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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59화 (15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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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비

* * *

폐허에서 벗어난 나는 20분이 채 되지 않아 율리아나로 돌아왔다.

남쪽 던전에 갈 때보다 훨씬 돌아서 왔는데 이렇게나 빨리 온 거다.

덕분에 성문은 아직 닫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도시에 들어섰을 때는 여전히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확실히 너랑 같이 다니니까 편하다.”

[푸르릇.]

에보니 위에 올라탄 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앞으로 도시 주위를 오가면서 힘 뺄 일은 없겠다.

당장은 성소와 도시 사이를 오갈 때만 쓰고 있지만 추후엔 의뢰를 해결할 때도 큰 도움이 되리라.

과연 10만 아웬이나 투자한 보람이 있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 자가용을 사는 게 아닌가 싶다.

‘뭔가 말 타고 다녀서 더 눈에 띄는 거 같지만…….’

인파에 섞여서 도시로 들어올 무렵 나는 새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걸어 다닐 때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만 신경 쓰면 됐다.

그런데 말을 타고 다니니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내 몰골이 훤히 드러나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뜬금없지만 레이디 고다비어의 이야기를 아는가.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지방 영주의 아내였다고 한다.

지방 영주는 가혹한 세금 정책으로 농민들을 혹사시켰다.

고다이버가 이를 감면해달라고 하자 영주는 네가 알몸으로 말을 타면 그리 하겠다, 라고 이야기한다.

영주는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고다이버는 백성들을 위해 정말 나체로 말을 타고 거리를 활보했다.

그런 고다이버의 선심에 감동한 백성들은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 그녀가 지나갈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전설이지만 어찌되었든 팬티만 입고 말을 타니 내가 그 이야기 속의 여주인공과 비슷한 처지가 된 것 같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다이버와 달리 난 모두의 구경거리가 됐다는 거다.

“엄마 저 사람 팬티만 입고 말 타.”

“왜 팬티만 입고 다니는 거야?”

“저, 저런 거 보면 안 돼……!”

한 남매가 날 가리키자 그녀들의 어머니가 황급히 눈을 가렸다.

자식 딸린 부모님들에게 유해물 취급까지 받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난 당당해지기로 했다.

부끄럽다며 말에서 내리는 거야 말로 쪽팔린 짓이다.

남들이 날 보며 뭐라 하든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자존감이 높아진 지금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나저나 슬슬 배고프네.’

점심 때 헤베가 차려준 요리를 그렇게 먹었는데 또다시 허기가 졌다.

밥을 얻어먹었을 때가 1시쯤이었던 걸 생각하면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긴 했다.

썬더 드레이크 잡느라 피곤하기도 하니 오늘은 이만 밥 먹고 쉬기로 할까.

포션 같은 보급품이야 내일도 얼마든지 구비해둘 수 있으니 말이다.

결정을 내린 나는 어젯밤에 묵은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시 중앙에 있는 여관에 갈 수 있기도 한데, 나 혼자 그런 곳에 들어가는 건 어쩐지 좀 부담됐다.

길드에서 받은 여관 숙박권도 딱히 유효 기간이 있는 건 아니다.

지금은 그냥 편하고 가까운 곳으로 가도록 하자.

‘좋은 여관에 방 잡는 것보다 집 사는 게 더 빠를 것 같지만.’

노을에 물든 거리를 지난 나는 금세 여관에 도착했다.

이제 본 건데 이 여관의 이름은 달빛을 담은 꽃이라고 한다.

흔한 판타지 여관치곤 참 감성적인 이름이었다.

내심 가게 이름을 평가하며 안에 들어간 순간, 낯익은 얼굴들이 날 반겼다.

“앗…….”

“어…….”

식당과 주점을 겸하는 홀에서 웬 은발의 남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니아와 제이드였다.

내게 얘기했던 대로 하루 종일 여관에서 휴식한 건지 두 사람은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니아의 경우 가슴이 파인 반팔 셔츠와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게 꼴릴 수가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진 음식들을 보니까 슬슬 저녁 먹을 때라서 내려온 모양이다.

다시 만날 거라곤 생각했지만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딱 마주칠 줄이야.

이 누님하고도 참 인연이 깊은 듯하다.

“조, 좋은 저녁이네.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니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인사를 건넸다.

이미 서로 보여줄 거 다 보여준 사이라지만 막상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려니 부끄러운 듯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이라서 더 어색한 건가?

생각해보면 니아는 당장 오늘 아침에도 섹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뒤늦게 수치심이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어제도 던전 하나 공략하더니 엄청 열심이시네. 밥은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같이 먹죠.”

반면 제이드는 태연한 기색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비단 인사만 건네는 게 아니라 친근한 어투로 내게 자리까지 권했다.

스스럼없는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인싸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제이드는 나한테 자기 애인까지 넘겨줄 처지이지 않은가.

그도 니아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와의 재회가 어색해야 하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앉으라고 하니까 두 사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커플끼리 먹고 있는데 제가 끼어도 되겠어요?”

“괜찮아요. 우리도 방금 먹기 시작했으니까. 편히 앉아요.”

“마, 맞아. 이제 와서 뭘 빼고 그래. 친해질 겸 같이 먹으면 좋지.”

괜히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예상 외로 그렇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니아는 제이드 말에 동조하면서 날 환영했다.

부끄러울 뿐이지 나와 같이 있는 게 거북하진 않은 모양이다.

“그러면 실례 좀 할게요. 사실 혼자 먹기 외로웠거든요.”

두 사람 사이에 스며들면서 나는 메뉴를 주문했다.

원래는 적당히 배만 채울 생각이었는데 먹을 입이 많아지니 생각이 바뀌었다.

척 봐도 맛있어 보이는 사슴다리 통구이나 멧돼지 고기 스튜 같은 걸 잔뜩 시켜봤다.

뭘 그렇게 많이 시키느냐는 두 사람의 질문엔 내가 낼 테니 걱정 말고 먹으라 했다.

두 사람도 오늘은 벌이가 없어서 그런지 스프에 빵 쪼가리나 먹고 있었다.

어제 오늘 그렇게 달렸는데 고작 감자 스튜에 보리빵만 먹다니.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특히 제이드에겐 단백질이 필요할 거다.

“이렇게 막 얻어 먹어 돼……?”

“안 될 거 뭐 있어요. 전에 니아 씨한테 도움 받는 거 갚는 셈 쳐요. 은혜는 돌고 돈다면서요.”

화려하게 차려지는 밥상을 보며 니아에게 대답했다.

그에 니아는 키득 웃음을 터뜨리더니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쿠쿡, 그래. 너도 이제 어엿한 모험간데 선배가 밥 좀 얻어 먹어보자!”

“그래요 니아 씨, 저 돈 많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들어요.”

“좋아, 좋아~ 그리고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프랑은 누나라고 부르면서 왜 난 어렵게 부르는 거야?”

전채로 나온 양파 튀김을 먹으면서 니아가 섭섭하다는 듯 물었다.

뭐랄까, 니아랑은 그동안 접점이 별로 없어서 친근하게 부를 기회도 없었다.

그에 반해 프란체스카랑은 몸까지 섞지 않았는가.

나름의 배경이 있지만 이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냥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미안 내가 먼저 누나라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사실 나도 누나라고 부르고 싶었어.”

“처음부터 그랬으면 되지! 이런 걸로 예의 차릴 줄이야. 제이드였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네.”

내 대답에 니아가 이상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나처럼 얘기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는 기색이다.

아무래도 게임 세계에선, 혹은 모험가들 사이에선 서로서로 친근하게 대하는 게 일반적인 모양이다.

길드에서 만났던 여러 모험가들도 살갑게 말을 놓지 않았던가.

그런 문화가 일반적인데 나 혼자 너무 점잖게 말하면 이상해보일 만도 하다.

“하하, 둘이 그새 또 친해져버렸네. 이참에 나도 형이라고 부른 거 어때요? 니아 보고 누나라 하는 거 보면 내가 더 연상일 거 같은데.”

니아와 말을 놓고 있을 때 제이드도 쏙 끼어들며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니아 누님의 제대로 된 나이를 모르고 있었다.

분위기가 성숙해서 나도 모르게 누나라 여기고 있었는데 막상 몇 살인지 들은 적은 없는 것이다.

“실례지만 두 사람 나이가…….”

“나랑 제이드 둘 다 스물여섯 살. 다키는 몇 살이야?”

“난 스물다섯. 누나랑 형 맞네.”

26살이면 나랑 딱 한 살 차이구나.

아니, 게임 세계에선 만 나이로 계산하니까 그보다 더 많이 차이 나려나?

“그러면 제이드 형도 형이라 부를게. 나도 그냥 다키라 불러줘.”

“그래 다키! 말도 놓았겠다, 이제 이야기 좀 들려주라!”

맥주잔을 흔들면서 제이드가 내게 어깨를 걸어왔다.

그런 그의 모습이 존나게 인싸스러웠다.

순간 깜짝 놀랐지만 여기서 당황하면 찐따처럼 보일 거다.

“이야기라니, 무슨 얘기?”

나는 담담히 맥주를 들이켠 후 제이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제이드는 뭘 모르냐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남쪽 던전 얘기지! 들어보니까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며?”

“아아…… 그거.”

두 사람 귀에도 내 활약상이 들어간 모양이다.

오히려 모험가치곤 소식이 느리다고 봐야하나.

“설마 아라크네 잡은 게 너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재앙신 상대로 압승했다는데 진짜야?”

볶은 뱀 고기를 한 점 집을 때 니아가 열의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모험담 이야기가 나오자 니아는 언제 부끄러웠냐는 듯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도 모험가니까 이런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것이리라.

‘어쩌면 다른 이유가 더 있을지도…….’

어제 아침에 봤던 니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칠흑검 클랜을 동경하는 그녀에게선 뭔가 말 못한 사정 같은 게 엿보였다.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내 모험담은 꽤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술 안주 삼아 내 모험담을 푸는 것도 좋을 거다.

나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나름 박진감 넘치게 썰을 풀었다.

“압승이라니,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거기 완전 헬 게이트였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옥문에 비교할 정도라니……”

“얼마나 위험했기에 그래?”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운읠 띄우자 두 사람이 몰입하기 시작했다

제이드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이야기를 이었다.

“조금만 실수했어도 산 채로 뜯어 먹혔을 거예요. 거짓말 안 하고 거미만 수백 마리가 몰려왔다니까요?”

애써 질겁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니아가 의심쩍은 기색으로 웃었다.

“에이~ 수백 마리는 좀 심했다. 너무 과장된 거 아니야?”

“진짜야! 어디 그뿐인 줄 알아? 거미처럼 변한 고블린이 선두에서 무슨 장군처럼 달려드는데, 거미들이 그놈 따라 우르르 몰려들어선……!”

한 차례 의심 받은 나는 더욱 열렬히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내 혼신의 연기 덕분일까, 처음엔 거짓말이겠거니 한 니아도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제이드도 연신 맞장구를 치면서 감탄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내 말 중 대부분은 픽션이었다.

거미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지주귀를 따라 군대처럼 움직이지도 않았다.

허나 모험담은 허구를 좀 곁들여야 흥미진진해지는 법이다.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대중들은 좀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니까.

방송에서 비슷한 식으로 썰을 풀어온 나였기에 두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 그래서? 그래서 마지막엔 어떻게 됐는데?”

어느덧 모험담에 푹 빠진 니아가 내게 재촉했다.

뒷내용이 궁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그에 나는 지난날의 기억을 곱씹듯이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린크가 거미에게 붙잡히자 우리 모두 패닉에 빠졌어. 하지만 나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소리쳤지! 다들 포기하면 안 돼! 동료를 버릴 셈이냐?!”

높은 목소리로 나나를 연기하자 니아는 경악을 터뜨리며 물었다.

“뭐? 나나가?!”

그녀는 나나가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듯하다.

그럴 만도 하다.

나나는 그런 적도 없고 그런 말을 할 애도 아니니까.

애초에 아라크네와의 결전은 그렇게 장엄한 분위기가 흐르지도 않았다.

당시 나나는 유미에게 딜도를 들이밀었지 않은가.

허나 나는 여자친구의 명예와 이야기의 대중성을 위해 적당히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남들 앞에서 대놓고 할 얘기도 아니고 말이다.

“나나 걔도 할 때는 제대로 하는 애거든.”

“진짜 놀랐어…… 나나가 그런 말도 할 줄 알다니…….”

“솔직히 그냥 야한 거 좋아하는 푼수인 줄 알았는데…….”

제이드의 말이 마치 비수로 변하여 꽂히는 것 같았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뭐라 반박도 못 하겠다.

“아, 아무튼 다음엔 어떻게 됐냐면…….”

재빨리 화제를 바꿔 나는 유미에게 초점을 맞췄다.

나나의 격려를 들은 유미는 공포를 이겨내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숨겨뒀던 비기를 사용하여 천장에 매달린 아라크네를 공격한 것이다.

“그 이름하야 원령쇄도! 수많은 원령들을 광선처럼 쏘아 적을 파괴하는 주술사들의 비기!”

“오오!”

“원령쇄도……!”

큰 소리로 외치자 니아와 제이드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비단 두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어느덧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홀에서 서빙하던 여직원과 술잔을 닦던 바텐더, 그리고 다른 손님들까지 내 얘기를 경청하는 것이었다.

졸지에 이야기꾼이 된 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입을 털었다.

“천장에 매달렸던 아라크네는 끝내 지상으로 떨어졌지! 원령의 광선이 놈의 가슴에 구멍을 뚫은 채였어!”

“드디어!”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여줬구만!”

“그래,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죽은 거야?!”

“빨리 좀 이야기해 봐요! 궁금해 죽겠네!”

사람들이 보챌수록 나는 말을 아꼈다.

그들의 초조함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나는 결말을 풀었다.

“아라크네의 생명력은 참 끈질겼지……. 이번에야 말로 죽었겠구나, 저걸 맞고 살아남진 못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우리의 등을 노렸어!”

“말도 안 돼!”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 있었다고?!”

청중들이 경악한다.

그들은 마치 식스 센스를 처음 본 사람들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반전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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