때 나나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기죽은 유미와 달리 나나는 시종일관 당당한 기색이었다.
비웃거나 무시하는 투로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눅 들지 않고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봤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그 시선 때문에 험담하던 이들은 본인도 모르게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런 나나가 격려해주니 유미 역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나나의 말에 맞장구치며 나는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 우리는 무조건 클리어할 거라고. 아무도 죽지 않고 말이야.”
“지당하신 말씀이죠! 다키님이 있는데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다키 말이 맞아. 기합 넣고 가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어.”
별 거 아닌 이야기였지만 내 말 한 마디가 일행들에게 힘을 불어넣은 듯했다.
특히 니아의 눈에선 투지가 이글거렸다.
활활 불타는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길드 건물에서 나온 나는 일단 에보니를 데려오기 위해 마구간에 들렀다.
말을 타고 다니는 모험가들이 많아서 길드 마구간도 규모가 꽤 컸다.
길드에서 운용하는 마차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여러 말들을 지나 에보니 앞에 다다르자 나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와, 와! 얘는 또 누구예요?! 설마 다키님 말이에요?!”
“아, 응. 인사해 에보니야.”
“개쩔어~! 이렇게 커다란 말은 또 어디서 데려오신 거예요!”
에보니를 본 나나는 신이 나서 방방 뛰어댔다.
그런 나나에게 나는 에보니를 데려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경위랄 것도 없이 그냥 제 값 주고 분양 받아온 거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돈만 내면 말도 똑똑해지는 세상이라니, 참 편리하네요!”
내 이야기를 들은 나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연신 에보니를 만졌다.
[푸릇, 푸르릇.]
방정맞은 손길에도 에보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쾌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점잖게 꼬리를 살랑거릴 뿐이었다.
참 생긴 거하고 다르게 온순한 녀석이구나.
비주얼만 보면 손대는 순간 뒷발굽으로 턱주가리를 박살낼 것 같은데.
한동안 에보니를 쓰다듬고 토닥이고 주무르길 잠시.
나나가 어린애처럼 똘망똘망한 눈으로 보챘다.
“다키님 저 말 타볼래요! 타보고 싶어요!”
손을 번쩍 들며 애원하는 나나.
말하는 걸 보보니 어지간히도 에보니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래, 뭐. 에보니가 괜찮다는 거 같은데 한 번 타봐.”
“아싸~”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나는 낑낑거리며 에보니 위에 올라타려 했다.
기술이 없어서 제 자리에서 뜀박질만 반복했는데, 그걸 보다 못한 에보니가 도와줘서 겨우 올라탈 수 있었다.
“이햐아! 저 말 처음 타 봐요! 생각보다 엄청 높구나~”
“신났어, 아주.”
아침부터 참 소란스럽다 싶었지만 나나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문득 니아가 얘기했다.
“이렇게 좋은 말을 데리고 있었구나…… 그런데 어떡하지? 나랑 제이드는 말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니아의 말을 듣고 나는 불현 듯 우리 파티의 문제점을 인지했다.
나는 에보니를 가지고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말이 없었다.
유미랑 나나는 물어볼 것도 없고, 니아랑 제이드 역시 너무 고가여서 구매하지 못했단 것이다.
하긴, 골드 등급이라 해도 10만 아웬은 선뜻 내놓을 수 있는 돈이 아니겠지.
율리아나 근처에서 벗어날 일이 없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 파티의 이동 수단을 걱정할 때가 온 듯했다.
우리가 속도를 맞추려면 전원이 말을 구하거나 에보니가 경보로 이동해야 한다.
기껏 산 말을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니. 그것만큼 아쉬운 일도 없을 거다.
무엇보다 아테르니아는 꽤 멀리 있다.
성소에 한 번 들른 다음에 남쪽 동굴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한 나절은 꼬박 걸릴 것이다.
유르돌리아 최남단에 위치한 지역인 만큼 가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들 말 하나씩 사라고 하기는 좀…….’
다들 지금 당장 10만 아웬을 지출하는 것은 무리일 거다.
뭣하면 내가 사줄 수도 있지만 전원이 말을 잘 타리란 보장도 없다.
마차라도 하나 구비해야 되나, 그렇게 생각던 도중이었다.
“여어 다키~ 에보니는 어때? 탈 만해?”
문득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먼저 쾌활하게 인사하며 다가온 사람은 제시였다.
에보니를 분양받은 후로 하루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길드 마구간에서 그녀를 만나니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더욱 의아한 것은 제시 옆에 세이나가 같이 있다는 점이다.
“제시랑 세이나 씨? 두 사람이 여긴 웬 일이에요?”
조금 놀란 심정으로 묻자 제시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길드한테 주문 받았거든. 웬 모험가를 지원해야 한다고 마차랑 훈련된 말 한 마리 구매하겠다는 거야.”
“마차랑 말을 지원한다고요?”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물어보자 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반사적으로 세이나를 바라보았다.
정황상 그 지원 받는 모험가란 건 다름 아닌 나일 것이다.
그 말은 길드가 내 장원 공략을 지원한다는 뜻이겠지.
갑작스러운 푸쉬에 고마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세이나 씨?”
“으읏…….”
질문을 건네자 세이나는 시선을 피했다.
뭔가 분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마지못해 사무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상부에서 직접 하달한 내용입니다……. 길드에선 실버 모험가 감다키의 아테르니아 공략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했어요.”
“실버 모험가라고……?”
“다키가 말이야?”
갑작스러운 승급에 나도, 다른 일행들도 놀랐다.
가장 놀란 건 니아와 제이드였다.
자신들은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려서 달성한 등급을 고작 며칠 만에 달았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네, 이번 아라크네 토벌과 고블린 소굴 소탕의 실적으로 승급하셨습니다.”
제이드의 물음에 대답한 뒤 세이나는 마구간 한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튼, 길드는 모험가 감다키에게 아테르니아까지 이동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을 제공하는 바입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웬 호화롭게 꾸며진 마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에보니와 대조되는 백마 한 마리가 묶여 있었으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벨벳으로 되어 있다.
척 봐도 엄청 비쌀 거 같은 마차였다.
허나 마냥 사치품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닌 게 곳곳에 금속으로 덧댄 부분들이 존재했다.
완전 전투용 마차까진 아니더라도 실용성을 중시한 외견이 눈에 띄었다.
“이걸 저한테 준다고요? 진짜로요?”
“그래요, 대여가 아닌 제공입니다. 모험가님 마음대로 편하게 사용하시면 되세요.”
거듭된 질문에 세이나는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말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 했다.
상부의 명령이어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느낌이었다.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가 생각해도 아니꼬울 만하다.
입성한지 며칠 되지도 않은 모험가가 실버 등급으로 승급한 것도 모자라 장원을 공략하려 한다.
남들 보기엔 미친 짓으로 밖에 안 보일 텐데 그런 기행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니.
상부의 결정에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하겠지.
물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길드에서 왜 갑자기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거지?
내가 일련의 사건을 해결할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런저런 추측을 떠올릴 때쯤 세이나가 먼저 설명에 들어갔다.
“비단 길드에서만 지원하는 건 아닙니다.”
“또 누가 지원하는데요?”
“서천 클랜에서도 모험가님의 행보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지원은 길드와 서천 클랜이 공동으로 추진한 거죠.”
세이나의 말을 듣고 바로 이해했다.
한 마디로 바리 쪽에서 무언가 수를 쓴 것이리라.
압력을 넣었거나 길드 상부를 잘 꼬드긴 거겠지.
동시에 다른 클랜이 날 채가지 못하도록 길드 차원에서 손 써 달라 요구했을 테고.
그 여신님도 참 어지간하구나.
포기할 생각이 없는 그 집념은 무서웠지만 이토록 시기적절하게 도움을 주니 무척 고마웠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결국 컴퓨터를 새로 사게 됐는데 배송이 상당히 오래 걸렸네요. 본의 아닌 일주일 휴재를 때려버리고 말았으니 꾸준히 업로드하겠습니다.
조공이라기엔 뭐하지만 여신님의 선화가 나왔습니다. 작품 설정에 올려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