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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동행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책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무리겠죠. 죽어 있는 상태로도 이렇게나 강력한 마력이에요. 하백 때와는 차원이 달랐겠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뒤, 책사는 한 차례 숨을 가다듬으며 결론을 내렸다.
“온전한 상태로 활동했다면 이 마을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거예요……. 어쩌면 율리아나까지 잿더미가 됐을지도 몰라요…….”
책사의 말에 키리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더 강해진 뒤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로선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아마 그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 녀석들이라면 예의 그 자들 말씀입니까?”
“응, 자기들이 천좌니 뭐니 떠들어댄 놈들……. 그 놈들이 아무리 꼼수를 써봤자 상대도 안 될걸.”
생각만 해도 불편한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키리야는 시체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칠흑검 클랜이 발견한 시체는 다름 아닌 아크 데몬의 것이었다.
검게 그을린 놈의 시체를 보던 키리야가 전율에 떨며 말했다.
“이런 괴물을 쓰러뜨린 사람은 얼마나 더 괴물일까……?”
“정황상 소환 직후에 전투가 있었던 듯해요. 당시엔 많이 약화되어 있었겠죠. 이계의 존재들은 현세로 올 때 소환 후유증을 겪으니까요.”
“소환 후유증?”
책사의 설명에 키리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로딘도 궁금증이 담긴 눈빛을 보내자 책사가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마스터, 물에서 살던 물고기가 육지로 나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야 당연히 숨도 못 쉬겠지…….”
“악마들도 마찬가지예요. 놈들은 본래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에요. 그래서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소환되는 순간 강한 거부 반응을 겪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의뢰주 말에 따르면 악마들은 출현한 즉시 활개를 쳤다는데, 그러면 소환 후유증을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뇨, 이 경우엔 저 대악마가 모든 후유증을 떠안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더욱더 본래의 힘을 낼 수 없었던 걸 테고요.”
책사의 말이 맞다.
다키와 싸울 당시 아크 데몬은 수많은 악마들의 소환 후유증을 떠안고 있었기에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허나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크 데몬을 쓰러뜨렸다는 것은 무시할 만한 업적이 아니다.
실제로 성화 교단에서 파견된 기사들은 약화된 아크 데몬과 싸웠을 때도 속수무책이었으니까.
그뿐이랴, 놈은 성화 기사단뿐만 아니라 영주의 사병들까지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이에 대한 정보를 모두 전해들은 칠흑검 클랜으로선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크 데몬도, 놈을 쓰러뜨린 정체불명의 인물도 말이다.
“대체 누굴까…….”
책사의 설명들은 키리야는 전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성화 교단의 성기사단도, 영주의 사병들조차 당해내지 못한 악마를 쓰러뜨리다니.
어떤 괴물이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여 놓은 걸까.
한동안 상념에 잠긴 키리야였으나 이는 길지 않았다.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한 단 한 명뿐이다.
하물며 자신은 그 사람을 직접 보지 않았는가.
“감다키…….”
아크 데몬의 시체를 보며 키리야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처음 봤을 때는 반신반의 했다.
몇 개월 동안 보이지 않았던 그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그때 본 팬티 차림의 남성은 감다키가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내달렸다.
동시에 그때 그 남자를 붙잡지 않았던 게 무척이나 후회됐다.
“감다키……?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스터?”
키리야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클로딘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질문 받은 키리야는 고개를 한 차례 가로젓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보다 시체를 회수하자. 참상의 원인을 발견했으니 의뢰주한테 보고해야지.”
“알겠습니다. 헌데 어떻게 보고해야 할까요……? 대악마가 누군지도 모를 인물에게 퇴치 당했다고 하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질 텐데요.”
지시를 이행하면서 클로딘이 우려를 내비쳤다.
옛날이야기처럼 지나가는 영웅이 해치워줬다는 식의 설명은 통하지 않을 거다.
대외적으로도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닐 테지.
특히 칠흑검 클랜을 고용한 의뢰주, 자네스 영주에겐 큰 타격이 될 거다.
기껏 자발적으로 악마들을 몰아내려 했는데 정작 모든 일의 원흉은 다른 사람이 처치했다니.
이런 이야기에 세간에 새어나가면 자네스 영주의 명예엔 큰 흠집이 남으리라.
이미 혼자 도망쳐 나온 것만으로도 지탄 받아 마땅한 입장이니 말이다.
“의뢰주한테는 우리가 처치했다고 보고해. 그 편이 어그로 끌기 더 쉬울 테니까.”
“누구를 향한 어그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게 있어.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그 말을 끝으로 키리야는 먼저 현장에서 벗어났다.
등을 돌려서 다른 클랜원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입가엔 참을 수 없는 희열이 떠올라 있었다.
어서 빨리 그 남자를 찾아야 한다.
그 남자와 다시 만나 격이 다른 실력을 직접 보고 싶다.
그 남자라면 분명 놈들과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테지.
율리아나로 돌아가는 즉시 다른 일을 전부 내팽겨 치고 그의 행적부터 쫓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키리야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꽈악 움켜쥐었다.
* * *
다음날 아침.
여관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상쾌하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방을 나섰다.
“하, 꿀잠.”
게임 세계에 온 이후로 거의 처음 겪어보는 평화로운 밤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쪽에 온 이후로 매일 같이 여자들과 몸을 섞으며 밤을 보냈지 않았는가.
한 평생 모쏠아다로 살아온 내게 여체와 향락이 가득 찬 밤은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만큼 피로하기도 했다.
섹스는 생각보다 몹시 힘든 것이다.
성욕 왕성한 여자들을 상대로 밤새도록 달리면 더욱 그렇고.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밤은 평안한 휴식 시간이라기 보단 쾌락을 위한 시간이 되었는데, 오랜만에 편한 밤을 보내니 아침이 달라졌다.
“나나가 없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평온할 줄이야.”
여관에서 마련해준 새 팬티를 입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며칠 동안 함께 해온 나나가 없으니 쓸쓸하기도 했지만 간만에 푹 자서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아무리 섹스가 좋아도 가끔은 이렇게 푹 자고 그래야지.
그리 생각한 나는 1층 홀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여관 식당에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시계가 하나 놓여 있었다.
척 봐도 나는 마법공학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시계였다.
시계가 표시해준 시간은 오전 8시.
엄청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피로에 쩔어 있긴 했나 보다.
대충 밤 10시쯤에 잠든 거 같은데 10시간을 내리자버릴 줄이야.
‘누나랑 형은 먼저 나갔나?’
토끼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식당을 둘러보았다.
나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그 중 모험가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니아와 제이드도 안 보였다.
모험가들은 부지런해서 휴일이 아닌 이상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다고들 한다.
그러니 다들 진즉에 일어나 길드로 향했겠지.
나도 얼른 먹고 움직여야겠다.
그리 생각하면서 샌드위치를 입 안에 우겨넣을 때였다.
“저, 저기…….”
“네?”
문득 종업원 몇 명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하얀색과 파란색을 베이스로 한 복장이 엄청 귀여웠다.
프릴이 잔뜩 달리고 가슴도 꽤나 파여 있어서 보기만 해도 간신히 가라앉은 아침 발기가 되살아날 듯했다.
“괜찮다면 이것도 드세요……!”
그렇게 귀여운 복장을 입은 종업원들이 건넨 건 과일이 잔뜩 올라간 팬케이크였다.
마치 고양이 얼굴처럼 생겼는데 향긋한 냄새가 나는 산딸기 주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뭐지? 서비슨가?
갑작스레 내밀어진 요리들을 보며 어안이 벙벙한 나였지만 일단 받기로 했다.
선물을 거절하기엔 여자애들이 너무 예쁘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건 갑자기 왜…….”
“시간이 나서 저희들끼리 만들었어요!”
“어제 들은 모험담이 너무 재밌어서, 좋은 이야기 들려주신 답례라고 할까…….”
대답하는 종업원들은 하나 같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설마 내 팬이라도 된 건가……?’
처음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성들인 요리를 서비스로 줄 리 없다.
얘들도 산양 여관의 여사장님처럼 아들 같다며 만들어준 건 아니지 않겠는가.
‘던전 하나 공략하니까 여성 팬도 생기는구나.’
원래 세계에 있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게임 세계에선 엄청 대단한 일이 되어버렸다.
물론 게임에서 클리어하는 거랑 내가 직접 클리어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긴 하다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일이 각광 받으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스트리머 활동할 때부터 그토록 바래왔던 여성 팬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화면 너머가 아닌 바로 내 옆에서 요리까지 만들어주는 여성 팬이라니.
감개무량하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종업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해요 여러분. 팬케이크 생긴 게 너무 예쁘네요. 잘 먹을게요.”
“아뇨, 아뇨! 드셔주시면 저희가 감사하죠!”
“다음에도 저희 여관에서 모험담 들려주세요!”
내 인사를 받은 종업원들은 더욱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그러곤 도망치듯이 주방 쪽으로 가더니 빼꼼 고개를 내밀고 내가 식사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그런 모습들 하나하나가 내 심금을 울렸다.
‘이러다가 진짜 연예인병 걸리겠네.’
종업원들의 시선을 즐기면서 나는 팬케이크를 맛봤다.
정성이 담긴 요리라서 그런지 유난히 맛있었다.
원래 팬케이크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거라면 매일매일 돈 주고도 먹을 수 있겠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저런 애들도 메이드로 고용할 수 있지 않을까?’
장원을 클리어한 후엔 일확천금을 손에 넣게 될 거다.
저택을 사는 것은 물론, 수많은 고용인들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오겠지.
그렇게 되면 저 종업원 친구들처럼 예쁘고 귀여운 메이드들을 잔뜩 고용하는 것도 좋으리라.
매일 아침마다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 날 챙겨주는 메이드들이라.
생각만 해도 행복해진다.
아마 나나도 팬티 벗어던지면서 좋아하겠지.
‘좋아, 다음 목표는 저택 마련이다.’
투사로서의 임무도, DLC에 대해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껏 온 게임 세계다.
즐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즐기면서 살아야지.
행복한 상상을 하며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길드로 향했다.
오늘도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길드홀로 들어서자 멤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앗! 다키님!”
가장 먼저 날 반긴 건 당연하게도 나나였다.
그녀는 주인을 반기는 댕댕이처럼 헐레벌떡 내게 뛰어왔다.
“보고 싶었어요, 다키님~! 수도원 생활 진짜 존나게 노잼이었다구요!”
한 걸음에 달려온 나나는 나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뺨을 비볐다.
하루 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나도 그녀와의 재회가 썩 반가웠다.
“나도 보고 싶었어, 나나야.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 왜 혼자 나왔어.”
“거기서 더 있다간 숨 막혀서 뒤질 것 같았다구요! 같이 있는 애들도 그렇고, 사제장 언니도 그렇고 왜들 그리 꽉 막혔는지!”
“그야 성직자들이니까 그렇겠지…….”
아무래도 나나는 신전에서 보내는 생활이 잘 안 맞았나 보다.
하긴, 그녀의 발랄하고 적나라한 성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종교 시설과는 안 어울린다.
광휘의 대신전이 성에 관대하다 해도 그녀의 섹드립을 수용할 정도는 아니겠지.
“아무튼 법술 수련한다고 수고 많았어. 이번엔 좀 어땠어?”
“헤헤, 말도 마시라구요~ 저, 같이 배우는 애들 중에서 수석이었다니까요? 해주든 보호막이든 아주 제대로 익혀왔어요!”
그 말과 함께 나나가 법술을 사용했다.
“위대한 빛의 신이시여! 당신의 위광으로 저희를 보호해주세요!”
파아아아앗!!
빠르게 영창을 마치자 그녀의 눈앞에 금색으로 빛나는 투명한 보호막이 펼쳐졌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법술, 보호의 장벽이었다.
보호의 장벽
액티브
요구 스탯: 신념 20
비용: 마력 100
사용 조건: 법술 무기 착용
습득 방법: 운명 항목에서 습득
효과: 5초간 캐스팅한 뒤 적의 공격을 상쇄하는 높이 5미터, 넓이 3미터의 빛의 장벽을 생성한다. 장벽은 시전자의 신념 x38만큼 피해를 상쇄하고 15초간 지속된다. 지속 시간이 끝나면 장벽은 자동으로 사라진다. 장벽은 오직 시전자의 전방 5미터 이내에만 생성할 수 있다.
홀장을 착용한 나나의 신념이 26인 걸 생각하면 무려 988의 피해를 상쇄하는 스킬이다.
브릴린트를 통해 더 좋은 홀장을 구하면 1000은 가뿐히 넘기게 되리라.
굉장히 강력한 스킬이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전방 5미터 앞에만 설치할 수 있다는 점, 지속시간이 있다는 점 때문에 보호 성능에 약간 하자가 생긴다.
사제가 탱커인 건 아니라서 보호 관련 스킬도 성능이 그렇게나 뛰어나진 못한 것이다.
그래도 벽을 세우거나 적의 앞길을 막는 데에 있어선 탁월하다.
장원에서도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거기! 길드 홀에서 함부로 주문 사용하면 안 됩니다!”
“앗! 죄송해요! 바로 취소할게요~”
난데없이 빛의 장벽이 나타나자 주위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이를 본 경비가 지적을 해왔고 나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법술을 취소했다.
“오, 오셨어요, 스승님……?”
“곤히 자는 것 같아서 굳이 안 깨웠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오래 잔 거 아니야?”
“뭐 어때 니아. 다키 저 녀석도 푹 자는 날이 있어야지. 나나 씨 때문에 평소엔 제대로 못잘 거 같은데~”
한 차례 소란이 가시자 다른 멤버들도 내 앞으로 다가왔다.
유미는 약속대로 잘 나와 있었고 니아와 제이드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대기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