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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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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길을 걷던 중 난데없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춥기는커녕 늦은 봄에 걸맞게 따뜻한 날씬데 왜 이러는 거지?
갑작스러운 오한이 신경 쓰인 나였지만 곧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몇 분 간 걸으니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워낙 대 도시라 그런지 율리아나의 성문은 시간대와 관계없이 항상 북적거렸다.
새내기 모험가들의 행렬이나 상단의 마차 같은 걸 질리도록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다 검문하려면 경비대원들도 참 힘들겠다.
활기가 넘치는 성문에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자 내가 찾던 장소가 나왔다.
커다란 2층 구조로 이루어진 건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구간이었다.
말발굽을 본뜬 간판이 큼지막하게 달려 있었고 밖에서부터 말들이 보였다.
손님을 받기 위한 마차들도 모여 있어서 얼핏 보면 택시 정류장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앞으로 장거리 이동도 많이 할 텐데 탈 것 하나쯤은 있어야지.’
내가 마구간을 찾은 이유는 당연히 말을 사기 위해서다.
가디스 던전은 기본적으로 방대한 필드를 가진 오픈 월드 게임이다.
그런 게임엔 여러 종류의 탈 것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원작 게임에서도 장거리 여행을 위해선 탈 것이 필수적이었다.
말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무난한 탈 것으로 도시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어지간한 명마가 아니고서야 전투 능력이 전무하다.
그리폰이나 지룡 같은 고급 탈 것과 달리 겁도 많아서 전투가 벌어지면 도망치기 일쑤다.
심할 경우 플레이어를 낙마시킬 정도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만큼 성능적인 측면에선 그다지 높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당장은 좋은 탈 것을 구하기 힘드니까.’
그리폰이나 지룡 외에도 뛰어난 탑승 수단들이 다수 있다.
허나 이런 녀석들은 대체로 구하는 게 쉽지 않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워낙 희소해서 구입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수 없다.
애당초 다방면에서 활약할 탈 것을 구하려 했다면 마구간으로 오지 않았을 거다.
‘적당히 타고 다니기 좋은 녀석으로 하나 구해야지.’
지금은 그저 먼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게 귀찮아서 이동 수단을 구하려는 것뿐이다.
남쪽 던전까지 가려면 최소 한 시간인데 온전한 여신상에 들릴 때마다 시간을 허비하긴 아까우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입구를 지나 마구간 안으로 들어왔다.
안쪽에는 바깥에서 본 것보다 더 많은 말들이 사육장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를 고르는 사람들도 분주했다.
말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초등학교에서 소풍 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신기한 기분으로 말들을 스윽 둘러보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특이하게 입은 오빠네? 어떻게 도와줄까?”
굉장히 쾌활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었다.
나보다 조금 작을 정도로 장신이었으며 배꼽을 훤히 드러낸 상의와 팬티랑 다를 바 없는 핫팬츠를 입었다.
머리에 쓴 카우보이모자까지 더해져서 서부 시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비주얼을 보여줬다.
풍성한 갈색 머리부터 살짝 구릿빛이 도는 매끈한 피부까지 척 봤을 때 섹시하단 인상이 강하게 드는 여성이다.
이 자리에 나나가 있었다면 바로 ‘우효옷! 아메리칸 스타일 언니 대꼴!’ 하면서 소리를 질렀을 거다.
훌륭하기 그지없는 몸매를 감상하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사장님 되시나요?”
“아니, 사장은 우리 아빠고 나는 그냥 직원. 편하게 제시라고 불러.”
제시라. 장난감 스토리에 나오는 카우보이 히로인이 생각나는 이름이다.
제시의 거침없는 자기소개에 나도 멋쩍게 이름을 밝혔다.
“잘 부탁드릴게요, 제시. 저는 감다키예요.”
“감다키……? 설마 네 그 아라크네 슬레이어야? 서천 클랜을 뻥 차버렸다는?”
이름을 밝히자마자 제시는 눈을 크게 뜨더니 감탄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소문이 퍼진 건 비단 메인 스트리트 쪽만이 아닌 듯하다.
하긴, 여기는 모험가들이 많이 오가는 장소니까 오히려 소식 전해지는 게 더 빨랐겠지.
이젠 도시 어디에서나 날 알아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제시의 물음에 나는 어색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 네…… 그런 일이 있긴 했죠.”
“이야~ 소문의 주인공을 하루아침에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듣던 것보다 훨씬 미남이잖아?”
뭐가 그리 의외인지 제시는 흥미로운 눈길로 내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부끄러운 기분이 든 나는 시선을 피하면서 이야기했다.
“제 모습이 생각한 거랑 많이 다른가 봐요?”
“팬티만 입고 다니는 모험가라기에 우락부락한 바바리안을 생각했거든~ 이런 미청년일 줄은 생각도 못 했지!”
웃으면서 말하는 제시에게 나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 행색은 바바리안 그 자체다.
차라리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호드를 위하여! 라고 소리치고 다니는 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 마구간엔 어쩐 일로 왔어? 말이라도 한 마리 잡으려고?”
“아, 아뇨. 그냥 탑승용 말 구하려 온 건데요. 가급적 말 잘 듣는 녀석으로…….”
“아하핫! 알아, 알아. 그냥 농담 좀 해본 거야~”
장난기가 많은 성격인지 제시는 바바리안 드립으로 연신 날 놀려먹었다.
이러다가 또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어떡한담.
내심 내 이미지의 변질을 우려하며 제시에게 말했다.
“아무튼 말 한 필 구하려 하는데 어떤 게 좋을까요?”
“말 타본지는 얼마나 됐어? 경험에 따라 추천해줄 수 있는 말이 다르거든.”
제시의 되물음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잠시 고민했다.
가디스 던전에선 딱히 승마 스킬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말을 탈 수 있으며 승마의 숙련도를 결정하는 것은 말과의 교감이다.
즉 한 마리의 말을 계속해서 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잘 타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변수가 있지 않다면 나는 본능적으로 말을 탈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둘러댄다.
“많이 타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 타는지는 알아요.”
“흐흥~ 초심자구나. 귀엽네~”
내 대답을 들은 제시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마치 날 걸음마 떼기 시작한 갓난아기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은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카우걸 풍의 미녀가 말하니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업계 포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대로 응애응애하면서 이것저것 가르쳐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따라와, 초심자가 타기 좋은 말들은 저쪽에 있어. 뭐, 가격대는 저마다 다르지만 말이야.”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시가 나를 안내했다.
가는 길에도 말들이 여럿 보였다.
제시 말대로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는데 척 봤을 때는 어디가 다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혹시 말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 건가요?”
궁금증이 도진 내가 묻자 제시는 말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 설명해줬다.
“늙은 말이나 훈련이 덜 된 말일수록 싼 편이야. 반대로 훈련이 잘 됐고 품종이 좋은 말은 비싸지.”
결국에는 나이와 혈통빨이라는 건가.
내가 말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품종이 중요하단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종마라는 개념이 괜히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일반인이면 적당히 아무 말이나 골라 타도 상관없는데 모험가는 가급적 훈련된 말을 타는 게 좋아.”
“특별히 이유라도 있나요?”
“너희는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거나 괴물들한테 둘러싸이는 일이 허다하잖아. 평범한 말들은 거품 물고 도망쳐버린다고.”
그런 상황에서 잘 대처하려면 모험가용으로 훈련된 말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
제시가 그렇게 덧붙일 무렵 나는 머릿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원작 게임의 말들은 딱히 훈련된 말과 훈련되지 않은 말이 나눠지지 않았다.
당연히 말 중에서 공포 저항력이 높은 개체도 따로 없었다.
게임 세계의 말은 뭔가 다른 게 있는 건가?
여기도 DLC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요컨대 이 녀석 같은 말이 너희한테 잘 어울리지.”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제시가 어느 말 앞에 멈춰 섰다.
검은색 갈기가 아주 멋들어진 녀석이었다.
마치 중세 전쟁 영화에서 장군들이 탈법한 비주얼이다.
당장이라도 튀어나도 발굽을 날릴 것 같은 외모였지만 생각보다 온순했다.
제시의 손길에 푸르릉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었다.
“이 친구가 모험가용 말인가요?”
“응, 이름은 에보니 스피어. 최고 시속은 70km. 공포 극복 훈련을 마쳐서 어지간한 괴물 상대론 눈 하나 깜짝 안 해. 오히려 자기가 먼저 싸우려 들지.”
확실히 그럴 것 같은 인상이긴 하다.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놈들은 이 친구한테 다가오기도 전에 뒷발차기를 맞고 골통이 박살나리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휘파람 소리만 듣고 주인을 찾아오는 능력도 있어. 주인과 떨어져 있을 땐 자기 나름대로 생존도 가능하고.”
“와…… 그쯤 되면 말이 아니지 않아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감탄이 흘러 나왔다.
원작 게임에서 등장하는 말 보다 성능 면에서 훨씬 좋았다.
원작의 말들은 공포심이 매우 높아서 고블린들에게만 둘러 싸여도 플레이어를 떨구곤 했다.
그걸 생각하면 에보니 스피어는 게임 기준으로 최소 A급 이상에 해당되는 탈 것이리라.
몇 번인가 감탄사를 흘리면서 궁금한 점을 얘기했다.
“먼 거리라는 건 정확히 얼마나 되나요?”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어. 설령 대륙 반대편에 있더라도 네가 부르면 알아서 찾아올 거야.”
소환 거리에 제약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황당함을 느낀 나는 추궁하듯 제시를 바라봤다.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요? 말한테 무슨 천리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마법을 걸어놨으니 그렇지. 여기 봐봐.”
에보니 스피어 목덜미를 가리키며 제시가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웬 낙인 같은 게 새겨져 있었다.
“종속의 인장이란 거야. 이 인장을 새기면 주인의 부름을 어디서든 들을 수 있어. 덩달아 충성심도 강해지지.”
“되게 편리하네요.”
가디스 던전의 탈 것은 말이든 그리폰이든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직접 데리러 가야 했는데.
누가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참 혁신적인 마법이다.
“그래도 사람과 말을 이어주는 건 마법이 아니라 유대야. 그러니까 너무 함부로 대하진 마.”
제시가 쓴웃음과 함께 지나가듯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제시를 보니 절로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원작 게임에선 말을 샌드백으로 쓰거나 낙하할 때 쿠션으로 쓰는 등 험한 짓을 많이 했는데 게임 세계에선 그러지 말아야겠다.
“그럼 이 친구 가격은 어떻게 되나요?”
“말만 구매하면 8만 아웬, 안장이나 종속의 인 가격까지 합하면 10만 정도 나와.”
세상에 10만이라고?
솔직히 5만 아웬짜리 차원낭도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 가격에 두 배잖아?
예상보다 훨씬 높은 가격대에 내심 놀랄 때 제시는 내 마음을 귀신 같이 알아채고 말했다.
“평범한 말들은 1만 아웬에도 살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애들은 금세 죽거나 잃어버리잖아. 모험가라면 좋은 말에 투자할 줄도 알아야지.”
제시 말에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초심자인 내가 돈 아낀다고 싼 말을 샀다간 금세 잃어버릴 거다.
그렇게 돈을 날릴 바에야 제대로 투자하는 게 낫겠지.
비싸다고 좋은 법은 아니지만 싼 것보다야 값어치를 할 테니까.
그리 판단한 나는 지갑에서 10만 아웬을 꺼내 제시한테 지불했다.
“바로 데리고 갈게요.”
“휘유~ 겁나 쿨한데? 조금만 기다려. 바로 준비해줄게!”
금화를 받아든 제시가 이것저것 챙겨줬다.
에보니 스피어에게 안장과 고삐를 채워주고 내게는 인장이 새겨진 증패를 건네줬다.
증패에는 내 피와 에보니의 피를 조금씩 섞어 넣었는데 이걸로 예속이 된다고 한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에보니가 알아서 찾아오는 건가요?”
“응, 증패는 너만 사용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가져가봤자 소용없어. 하지만 재발급할 때 돈 꽤나 깨지니까 가급적 잃어버리지 마.”
증패의 재발급 비용은 무려 1000아웬이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라 나는 제시의 말을 명심했다.
그러면서 에보니 스피어 위에 올라타려 했는데 에보니가 날 위해 몸을 숙여줬다.
[푸르릉.]
“어? 아, 고마워.”
첫 탑승이어서 자세가 좀 어색했는데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조금 놀란 마음으로 고맙다고 인사하자 에보니는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똑똑하다곤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사람 말을 잘 알아들을 줄은 몰랐다.
“원래 이렇게 사람 말을 잘 들어요? 완전 똑똑한데?”
내가 에보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묻자 제시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걔가 암말이라 남자들을 좋아해. 내가 탈 때는 저 정도로 친절하진 않아.”
“그, 그래요……?”
“우리 아빠한테도 그렇게 착하게 군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인 걸?”
그 말을 들이니까 기분이 뭔가 묘해졌다.
설마 검은 산양의 뿔이 동물에게도 적용되는 건 아닐까?
나한테 이상할 정도로 애교 부리는 에보니를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르릇, 푸르릉…….]
“어, 어? 아 쓰다듬어달라고……?”
[푸르릉…….]
내가 잠시 멍 때리고 있자 에보니가 고개를 쳐들며 내 몸에 얼굴을 비볐다.
순간 당황한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에보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말이 날 이성적으로 보다니.
그런 건 말박이들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리 생각하는 나를 에보니 스피어가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저 눈빛이 연심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