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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성소
인면지주가 짜준 태피스트리를 갖고 성벽에 접근하면 성벽 위의 사수들이 플레이어를 아군으로 착각한다.
본래라면 화살이 최대한 날아오지 않는 루트로 이동해야하지만 이걸로 성문을 정면 돌파할 수 있다.
‘거기로만 들어가면 지금 보다 배는 강해질 수 있어.’
발람과 세에레를 처치한 뒤로 며칠이 지났다.
놈들을 쓰러뜨리고 마신화를 개방했지만 지금껏 내가 쓸 수 있는 마신화는 왼팔을 변이시키는 것뿐이었다.
허나 지혜 잃은 장원에 도달하는 것으로 얘기가 달라질 거다.
그곳에 내 잠재력을 일깨워줄 NPC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를 만남으로써 난 비로소 마신화를 완벽히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러려면 지금 보다 더 강해져야 돼.’
지금 스펙으로 장원에 들어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죽는다.
마신화를 배운 후엔 훨씬 강해진다지만 그 전에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좀 더 강한 장비를 갖추고 다양한 스킬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기다렸지 에보니. 볼 일 다 보고 왔어.”
[푸르릉.]
여신상으로 돌아온 나는 에보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옛신의 성소로 돌아가면 장비와 스킬 부분은 해결할 수 있다.
지난번 던전을 통해 자금도, 위업도 잔뜩 모아뒀으니 말이다.
이를 기반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 아테나의 권속들과도 꽤 할 만할 거다.
그리 생각하며 제단에 손을 가져갔다.
몸이 전송되기 전에 에보니에게 미리 말해뒀다.
“난 잠깐 다른 곳에 다녀올게. 금방 올 테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푸르릇.]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에보니가 한 차례 투레질했다.
어두운 곳에 혼자 있으면 불안해하지 않을까 했는데 저 모습을 보니까 괜찮을 듯했다.
다음 순간, 성소로 돌아가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하자 곧 익숙한 섬광이 시야를 가득 덮었다.
파아아아앗!
얼마 뒤 나는 성소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새하얀 빛이 걷히면서 아름다운 신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여긴 진짜 몇 번을 봐도 예쁘다니까.”
새삼 그런 감상을 하고 있을 때 익숙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푸르릉.]
“어? 에보니?”
옆을 돌아보니 에보니가 나와 함께 성소로 와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의아한 심정으로 에보니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푸르릇.]
내 물음에 에보니가 멀뚱히 눈을 깜빡거렸다.
원작 게임의 탈 것들은 성소로 들어오지 못했다.
뭔가 특별한 설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탈 것들이 성소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움직이면 시스템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나 쉽게 따라 들어오다니.
심지어 난 에보니를 데려가겠다고 선언하지도 않았는데.
“뭐…… 혼자 있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괜찮겠지?”
[히이잉!]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게임 세계의 변수를 겪어 보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에보니가 듬직하긴 해도 동굴 안에 방치해두는 건 역시 좀 찝찝하니까.
그리 생각하며 에보니와 함께 성소 중심부로 향했다.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참 오랜만에 방문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성소가 그리웠다는 거겠지.
처음 들어올 때는 마냥 신기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흐흐흥, 흐흥.”
투명한 바닥을 지나 황금 분수대가 있는 곳으로 가니 어김없이 헤베가 보였다.
오늘도 열심히 분수대를 관리하는 귀여운 여신님.
한창 콧노래를 부르며 분수 안을 젓던 그녀는 내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 냄새는……!”
정확히는 내 기척이 아니라 체취를 느낀 모양이다.
여러모로 참 댕댕이 같구나.
내심 그렇게 생각할 때 헤베가 다급히 내 쪽으로 달려왔다.
“헤라클……! 아니, 투사님! 돌아오셨군요!”
그녀의 만면엔 미소가 가득했다.
내 무사 귀환에 진심으로 감동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녀의 열렬한 환영에 나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임무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여신님도 그간 잘 지내셨죠?”
“물론이에요! 줄곧 투사님만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이렇게 돌아오시니 너무 기뻐요……!”
내 인사치레에 헤베는 풍압이 일어날 정도로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세게 끄덕이는지 예쁘게 정돈된 머리가 순식간에 헝클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귀여우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내게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생겼구나.
항상 내 생각을 하며 내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행복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나요? 시장하시진 않으세요?”
“아, 아뇨 괜찮아요.”
“달리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전부 들어드릴게요!”
지극 정성인 헤베를 보며 나는 겸연쩍게 뺨을 긁적인다.
“너무 걱정하실 거 없어요. 밖에서도 잘 먹고 다녔으니까요. 다친 곳도 전혀 없고요.”
챙겨주는 건 고마웠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써주니까 살짝 부담스러웠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헤베는 곧장 주먹을 부르쥐며 말했다.
“투사님을 보필하는 건 시녀의 의무! 그러니 부담스러워 하실 필요 전혀 없으세요. 저는 투사님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따를 테니까요.”
너무나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말해서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도리어 헤베의 태도가 너무 헌신적인 나머지 다소 문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신님이랑도 진득하게 뒹굴었지.’
나나에 프란체스카, 니아까지 온갖 미녀들의 나체를 봐와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직접 마주하니까 그녀와 섹스했던 것이 떠올랐다.
헤베가 보여준 문란한 모습과 요야한 나체, 그리고 귀여운 신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와중 뭐든지 해주겠다는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음란마귀가 끼었다.
나도 참 변태 새끼구나. 며칠 만에 보는 여신님인데 다짜고짜 그런 생각부터 하고 보다니.
그래도 헤베에게 성적인 욕구를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신님을 보고 어찌 건전한 생각만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옷도 야하게 입었는데.
‘아니야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지.’
마음 같아선 당장 저 아담한 몸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리곤 스스로의 음탕한 생각을 최대한 순화한 뒤 헤베에게 부탁했다.
“그러면 한 번 안아볼 수 있을까요?”
“네? 가, 갑자기요?”
“저도 여행하는 동안 여신님 생각 많이 했거든요. 너무 반가워서 꼬옥 안아드리고 싶어요.”
두 팔을 벌리며 말하자 헤베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난데없는 부탁에 머뭇거리는 헤베였지만 그녀의 당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헤베는 귀여운 기합과 함께 내 품 안으로 포옥 하고 안겼다.
“에, 에잇……!”
마치 엄청난 모험을 하는 것처럼 내게 안긴 헤베.
그녀의 아담한 몸을 끌어안으며 내심 생각했다.
‘진짜 너무 귀엽네.’
나나의 푼수 같고 활기찬 모습도 무척 매력적이지만 헤베의 이런 소녀다운 모습도 정말 좋았다.
나나가 시종일관 신난 댕댕이라면 헤베는 주인 품에서 애교 부리는 댕댕이라고 할까.
둘 중 누가 더 귀엽냐고 묻는다면 절대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여자친구도 떡하니 있는 놈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원래 세계였다면 몰매를 맞아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그보다 여신님 냄새 진짜 좋다. 어쩜 이렇게 향기롭지?’
헤베를 껴안고 있다 보니 과일과 꿀을 섞은 것 같은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절로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하는 향기다.
꽃향기에 끌린 벌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헤베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향기를 맡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에 취해 점점 야릇한 기분이 들 때였다.
“저…… 투사님…….”
“왜 그러세요, 여신님?”
헤베가 문득 나를 불렀다.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통해 헤베의 만감이 요동치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헤베도 나랑 같은 기분인 건가?
내가 헤베의 향기를 맡고 꼴린 것처럼 그녀도 나와의 포옹을 통해 흥분한 걸지도 모른다.
무슨 망가 같은 상황이냐 싶었지만 충분히 그럴 법했다.
내 방문도 체취를 통해 알아내는 여신님인데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않는가.
점점 성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나나랑 그렇게 했는데도 내 쥬지는 헤베와 육욕을 나누고 싶다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가급적 참으려 자제하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내 멋대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왜 투사님한테서 외간 여자 분의 향기가 나는 거죠……?”
“네……?”
그녀는 충격과 의혹이 반씩 섞인 얼굴로 내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 행복회로를 돌리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날 추궁하는 헤베의 모습이 마치 얀데레 미연시에 나오는 히로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왜 얀데레 특유의 퀭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눈동자 있지 않은가.
지금 헤베가 딱 그런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젊은 여성…… 그것도 한 분도 아니고 최소 두세 분은 되네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건가요 투사님……?”
‘큰일 났다……!’
그런 헤베와 눈을 마주치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칼을 뽑아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여신의 소름끼치는 눈빛에 나는 무어라 말해야 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허나 그런 것도 잠시.
나는 곧 생각을 바꿨다.
‘가만…… 나랑 헤베가 딱히 사귀는 사이인 건 아니잖아? 내가 쫄 필요가 있나?’
나와 헤베와 몸을 섞은 사이긴 하나 딱히 연인 사이는 아니다.
그녀가 남녀 관계에 있어서 날 구속할 명분은 전혀 없는 것이다.
다른 여성들과의 만남 또한 굳이 숨길 필요 없다.
여기서 괜히 지고 들어가면 더 이상하게 보일 거다.
그리 판단한 나는 당당한 기색으로 답했다.
“여행 도중에 새로운 동료들을 만났어요. 같이 다니다 보니까 냄새가 좀 배였나 보네요.”
“새, 새로운 동료요……?”
“네, 던전을 공략하려면 혼자선 무리잖아요. 마침 뜻이 맞는 동료를 만나서 동행하게 됐죠.”
찔리는 구석이 없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그러자 헤베는 당혹감을 드러내며 추궁을 멈췄다.
그녀도 내가 이렇게나 담담히 대답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서로 몸까지 섞은 사이고, 성소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거의 예비 신혼부부였으니까.
이러니까 나 자신이 쓰레기 같았지만 덕분에 헤베의 얀데레화하는 막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여행 도중에 만난 동료 분이란 말이죠…… 그렇단 말이죠…….”
내 대답을 들은 헤베가 내 위아래를 살피며 말했다.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말하고 싶은 게 많은데 차마 입 밖으론 내놓지 못하는 기색이었던 것이다.
설마 나나랑 내가 떡친 것도 알아차린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싶었으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여신이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 행적을 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는 나랑 껴안자마자 다른 여자들의 향기를 감지하지 않았는가.
원작 게임에서 따로 언급된 능력은 아니지만 신들의 전능함을 생각하면 무리일 것 같지도 않았다.
괜히 당당하게 말했나.
살짝 후회하고 있을 때 헤베가 입을 열었다.
“그 동료 분들하곤…… 얼마나 친해지셨어요……?”
기어이 헤베가 심문을 시작했다.
애써 돌려 말했지만 질문의 논점은 명확했다.
그녀는 내가 다른 여성들이랑 떡을 쳤는지, 안 쳤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어차피 나나를 데려오면 다 들통 날 거야.’
오늘은 나 혼자 왔지만 내일은 나나, 유미도 성소로 데려올 계획이다.
헤베를 본 나나가 그녀 앞에서 얌전히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온갖 변태적인 추파를 던져대면서 쓰리썸을 하자고 제안할 것이다.
그때 가서 들키느니 차라리 지금부터 솔직하게 터놓는 게 좋으리라.
결정을 내린 나는 조금 멋쩍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여신님이 생각하시는 만큼은 친해졌어요.”
“그렇군요…… 동료 분들이 아주 매력적인 분들인가 봐요……?”
“동료들 전부랑 한 건 아니고, 그 중에서 한 명이랑 유독 친해졌어요. 제일 빨리 만나기도 했고.”
대놓고 금발 엘프녀랑 하루 만에 떡치고 떡정으로 사귀게 됐다라고 말하긴 뭐해서 나도 좀 돌려 말했다.
허나 상세한 스토리가 전해지지 않았을 뿐 헤베도 어느 정도 다 이해한 듯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채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는 그녀가 얼마나 심란해 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날 끌어안은 팔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한동안 불편한 정적이 이어진 후, 헤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투사님도 혈기왕성한 남성분이시고 젊은 남녀가 만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까요…….”
혈기왕성하다는 부분을 유난히 강조하는 게 여러모로 내 양심을 찔렀다.
순간 나 자신이 성욕에 지배당한 뇌좆남이 된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말이다.
“죄송해요 여신님, 제가 너무 여신님한테 신경을 안 써드린 것 같아요.”
새삼 죄책감이 느껴져서 사과를 건넸다.
누군가는 이게 왜 사과할 일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러는 게 정상이다.
기껏 썸 타는 분위기 만들어 놓고 몸까지 나눴으면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왔다.
지금 헤베의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본다.
“투사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 주세요……!”
그런데 예상 외로 헤베는 담담했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지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물어왔다.
“그 분이랑 저 중에 누구랑 하는 게 더 좋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