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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62화 (16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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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동행

번외로 처참하게 불탄 주점은 우리가 첫 날 묵었던 산양이 잠드는 숲이라 한다.

거기 여사장님이 해주는 밥이 진짜 맛있었는데.

당분간은 먹고 싶어도 못 먹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누나랑 형은 프랑 누나 버려두고 이쪽 여관으로 온 거야?”

“그렇지. 그 누나 술주정에 우리까지 말려드는 사양이거든.”

“공범으로 몰려서 조사 받으면 귀찮아지니까 얼른 도망쳤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제이드와 니아가 대답했다.

그에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다.

“동료가 잡혀간 사람들치곤 둘 다 너무 태연한 거 아니야?”

살인 같은 중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친한 지인이 잡혀갔다.

판타지 세계의 정서상 감옥에서 심한 짓을 당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태평해도 되는 건가.

난 나나가 부녀자 추행이나 성폭행으로 잡혀 들어가면 걱정돼서 참을 수 없을 거 같은데.

“그야 처음이 아니니까 그렇지. 한두 번 이랬으면 우리도 도망치지 않았을 거라고.”

“얼마나 그랬기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가 진짜 그 언니 때문에 못 살아!”

내 질문에 니아는 한탄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나랑 같이 쓰리썸한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그 날 별 탈 없이 떡만 쳐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형량은 어떻게 된대? 뭐 아는 거 있어?”

니아의 심정에 공감하면서 나는 다시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대로 프란체스카가 옥살이를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들었다.

만난 지 며칠 안 되긴 했어도 나와 좋은 시간을 가진 여성이고 이제 막 친해지려는 참이지 않은가.

그런 프란체스카가 실형을 사는 건 원치 않는다.

가능하다면 보석금을 내서라도 빼내줘야지.

허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와 다르게 니아와 제이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 마. 이번에도 알아서 잘 나올 테니까.”

“맞아, 항상 그랬거든. 마법이든 미인계든 써서 쉽게 빠져나오겠지.”

“아아…….”

프란체스카의 본업이 마녀라는 걸 생각하면 그럴 듯한 얘기다.

확실히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프란체스카는 감옥에 얌전히 갇혀 있을 거 같지 않다.

‘어찌되었든 마딜은 물 건너간 건가.’

지금쯤 경비병을 유혹하고 있을 프랑 누나를 생각하자니 아쉬움이 몰려왔다.

뭐 없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지만 이쯤 되니까 괜히 풀팟을 맞추고 싶어진단 말이지.

마치 장비 컬렉션이 99퍼센트인데 마지막 1퍼센트가 안 모아질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뭐, 없는 사람 가지고 마냥 아쉬워할 수는 없다.

지금 있는 멤버만 해도 충분히 호화로우니 다섯 명으로 잘 해보자.

멤버들 간의 호흡만 잘 맞추면 얼마든지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두 사람 다 쓸 수 있는 스킬 좀 말해줄래? 아, 가능하면 장비랑 소지금도.”

종업원에게 부탁해서 종이와 펜 하나를 받았다.

받아 적을 준비를 마친 내가 요구하자 니아와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킬이랑 장비는 이해하겠는데 소지금은 왜?”

“뭐 특별히 준비할 거라도 있어?”

아무래도 두 사람은 보급품 준비에 필요한 회비를 걷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난 순전히 두 사람을 위해서 물어본 거다.

보급품 같은 건 내 돈으로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으니까.

“아니, 두 사람 다 새 장비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견적 좀 뽑아 보게.”

“견적이라니…….”

“난 지금 장비만으로도 괜찮은데.”

내 말에 두 사람 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는 장비 갖춘 걸 못 봐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니아는 자기 장비를 제대로 관리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갑옷과 방패에서 광택이 흘렀다.

그렇게 열심히 관리하고 있으니 새 장비에 대한 필요성도 크게 못 느끼겠지.

허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다 브릴린트의 장비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다.

니아가 갖추고 있던 장비는 전부 일반 등급 장비였다.

메이스는 아무런 접두어도 안 붙어 있는 평범한 메이스였고 갑옷은 여느 대장간에서나 살 수 있는 그런 갑옷이다.

그에 반해 브릴린트가 만드는 장비는 최소 고급 이상.

더군다나 요즘은 불을 품은 망치를 받아서 재고가 엄청나게 쌓였다.

기왕 내 파티에 참가한 거, 두 사람한테도 대장장이 여신의 진가를 보여줄 생각이다.

-

다키가 니아와 제이드를 파티에 영입했을 무렵.

폐허가 된 자네스 영지에선 하루 종일 이어졌던 난전이 가까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끼케에에에엑!!]

창으로 무장한 날개 달린 악마, 척살의 데몬이 비명을 지르며 두 동강 났다.

마지막 남은 한 놈을 처치한 건 검은색 의복을 걸친 검사였다.

전신 슈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몸에 착 달라붙는 장비를 입은 여성.

그녀 주위에는 비슷한 옷을 입은 클랜원들이 잔뜩 있었다.

밝게 뜬 달 아래에서 악마들을 몰살한 이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칠흑검 클랜이었다.

오늘 오전에 영지에 진입한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악마들과 맞서 싸웠다.

수많은 악마들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승리를 과시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결코 여유로워 보이진 않았다.

누구 하나 피로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으며 부상당하지 않은 사람도 손에 꼽았다.

“사상자는……?”

마지막 악마를 쓰러뜨린 뒤 부마스터로 보이는 남성이 클랜원들에게 물었다.

여성들이 입은 복장 보다는 그나마 갑옷에 가까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의 질문에 책사로 보이는 여성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중상자는 20명, 사망자는 3명입니다. 다행히 중상자들은 차도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안경을 고쳐 쓰며 책사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상처투성이가 된 클랜원들이 고통어린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한 쪽 팔이 잘려나갔고 누군가는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들이었지만 책사 말대로 점점 회복되어 가는 중이었다.

칠흑검 클랜에도 실력 있는 힐러들이 다수 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허나 클랜원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건 고통어린 신음뿐만이 아니었다.

동료를 잃은 이들의 슬픈 울음소리가 폐허가 된 도시에 울려 퍼졌다.

“아아……! 레니……!!”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카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은 동료들 시체에는 수많은 클랜원들이 모여 있었다.

여성 클랜원 한 명과 남성 클랜원 두 명이 악마들의 공격을 받고 죽음에 이르렀다.

죽은 동료들을 본 부마스터는 분개하듯 주먹을 부르쥐었다.

“젠장할…….”

칠흑검 클랜은 한 명, 한 명이 최소 플레티넘 등급 이상인 최정예 멤버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전사한 인원들도 전부 플레티넘 중위, 혹은 상위에 해당되는 실력자들이었다.

고작 3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죽음은 클랜에게 있어서 엄청난 손실이다.

“대체 이 괴물들은 뭐냐…… 어디서 이런 끔찍한 놈들이 기어 나온 거야……!”

분을 이기지 못한 부마스터가 두 동강난 척살의 데몬을 발로 걷어찼다.

지금은 힘없이 날아가는 척살의 데몬이었지만 살아있을 때는 악몽이랑 다를 바 없었다.

놈이 하늘에서 창을 던져댈 때마다 클랜원들이 하나둘씩 전투 불능에 빠졌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힐러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사상자는 더욱 많았을 거다.

그만큼 자네스 영지에 소환된 악마들의 무력은 무시무시했다.

플레티넘 등급조차 쉽사리 당해낼 수 없는 괴물들이라니.

도시 하나가 순식간에 괴멸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저 덩치 큰 놈보다 강한 악마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만약 그 이상의 적이 있었다면 저희도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죠.”

부마스터를 달래듯 책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칠흑검 클랜 주위에는 목이 잘린 단두대 데몬 세 마리가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다.

전부 클랜 마스터인 키리야가 잡은 것이다.

반대로 죽은 3명의 클랜원 역시 모두 단두대 데몬에게 당했다.

척살의 데몬에게 당했을 때는 치료라도 할 수 있었지만 단두대에겐 그것조차 통하지 않았다.

한 방이라도 맞으면 그 즉시 사망이었으니 회복 주문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불행 중 다행이지…….”

동료를 잃은 슬픔은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죽은 단두대 데몬을 보고 있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하백의 이무기들을 상대할 때도, 다른 위험한 괴물들을 상대할 때도 오늘처럼 위기감을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단두대 데몬과 싸울 때는 마치 아무런 힘도 없던 초보 시절도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그랬을 거다.

이 괴물들의 초월적인 무력 앞에서 자신들은 갓 모험가가 된 초보나 다름없었다.

놈들에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쪽에 그보다 더한 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착잡한 기분을 느끼던 부마스터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단두대 데몬을 밟고 올라갔다.

놈의 시체 위에선 클랜 마스터 키리야가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슬픔에 젖은 눈동자는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말없이 달을 보고 있는 그녀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괴로울 것이다.

“마스터, 이제 그만 내려가시죠. 많이 지치지 않았습니까.”

우려 섞인 어조로 부마스터가 말했다.

악마들과 싸울 때 키리야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서천 클랜과 노르니르 클랜의 2대 검성이 그녀와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키리야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녀조차 악마들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클랜원들 보다 덜할 뿐이지 그녀에게도 자잘한 상처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단두대 데몬에게 짓밟힌 다리는 피에 젖은 채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다.

엄청 고통스러울 텐데도 중상자들을 위해 꾹 참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말고 클랜원들이나 챙겨줘…….”

부마스터의 말에 키리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답답함을 느낀 부마스터는 언성을 높이며 그녀를 설득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스터! 다리가 그 지경이 됐는데 괜찮다니요! 얼른 내려가서 치료 받아야죠!”

“……나 때문에 세 사람이나 죽었어. 지금 내려가면 클랜원들 얼굴을 못 볼 것 같아.”

키리야의 목소리가 침울함으로 점철됐다.

그녀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로 부마스터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혼자 있게 해줘. 나도 내 잘못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해.”

하백을 쓰러뜨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클랜원 모두가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그건 마스터인 키리야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이라면 대형 클랜들과도 견줄 수 있다.

재앙신까지 쓰러뜨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지만 대형 클랜급의 저력을 갖췄다고 해도 머리 위엔 끝이 없는 법이다.

키리야는 이번 전투에서 그 사실을 뼈저리고 느꼈고, 이는 스스로를 향한 책망으로 바뀌었다.

“마스터 잘못이 아닙니다……! 마스터는 최선을 다 하셨잖습니까!”

허나 부마스터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키리야의 손을 붙잡고는 반 강제로 그녀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저희들은 진즉에 전멸했을 겁니다. 모두가 마스터한테 고마워할지언정 원망하진 않아요.”

“클로딘…….”

부마스터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키리야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얌전히 부축을 받는 그녀를 보며 클로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다간 마스터도 쓰러지십니다. 마스터까지 쓰러지면 죽은 클랜원들이 기뻐하겠습니까?”

“……미안, 나만 생각해서…….”

클로딘의 설득에 키리야는 뒤늦게 생각을 고쳤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결국 어리광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남은 클랜원들을 더욱 걱정시킬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키리야는 클로딘을 따라 시체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힐러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다.

“마스터! 부마스터!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심상찮은 걸 발견했어요!”

정찰대원 중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를 본 키리야도 클로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상치 않은 거라니……. 대형 악마들도 다 처리했는데 대체 뭐가 남았단 건가?”

“……설마 남은 악마가 있는 거야?”

날선 키리야의 질문에 정찰대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려워요. 일단 가서 보세요!”

정찰대원의 재촉에 키리야와 클로딘은 일단 그녀가 말한 장소로 가보기로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를 클랜원들이 뒤따랐고 50여명의 칠흑검 클랜원들은 이윽고 영주성의 안뜰로 들어섰다.

“저, 저게 대체 뭐야?!”

“신이시여 맙소사……!!”

안뜰에 도착하자마자 클랜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봐왔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악마가 있었다.

단두대 데몬과도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이 피부로도 느껴졌다.

마치 고압의 전류가 온몸을 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그 흉악한 마력을 내뿜는 악마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거다.

짐승의 두개골과도 같은 머리는 반으로 갈라졌고 양쪽 날개는 부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악마의 시체에선  방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단두대 데몬보다 더 강한 악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충격적이다.

그런데 그 악마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다니.

클랜원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 안뜰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그렇게 클랜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랄 때였다.

죽어 있는 악마를 보며 키리야가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너희…… 이 악마랑 싸우면 이길 자신 있어……?”

“아…….”

“그, 그건…….”

클랜원 중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 있는 모두는 율리아나에서 한 가닥씩 하는 강자들이다.

대륙 어딜 가도 고랭크의 대우를 받으며 대형 클랜들에게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승리를 전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자존심 때문에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할 뿐이지 그들은 본능적으로 패배를 확신했다.

============================ 작품 후기 ============================

아크데몬이 이렇게나 셉니다.

전개가 느려지는 느낌을 받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역량 부족입니다. 일상편과 못 다룬 스토리들을 넣어보려 했는데 완급 조절을 실패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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