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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비
내가 헤베 몰래 아테나의 생존 계획을 되새길 때였다.
헤베가 내 손을 꼬옥 잡으면서 얘기했다.
“아테나 언니는 분명 강력한 여신이에요. 하지만 여명의 힘을 계승한 서방님이라면 분명 쓰러뜨릴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엔 날 격려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앞으로의 싸움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물론 그녀는 날 격려하기 위해서만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헤베 역시 아테나와의 싸움을 우려하고 있는 듯했다.
친자매 같은 사이인 만큼 헤베는 아테나의 무훈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겠지.
그런 그녀기에 아테나가 더욱 두려울 거다.
재앙신이 된 전신과 내가 싸우는 것 또한 말이다.
“여신님이 이렇게 응원해주시는데 질 수야 없죠. 저만 믿으세요.”
헤베의 손을 맞잡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 담겨 있던 근심도 조심씩 옅어졌다.
이윽고 그녀는 신뢰가 담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네…… 부디 아테나 언니를 해방시켜주세요.”
“당연히 그럴 거예요. 아테나님은 제 손을 꼭 구해드릴게요.”
의무감이 피어올랐다.
원래부터 장난으로 할 생각은 없었지만 헤베를 보니 반드시 아테나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브릴린트 누나한테 볼 일이 있는데, 성소에 있을까요?”
식사를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같이 뒷정리를 도와주려 했는데 이번에도 헤베가 용납하지 않았다.
가사는 아내의 몫이라는 구시대적인 발언을 하면서 내 할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브릴린트 언니는 여느 때처럼 대장간에 있을 거예요. 부탁할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식기를 정리하면서 헤베가 정성껏 대답해줬다.
내가 먹은 것까지 다 떠넘겨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완강한 나머지 도와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예정대로 브릴린트를 찾아가기로 했다.
전리품도 얻었겠다, 다음 던전 공략을 대비해서 새 장비를 갖추려는 것이다.
“온 김에 장비 제작 좀 부탁하려고요. 지금 장비론 아테나님에게 도전하기 힘들 것 같거든요.”
헤베에게 대답하면서 허리춤에 찬 쾌도를 내려다보았다.
쾌도도 훌륭한 무기지만 그래봤자 고급 등급의 초반부 무기다.
고블린 같은 놈들 상대로나 양학할 수 있지, 이걸로 아테나와 권속들을 잡으려면 굉장히 힘들 거다.
진짜 재앙신에게 맞서려면 이보다 더욱 강한 무기가 필요한 것이다.
RPG는 컨트롤도 컨트롤이지만 템빨 또한 중요하니까.
“부디 좋은 무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랄게요. 브릴린트 언니한테 맡기면 걱정 없겠지만요.”
“그럼요, 좋은 재료에 누나 실력까지 있으면 게임 끝났죠.”
헤베의 말에 동의하면서 대장간 쪽으로 향했다.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식당을 나서니 에보니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에서 풀이나 뜯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알아서 내 쪽으로 찾아온 것이다.
[푸르릉.]
“어, 에보니. 잘 있었어? 나 보러 온 거야?”
[푸르, 푸르릇.]
내 질문에 에보니는 몇 번인가 투레질을 했다.
관점에 따라선 그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이 녀석이랑 얘기하다 보면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 같다니까.
내 말을 전부 다 알아듣는 거 같기도 하고.
사실 본모습은 사람이라거나 뭐 그런 거 아니야?
“마침 잘 됐네, 너도 데려갈까 했거든. 따라와.”
[히히잉.]
시답잖은 생각을 하길 잠시 나는 에보니를 이끌며 대장간으로 향했다.
고삐가 없음에도 에보니는 날 잘 따라왔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갑자기 식당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응? 왜 그래?”
[히히이이잉.]
조금 전까지 얌전하던 에보니가 목소리를 높이며 발을 굴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한 나는 그녀를 따라 식당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헤베가 가져다준 과일과 채소가 놓여 있었다.
“저거 먹고 싶어서 그래?”
[푸르릉.]
질문받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는 에보니. 나랑 소통하는 법을 완벽히 터득한 듯했다.
하긴 말도 풀 같은 것보다 좀 더 맛있고 영양가 있는 게 먹고 싶겠지.
헤베 몰래 가져가는 거긴 하지만 딱히 중요한 식재료도 아니니까 문제없으리라.
“자, 가면서 줄 테니까 일단 대장간으로 가자.”
[푸릇, 푸르릉!]
당근 하나를 집어서 건네자 에보니는 그것을 덥석 집어먹었다.
하마터면 내 손까지 물릴 뻔했다. 어지간히도 영양가 있는 게 먹고 싶었나 보다.
“제시가 맛있는 거 잘 안 챙겨줬나 봐?”
[히히잉.]
내 질문에 에보니는 어딘가 불만스럽게 울었다.
말하고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대화하게 될 줄이야.
게임 세계에 오니까 별 희한한 경험을 다 해본다.
에보니한테 먹이를 주면서 걸어가길 잠시.
우리는 브릴린트의 대장간에 도착했다.
깡! 까앙!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브릴린트는 열심히 쇠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전에 선물했던 불을 품은 망치가 들려 있었다.
새 망치를 얻어서 그런지 그녀의 의욕도 이전보다 훨씬 커진 듯했다.
그 증거로 불과 며칠 사이에 진열대가 가득 차버렸다.
무기며 갑옷이며 아주 한 가득 만들어서 대장간 안이 북적거릴 정도였다.
역시 선물해준 보람이 있구나.
꽉 찬 진열대를 본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누나 오랜만. 바쁜 거 같은데 나중에 올까?”
“헛?!”
장난스럽게 말하자 브릴린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날 발견한 그녀는 신이 나서 곧장 달려왔다.
“이야아 이게 누구야! 다키잖아?!”
“어흑!”
작업 중인 물건도 내던지고 날 끌어안은 브릴린트.
너무 세게 끌어안은 나머지 가죽 앞치마에 감싸인 가슴이 꾸욱 눌렸다.
여전히 훌륭한 젖가슴이었다. 두꺼운 가죽 너머로도 그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왔다.
“누, 누나 반가운 건 좋은데…… 세게 안아서 좀 아프거든……?”
“앗, 미안~ 미안~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등을 탁탁 치며 말하자 브릴린트는 뒤늦게 힘을 풀었다.
퀴클롭스인 그녀는 평범한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근력을 가졌다.
마음만 먹으면 내 뼈마디 같은 건 손가락만 써도 부러뜨릴 수 있을 거다.
그런 브릴린트가 온힘을 다해 끌어안으니 허리가 반대로 꺾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몸을 밀착한 만큼 브릴린트 특유의 향기로운 냄새를 만끽할 수 있었으니까.
흠뻑 흘린 땀의 향기가 은근히 야했다.
여신님이라 그런지 땀 냄새도 전혀 불쾌하지 않아 기분이 좋아졌다.
헤베와 그렇게 떡을 쳤는데도 또 다시 욕정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아무튼 약속대로 살아 돌아왔어.”
“잘 했어, 잘 했어! 역시 넌 지금까지 왔던 녀석들하고 다르구나! 분명 재능이 있는 거야!”
두 손을 맞잡은 채 이야기하자 브릴린트는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나보다 큰 누님이 저렇게 신나하니까 엄청 귀여웠다.
뭔가 커다란 토끼를 보는 것 같다.
또한 브릴린트한테 칭찬 받으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쾌도를 가리키면서 브릴린트에게 찬사를 건넸다.
“다 누나가 만들어준 장비 덕분이지. 이게 없었다면 무사하진 못했을걸.”
“자연사로 밖에 안 죽는단 놈이 이제 와서 웬 겸손? 그냥 너 잘났다고 해!”
“하하…… 그런 말은 잘도 기억하고 있구나.”
어깨를 팡팡 치며 말하는 브릴린트의 반론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브릴린트와 재회의 즐거움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어? 저 말은…….”
뒤늦게 브릴린트가 에보니를 발견했다.
에보니를 본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람인데 누군지는 기억이 잘 안 날 때 짓는 표정 같았다.
“왜 그래 누나?”
“아니…… 이 말 왠지 익숙한 것 같아서.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뭐? 착각이겠지. 얜 오늘 막 데려온 애야. 여기 오기 전까진 대 도시 마구간에 있었다고.”
브릴린트의 말에 나는 그럴 리 없다며 반박했다.
그녀가 대 도시에 자주 왕래했다면 모를까 에보니와 면식이 있을 리 없다.
애초에 검은 말이 에보니 뿐인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가……? 하긴 대 도시에 가본지도 몇 년은 됐으니까…….”
“그래, 다른 말하고 착각했겠지. 아무튼 얜 에보니 스피어. 오늘부터 나랑 같이 다닐 말이야.”
의아해하는 브릴린트에게 에보니를 소개해줬다.
말하고 사람이 통성명을 할 필요는 없지만 에보니가 워낙 사람 같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하게 됐다.
브릴린트 역시 얼떨결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 안녕 에보니. 갈기 참 멋있구나. 아는 언니 떠오르는 머릿결이네.”
말한테 하는 인사라기엔 이상하지 않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에보니까지 소개시켜준 우리는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뭐가 필요해? 그냥 인사만 하러 온 건 아닐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타산적으로 보이잖아. 필요한 거 없었어도 인사하러 왔을 거야.”
“알아, 알아~ 그냥 해본 말이야. 어쨌든 지금은 새 장비가 필요하기도 하잖아?”
내 말을 웃으며 받아친 브릴린트는 문득 내 등을 가리켰다.
폭풍의 숏소드가 없어진 것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너도 참, 빨리 박살날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며칠 만에 깨먹다니. 너무 막 다룬 거 아니야?”
“미안 누나. 상대가 만만찮다 보니까 여러 번 쓰게 되더라고.”
“당연히 그렇겠지. 딱 봐도 예전보다 세진 게 보인다 야. 이제 완전 남자다워졌는데?”
배시시 웃으며 브릴린트가 내 가슴과 배를 훑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손길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오히려 담담하게 팬티를 내리고 여기도 확인해봐 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짜 하면 맞을 거 같으니 안 하겠지만.
머릿속에 쌓인 음란마귀를 털어내면서 브릴린트에게 말했다.
“고마워 누나. 그리고 누나 말대로 장비 제작 부탁하러 온 거 맞아. 전리품을 꽤 많이 얻었거든.”
“그럼 그렇지~ 이번엔 뭘 만들어줄까? 장비 제작은 언제나 환영이야!”
브릴린트는 벌써부터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녀의 열의에 답하기 위해 나는 차원낭 안에 넣어둔 재료들을 꺼냈다.
아라크네의 이코르와 태피스트리 2장, 그리고 새끼 거미의 갑각 10개를 꺼내 브릴린트에게 건넨 것이다.
“이, 이게 다 뭐야……?!”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전리품들을 보며 브릴린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랄 만도 하다.
거미 갑각이야 별 거 아니지만 보스 이코르와 태피스트리는 그녀로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재료일 테니까.
“이번에 잡은 녀석이 재앙신에 가까운 괴물이었거든. 그래서 보상도 화려하더라.”
“벌써 재앙신을 잡다니…… 다키 너 대체 어떻게 되먹은 녀석이야……?”
아라크네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를 잡는 과정을 이야기하자 브릴린트가 아연실색했다.
헤베도 아테나 얘기가 나오기 전까진 굉장하다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두 여신님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니 절로 우쭐해졌다.
내가 세운 업적이 여신들조차 경탄할 만큼 대단하다는 거 아닌가.
딱히 으스댈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깨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넌 진짜 보면 볼수록 대단한 애야……! 진짜 헤라클레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여신님도 그 얘기하더라. 난 아직 반신반의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이코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브릴린트.
그녀에게 멋쩍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이 이상 이어가면 부끄러운 이야기가 오갈 것 같아 빠르게 주제를 바꿨다.
“아무튼 이코르는 도검으로 만들어주고 태피스트리는 갑옷이랑 천옷으로 만들어줘. 아 천옷은 사제가 입을 거니까 그 부분도 좀 신경 써 주고.”
“갑옷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말이지…….”
그리 말한 브릴린트는 도로 이코르를 내밀었다.
“우리 대장간 설비로 이 정도 물건은 가공하기 힘들어. 안에 깃든 신력이 너무 강해서 화로도, 모루도 제대로 버티질 못할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가디스 던전의 시설 강화 시스템을 떠올렸다.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보스 이코르 장비를 제작하기 위해선 대장간 자체를 강화해야 한다.
강화 비용이 엄청 비싸서 예전엔 손도 못 댔지만 지금 내 수중엔 그만한 거금이 있다.
즉 담당 NPC만 만나면 얼마든지 시설을 증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코르를 내미는 브릴린트에게 손사래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거라면 나한테 맡겨 둬. 마침 여기엔 훌륭한 건축가들도 있잖아?”
“설마 그 녀석들한테 부탁하려고……? 걔네들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 말을 듣고 브릴린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었다.
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둘러댔다.
“성소 돌아다니던 중에 우연히 알게 됐어. 걔네들이 돈 좋아하는 것도 잘 알고.”
일전엔 만나지 못했지만 아마 다시 찾아보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다.
굳이 찾지 않으면 안 보이지만 필요하면 금세 나타나는 녀석들이니까.
“이번 던전으로 꽤 벌었으니까 누나 대장간 정도는 충분히 증축할 수 있을 거야. 누나는 준비만 해둬.”
“고맙긴 한데…… 나 때문에 너무 무리하진 마……. 그 녀석들한테 맡기려면 몇 십만 아웬은 족히 든다고.”
내가 호기롭게 말해도 브릴린트는 부담을 덜어내지 못했다.
자기한테 거금을 쓴다고 하니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것이리라.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론했다.
“누나만 좋으라고 이러는 거 아니야. 누나 대장간이 좋아져야지 나도 좋은 무기를 얻을 수 있잖아. 다 투자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라크네의 이코르는 끝내 돌려받지 않았다.
에보니와 함께 대장간을 나서며 브릴린트를 향해 소리쳤다.
“곧 증축하러 올 테니까 방어구 먼저 만들어줘! 증축 비용은 신경 쓰지 말고!”
“으, 응! 그래 알겠어!”
브릴린트는 내 부탁을 마지못해 승낙했다.
여전히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었으나 싹 바뀐 대장간 설비를 보면 그녀도 생각이 바뀌리라.
“그럼 꼬맹이들 좀 만나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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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자정에 한 편이나마 올리려 했는데 시간에 쫓기고 말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