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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비
대장간을 나와 향한 곳은 성소 근처의 폐허였다.
나에게 던전의 열쇠를 넘겨준 기사, 리단이 거주하는 장소기도 하다.
“허…… 맙소사…….”
폐허에 발을 들이자마자 리단과 눈을 마주쳤다.
내 얼굴을 본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안녕하세요, 리단 씨.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다만 네가 멀쩡히 살아 돌아올 줄이야……. 분명 성소 밖에서 비명횡사할 줄 알았는데.”
며칠 만에 만난 사람치곤 인사가 삭막했지만 나는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여명의 투사는 괴물들에게 노려지기 쉽다.
나 이전의 다른 투사들도 힘에 이끌린 괴물들에게 노려져 명을 달리 하곤 했다.
그러니 리단도 내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 생각했으리라.
척 봤을 때 강해보이는 인상도 아니니까.
매일 같이 괴물들에게 노려지는 신세가 됐는데 팬티만 입은 초짜가 뭘 할 수 있겠냐.
리단은 아마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내 죽음을 예견했으리라.
“아무렴 그렇겠죠. 그래도 리단 씨 생각보단 제 명줄이 더 긴가 봐요.”
리단의 경악에 장난스럽게 대답해줬다.
그러자 리단은 한층 더 진지한 어투로 나에게 물었다.
“숨겨진 던전을 공략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여신께서 잘못 들으셨거나 네가 허풍을 떤 거라 생각했지…….”
내가 없는 사이에 헤베나 브릴린트한테 전해들은 모양이다.
하기야, 항상 폐허 근처에서 살았던 리단인만큼 폐허 깊은 곳에 던전이 숨겨져 있다는 걸 믿지 못했을 거다.
마신을 쓰러뜨리고 여명의 힘을 계승했다는 것도 허황한 소리로 들렸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살아 돌아온 모습을 보니 내 착각이었던 것 같군. 넌 확실히 강하구나, 다키.”
말은 차분하게 했지만 리단은 헤베나 브릴린트 보다 더욱 놀라고 있었다.
그의 어투엔 어딘지 모르게 동경하는 기색도 담겼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내 모습을 보고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 걸까.
“칭찬 고마워요 리단 씨. 그보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웃으면서 대답한 나는 슬슬 화제를 바꿨다.
폐허로 찾아온 이유는 대장간을 증축시켜줄 NPC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허나 겸사겸사 리단에게도 부탁할 것이 있다.
“나 같은 놈이 뭘 해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 일단 들어나 보지.”
내 말에 리단은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음울하고 자기혐오적인 그였지만 나는 리단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
자존감이 없어서 그렇지, 리단은 무언가를 믿고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일단 첫 번째로요, 리단 씨가 갖고 계신 넥타르 병, 저한테 주실 수 없을까요?”
“내 넥타르 병을? 안 될 건 없다만…….”
넥타르 이야기가 나오자 리단은 자신의 품에서 도자기 병을 하나 꺼냈다.
내 것과 비슷하지만 많이 낡고 디자인도 소소한 병이었다.
허나 넥타르를 담을 수 있는 병임은 틀림없다.
‘이 부분도 원작 게임과 다르구나.’
원작 게임의 리단은 딱히 넥타르 병을 가지고 있다는 묘사가 없었다.
아마 DLC에서 추가된 설정이겠지.
자신이 사용하지 않는 넥타르 병을 플레이어에게 양도하기 위해서 말이다.
“고마워요 리단 씨. 잘 쓸게요.”
리단이 건넨 넥타르 병을 받아 벨트 주머니에 잘 넣었다.
그래도 굉장히 귀한 성물인데 이렇게나 쉽게 넘겨주다니.
리단에게 얼마나 의욕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고마워할 거 없어. 나 같은 놈은 가지고 있을 자격도 없는 물건이니까. 네가 쓰는 게 훨씬 좋겠지.”
미련 없이 넥타르에서 시선을 떼는 리단.
그의 의기소침한 모습은 보기 안쓰러웠지만 덕분에 스틱스 강물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갖췄다.
헤베의 도움으로 나는 스틱스 강물이 섞인 천연 넥타르를 전신에 발랐다.
이렇게 바른 강물은 내 몸에 완전히 스며든 상태다.
이 상태에서 천연 넥타르, 아니, 스틱스 넥타르를 복용하면 짧은 시간 동안 무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넥타르 병 하나를 완전히 비워야하기에 사용 횟수는 제한되지만 그래도 무척 강력한 효과다.
이로써 아테나와의 싸움도 한층 더 수월해지리라.
“그보다 첫 번째라면 두 번째도 있을 텐데, 다른 부탁은 뭐지?”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리단이 이야기를 이었다.
그에 나는 진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다른 게 아니라 리단 씨한테 호위를 부탁하고 싶어서요.”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호위 이야기가 나오자 리단의 눈빛이 바뀌었다.
과연 전직 왕실 친위대에서 소속되어 있던 남자답다.
물론 자학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는 기미도 보였다.
“여신님을 제 동료들로부터요. 조만간 성소에 제 동료들을 데려올까 생각 중이거든요.”
“모험 중에 만난 동룐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자들 아니냐?”
“그렇긴 한데 걱정되는 부분이 조금 있어서요. 동료라고 해서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잖아요.”
나나와 유미.
두 사람 다 착하고 귀여운 애들이다.
하지만 그들과 내가 알고 지낸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나나조차 동행한지 며칠 밖에 안 됐다.
그녀들과 나의 관계는 아직 많이 얕은 것이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제 동료들이 여신님한테 위해를 끼치려 하면 그때는 리단 씨가 막아주세요.”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나나랑 유미 보다 리단이 더 믿음직스럽다.
정 없어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리단의 사람 됨됨이는 물론 그의 과거와 이후 행적까지 다 알고 있다.
그에 반해 나나와 유미에 대해선 아는 게 많지 않다.
설령 가능성이 낮다 해도 헤베와 브릴린트의 안전을 생각하면 대비해서 나쁠 거 없다.
“누굴 호위해본지 오래 됐지만…… 그래, 여신님들한텐 평소 신세 지는 것도 있으니 못할 거 없지.”
잠시 고민하는 리단이었으나 이내 내 부탁을 흔쾌히 받아줬다.
뭔가 안전하게 지키겠다, 라는 느낌 보단 유사시에 내가 고기방패라도 되겠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구나.
이런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 아저씨도 밖에 나가서 좋은 것 좀 보고 그래야 될 거 같다.
매일 황량한 폐허만 보면서 살고 있으니 마음까지 삭막해지는 거다.
“고마워요 리단 씨. 돌아오면 언제 같이 술이나 한잔해요. 제가 살 테니까.”
“난 됐어……. 술은 사람을 즐겁게 하지. 난 별로 즐거워지고 싶지 않아…….”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모처럼 후배가 쏜다는데 같이 가자고요.”
내 말에 리단은 싫어, 안 가 하며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당장은 심드렁해도 나중에 끌고 가면 마지못해 따라올 거다.
리단은 그런 캐릭터니까 말이다.
“아무튼 잘 좀 부탁드릴게요. 아 그리고 도깨비들 안에 있죠?”
슬슬 발걸음을 옮기면서 꼬맹이들에 관해 물었다.
그에 리단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폐허 안쪽에 모여 있을 거다. 그런데 네가 그 녀석들을 어떻게 알고 있지?”
“리단 씨 없을 때 한 번 봤어요. 그럼 전 이만.”
리단과 헤어진 나는 그가 말한 대로 폐허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늦봄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폐허는 무척 아름다웠다.
낭만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한 장면 같다고 할까.
대리석 건물의 잔해들과 짙은 녹음의 조화가 상당히 볼만했다.
그 와중에 직사광선을 받는 벽이나 기둥이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이쯤 되면 늦봄이 아니라 초여름이라 해야겠는걸.
그렇게 생각할 무렵 찾던 녀석들을 발견했다.
“여기들 모여 있었구나.”
무너진 잔해들을 지나다 보니 웬 커다란 나무가 나타났다.
집채 보다 큰 나무였는데, 어떤 건물의 천장을 뚫고 높게 자라나 있었다.
근처에는 물이 고여서 만들어진 호수 비슷한 게 있어서 무척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됐다.
그런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은 웬 꼬맹이들이었다.
어린애처럼 조그마한 크기에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기묘한 종족들.
척 봐도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굳이 비유하자면 요괴 같은 인상이 강했다.
그녀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도깨비.
이무기, 신령과 같은 태고의 존재들 중 하나로 인간에게 우호적인 귀신들이다.
“나랑 같이 씨름 할 사람~!”
“나! 나앗!!”
“나도 할래애!”
내가 호수에 다다른 순간, 열 명 정도 모여 있는 도깨비들 중 몇몇이 씨름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1대1의 정당한 승부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여러 명이 달라붙는 기괴한 씨름이었다.
땅딸막한 꼬맹이들이 서로 옹기종기 붙어서 뒹굴어대니까 엄청 귀여웠다.
“으헤헷! 이거나 받아라~!”
“너도 받아라!!”
“끄에엑! 난 공이 아니야!”
하지만 역시 평범한 애들이 아니라 그런지 노는 방법이 점점 이상해졌다.
옆에 있던 친구를 공처럼 말아서 집어 던지거나 축구하듯 걷어차는 것이었다.
그 짓을 시도한 도깨비는 자신도 똑같은 짓을 당해서 곧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무슨 카오스…….’
도깨비들이 노는 장면을 보고 있다 보니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질 거 같았다.
그러던 중, 도깨비들이 날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앗! 김 씨다!”
“진짜야! 처음 보는 김 씨네?”
“김 씨! 아씨가 말한 김 씨가 너야?”
내게 몰려든 도깨비들은 다짜고짜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은 전부 여성이었다.
게임이 남성향 게임이라 그런지 다들 귀여운 여자아이처럼 생긴 것이었다.
참고로 나를 김씨라 부르는 이유는 내가 진짜 김씨여서 그런 게 아니라 일종의 종특이다.
도깨비들은 인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 혹은 그와 비슷한 종족을 전부 김 씨라고 퉁치고 인간을 보면 일단 김 씨라 부르는 것이다.
참고로 아씨는 헤베를 말하는 것이다.
헤베만 아씨라 부르는 이유는 그녀들 나름의 존경이다.
어쨌든 나는 그녀들의 물음에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맞아,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투사야. 너희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부탁하고 싶은 거?”
내 말에 도깨비들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릎까지 밖에 안 오는 친구들이 단체로 그러니까 진짜 깜찍하기 그지없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돈주머니를 꺼내들었다.
“듣기론 너희 건축 실력이 굉장하다던데 브릴린트 누나 대장간 좀 손봐줄 수 있을까? 강한 이코르를 다뤄도 문제없을 만큼 말이야.”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돈주머니를 풀어 금화를 보여줬다.
주머니 안에는 딱 30만 아웬이 들어 있었다.
증축 비용에 맞춰서 미리 넣어둔 것이다.
원작 게임에서도 2단계 증축을 할 때 이 정도 금액이 들었다.
넘쳐나는 금화를 본 도깨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을 터뜨렸다.
“꺄아아!”
“반짝이다! 반짝이!”
“별처럼 반짝반짝해!”
수많은 손이 돈주머니 안으로 파고들었다.
곧 그들은 금화를 집어 들고 눈을 반짝였다.
누군가는 금화를 입에 문 채 사탕처럼 오물거렸고 누군가는 양쪽 눈 위에 올려놓으며 장난을 쳤다.
어지간히도 금이 좋은 모양이다.
아웬을 만들 때 사용하는 금은 연성금이라 해서 엄밀히 따지면 진짜 금이 아니지만.
어쨌든 금화에 반응하는 거 보니 의뢰를 맡기는 것도 수월할 듯했다.
“대장간만 멋지게 개조해주면 이 금화 너희 다 줄게. 어때?”
“정말?!”
주머니를 건네며 말하자 도깨비들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허나 그녀들은 곧장 수락하지 않았다.
뭔가 더 원하는 게 있는 듯했다.
“금도 좋지만 우리는 다른 게 필요해!”
문득 한 도깨비가 외쳤다.
분홍색 단벌머리를 한 도깨비였는데 금화를 우물거리면서 말하니까 뭔가 되게 웃겼다.
“다른 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이번엔 예쁜 금발을 가진 도깨비가 대답했다.
“아씨는 우리한테 단술도 주고 떡도 만들어 줘……! 그런데 메밀묵은 할 줄 몰라……!”
“맞아! 이 근처에선 메밀이 전혀 안 나서 연습도 못 한 대!”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는 원작 게임의 설정을 상기했다.
성소의 도깨비들은 넥타르의 달콤한 향기를 맡고 이곳에 눌러앉게 됐다.
태고부터 존재해온 그녀들은 어떻게 보면 이 땅의 주인이기도 해서 헤베는 도깨비들에게 공물 삼아 넥타르와 떡을 바쳤다.
이를 마음에 들어 한 도깨비들은 성소 NPC들과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헤베를 아씨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어서다.
멍청해 보이는 주제에 공과 사는 확실해서 무상으로 일을 해주진 않지만.
어쨌든 그런 도깨비들이 유독 좋아하는 게 바로 메밀묵이다.
술이랑 단것도 좋아하지만 메밀묵에는 아예 환장을 하는 것이다.
“메밀묵을 구해다주면 우리도 싸게 쳐줄게!”
“맞아! 메밀묵 가져오기로 약속하면 절반만 받고 일 해줄 수 있어!”
“뭐? 진짜?”
도깨비들의 제안을 듣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절반이라면 15만 아웬만 받고 대장간 증축을 해주겠다는 얘기 아닌가.
그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완전 거저다.
30만 아웬을 지출할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50퍼센트나 할인이 됐다.
더군다나 그 조건이 고작 먹을 거 하나 구해주는 거라니.
원작 게임에선 없는 퀘스트지만 충분히 도전해볼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