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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147화 (14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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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지? 액수가 틀리기라도 하나?

아까부터 위폐인지 아닌지 열심히 확인하던데 설마 가짜 금화라도 섞여 있는 거 아니야?

사장님의 말투가 너무 진지한 나머지 내 머릿속에선 온갖 상상이 다 떠올랐다.

다행히도 그녀가 날 부른 이유는 그런 심각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꽤나 저자세로 이야기를 꺼냈다.

“모험가님에 대한 소문 들었어요. 아라크네를 단칼에 죽이셨다면서요?”

“단칼은 아니지만 잡긴 잡았죠…….”

소문이란 게 와전되기 마련이지만 벌써 그 정도로 부풀려진 건가.

황당한 심정으로 긍정하자 사장님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러면 다음에도 또 위험한 던전에 들어가시겠네요, 그렇죠?!”

“아 네…… 당장 며칠 후에도 또 가려고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의뢰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장 부탁드릴 수 있는 게 모험가님 뿐이라서요……!”

간절하게 말하며 내 양손을 붙잡는 사장님.

느닷없는 스킨쉽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그 와중에 새하얀 면장갑에 감싸인 손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어려운 게 아니면 일단 들어는 보겠는데, 이런 건 보통 길드를 통해 해야 하지 않나요?”

청순한 미인의 부탁에 나는 일단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허나 동시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모험가 길드가 멀쩡히 있는데 왜 개인적으로 의뢰하려는 걸까.

길드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간편하고 확실할 텐데 말이다.

생각할수록 수상쩍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가 날 이용해먹으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혹시 모험가님, 마정석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마법 아이템 만들 때 쓰는 재료잖아요. 그게 왜요?”

“제가 필요한 물건이 마정석이거든요……. 그런데  길드 쪽에서 워낙 독점을 심하게 해서…….”

마정석은 던전에서만 채집할 수 있는 희귀한 재료다.

주로 반지 같은 마법 아이템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데, 구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신의 기운이 강하게 퍼진 곳에서만 생성되기에 재앙신이 등장하는 던전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길드에서 독점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길드 규정상 마정석 채집 의뢰는 하지도, 받지도 못해요. 구하려면 길드 거래소에서 구매하는 수밖에 없죠. 당연히 엄청 비싼 가격으로요…….”

“아아…….”

모험가들에겐 다소 우호적인 길드지만 상인들에게도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듣자하니 길드의 주 수입원은 의뢰의 알선비가 아닌 전리품 판매라고 한다.

모험가들에게 전리품을 매입한 뒤 이를 개인이나 상단에게 다시 팔아서 이윤을 얻는 것이다.

그런 길드에게 마정석은 이코르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수입원이다.

그들 입장에선 중요한 돈줄이 다른 곳에서 거래되는 걸 최대한 막고 싶겠지.

그래서 마정석을 소비하는 상인들이 개인적으로 마정석을 구하지 못하게 조치를 취해놓은 것이리라.

“다른 실력자들은 이미 길드와 계약해서 이런 말씀드리기도 힘들어요……! 제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사장님의 부탁은 점점 애원에 가까워졌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이 가게는 마정석 공급에 큰 차질을 빚고 있는 듯하다.

못 구하면 죽을 것처럼 말하는 사장님의 간곡함 때문에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겠어요, 사장님. 마정석 얻으면 우선적으로 여기에 팔게요.”

“정말요?!”

내가 흔쾌히 허락하자 사장님은 환희에 젖으며 되물었다.

아마 장원에서도 다량의 마정석을 채집할 수 있을 거다.

던전 공략을 끝마친 뒤에는 마정석 광산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나온 마정석들을 어디에 내다 팔지는 순전히 공략자 마음이다.

길드 말고 다른 곳에 마정석을 판매하지 말라는 규정은 없으니 말이다.

“대신 저도 뭔가 메리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귀찮음을 무릅쓰고 사장님한테 팔아드리는 거잖아요.”

허나 무조건적으로 계약을 체결할 생각은 없다.

어느 쪽에 팔든 상관없지만 길드에 파는 게 더 편할 거다.

마정석을 공급받고 싶다면 내가 귀찮음을 감수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길드의 마정석 매입 시세는 킬로그램당 2천 아웬이에요. 저는 50퍼센트 더 쳐서 3천에 구매할게요!”

“그렇게 비싸게 사셔도 돼요……?”

“문제없어요. 길드에선 그것보다 더 비싸게 파니까요. 원하신다면 좀 더 쳐드릴 수도 있어요.”

길드도 참 어지간히 남겨먹는구나.

50퍼센트 더 쳐줘도 길드에서 사는 것보다 싸다니.

나한테 매달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길드도 참 너무하네요. 그 정도면 완전 폭리잖아요.”

“비싸기만 하면 어떻게든 구해볼 텐데 지금은 물량 자체가 얼마 없거든요. 그래서 더 문제예요.”

사장님이 덧붙이길, 얼마 전부터 민간에 풀리는 마정석의 양이 한없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길드와 상업 계약을 맺은 상인들에게 다 몰아주는지라 이런 개인 상점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꼭 부탁드릴게요……! 시세가 걱정되시면 따로 확인하고 오셔도 좋아요.”

어느덧 차원낭 값을 다 계산한 사장님이 다시금 간청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원낭을 열어보았다.

“사장님 같은 미인이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 없죠. 맡겨주세요.”

“미, 미인이라니 과찬이세요…….”

내 칭찬에 사장님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칭찬 받아서 기쁜지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얼굴이 잘 생기니까 작은 칭찬에도 저런 반응이 나오는구나.

뭔가 기분 좋으면서도 씁쓸했다.

사장님에게 대답하면서 시험 삼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차원낭 안에 넣어봤다.

돈주머니며 백팩 등을 전부 넣었는데 가방이 차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마치 깊은 구덩이 안에 동전 한 닢 던져 넣는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아, 참고로 그 가방에는 호출 기능도 있어요. 원하는 물건의 이름과 개수를 말하면 가방이 알아서 꺼내주죠.”

“와, 진짜요?”

신기한 기능을 듣고 곧장 사용해봤다.

5아웬이라고 말하자 가방 안쪽에서 동전 다섯 닢이 짤랑 하면서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원작 게임의 인벤토리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유용할 것 같았다.

이로써 전리품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겠지.

만족감을 느끼면서 나는 가방을 들쳐 맸다.

“그러면 이만 가볼게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한 거 같은데…….”

상점을 나서려 할 때 문득 사장님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장님도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듯이 스스로의 이마를 꽁 찍으며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죄송해요 제가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뇨, 아뇨. 걱정이 많으신데 깜빡하실 수도 있죠. 아무튼 전 감다키예요. 잘 부탁드릴게요.”

“아웰린의 크리스티나예요. 전 항상 가게에 있으니까 물건 구하시면 여기로 와주세요.”

통성명을 마친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아웰린이라. 공교롭게도 내가 위조 신분에 적어 넣은 곳과 같은 동네였다.

유르돌리아 서쪽에 위치한 지방인데, 설정상 마법이 상당히 발달된 동네다.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학교도 거기 있고, 마녀들도 많고 어쨌든 마법의 고향 같은 곳이라나.

그렇다면 크리스티나의 직업도 비단 잡화점 사장이 아니라 마도공학자라고 봐야할 거다.

나중에 아웰린 출신이라고 구라치면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상점을 나서려 할 때였다.

“응?”

문득 진열장에 놓인 물건 중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푸른색으로 반짝거리는 목걸이였는데 아쿠아마린 같은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석을 감싸고 있는 꽃 모양 장식이 무척 예뻤다.

마치 맑은 날의 호수를 보석 안에 담아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그 청초한 빛에 매료되어 시선을 꽂자 크리스티나는 귀신 같이 알아채고 내게 다가왔다.

“목걸이 보시려고요?”

“아……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예쁘게 생겨서 구경 좀 했어요.”

크리스티나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예쁜 목걸이긴 하지만 내게는 쓸모없는 물건이다.

내가 모르는 디자인인 걸 보면 효과가 달려 있는 장신구는 아니란 얘기니까.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목걸이를 집어 들고 내게 상품을 어필했다.

“율리아나의 명물인 아르네우스 미르나를 본떠 만든 물건이에요. 청순한 여성분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죠.”

“그, 그래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이에요. 마음에 두신 분이 있으면 이 기회에 선물해 보시는 거 어떠세요?”

마음에 둔 여성.

그 말을 듣고 불현 듯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생각해보니 내 주변에도 파란색이 잘 어울리는 청순한 이미지의 여성이 있다.

엄밀히 따지면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여신님이지만 말이다.

그녀를 떠올리며 목걸이를 다시 보자 정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빈손으로 돌아가기도 뭐하지…….’

브릴린트에겐 망치를 선물해줬었는데 헤베한테는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다.

이 이야기가 그녀의 귀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들었다면 꽤 서운해 할 거다.

무사 귀환을 기념할 겸,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거 괜찮네요. 가격이 어떻게 되죠?”

“원래는 시세는 1만 5천이에요. 하지만 모험가님은 소중한 거래자니까, 1만 아웬만 주세요.”

1만이면 결코 싼 가격은 아니다.

어제의 나였다면 고민했을 가격이지만 지금은 주저 않고 지불했다.

그래도 여신님한테 주는 선물인데 이만한 가치는 있어야지.

내 지갑 사정도 엄청 여유롭고 말이다.

차원낭에 이어 목걸이까지 구입한 나는 비로소 잡화점을 나섰다.

-

“짜증나아아앗!”

모험가 길드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카페.

고급스러운 분위기 물씬 나는 그곳에서도 가장 최상층에 위치한 방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주인공은 화려한 금발을 가진 마법사 소녀였다.

평범한 머리카락은 아니었는데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보라색이 섞인 투톤 헤어였다.

비단 비유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그녀의 머리카락 주위에선 연신 별빛 같은 반짝임이 일어났다.

이는 곧 그녀가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돌려 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현세에서 살아남은 지배신 중 한 명이었다.

“진정하세요, 스쿨드님. 소리 지른다고 그 녀석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땡깡을 부리는 말괄량이 여신, 스쿨드를 아마조네스 여전사가 달랬다.

길드 홀에서 다키를 유혹했던 그 여전사였다.

그녀 외에도 방 안에 모여 있는 여성들은 전부 다키가 길드에서 만났던 이들이었다.

“그래도 짜증난단 말이야! 완전 분해! 분해애애앳!”

마법사 소녀로 변장했던 스쿨드는 성질을 내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내팽겨 쳤다.

바리가 대놓고 영입하는데 실패했으니 우리는 은근슬쩍 접근해 보자.

그런 발상으로 시작한 모험가 연기였다.

일부러 평소보다 노출도 심한 옷을 입고 적극적으로 스킨쉽도 하며 유혹을 펼쳤다.

클랜에서 내로라하는 미인들로 파티도 구성했다.

거기에 같은 모험가라는 친숙함까지 있으니 틀림없이 먹힐 거라 생각했다.

허나 돌아온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잠깐 넘어오나 싶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냅다 튀어버렸다.

너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쫓아가 정체를 밝히고 강제 입단 시켜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걔 완전 고자 새끼 아니야?! 어떻게 우리가 유혹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수가 있어?!”

“확실히…… 이렇게나 야하게 입었는데 그냥 가버린 걸 보면 정상은 아니죠.”

“그렇게 따지면 팬티만 입고 다니는 것부터 이상하지 않아?”

어느덧 스쿨드와 권속들 사이에선 다키가 제 정신이 아닌 고자 새끼로 낙인 찍혔다.

물론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스쿨드를 포함하여 여기 있는 여성 모두 스스로의 미모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다키에 대한 박한 평가는 그런 본인들을 매몰차게 찬 것에 대한 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허나 그런 마음과 다르게 다키를 향한 집착은 더욱 강해졌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처참하게 깨져서 오기가 생긴 것이었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 이대로 가단 바리 그 년하고 똑같은 꼴이라고! 그건 절대 안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는 스쿨드.

너무 세게 일어나서 그런지 대충 걸치고 있던 비키니형 의복이 반쯤 벗겨졌다.

아담하고 귀여운 젖가슴이 훤히 드러났으나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데려올 거야! 그러니까 다들 좋은 의견 좀 내봐!”

권속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하자 한 여성이 손을 들었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여성이었다. 장비를 보아 주문 계열 클래스인 듯했다.

“그거라면 제가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오오, 그래 크림힐트! 얼른 말해봐 얼른!”

스쿨드의 재촉에 크림힐트는 다소 위험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기로는 그 남자, 조만간 어떤 던전을 공략한다고 해요.”

“던전? 바로 어제 공략했는데 또?”

“네,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외부로 나가는 건 확실하죠. 그때 조금 수를 쓰는 게 어떨지.”

그렇게 말하며 크림힐트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얼음으로 이루어진 인형들이 나타나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는 다키와 닮았고, 다른 하나는 뿔 달린 괴물의 형상이었다.

“그 남자가 빈틈을 보일 때 소환수로 기습하는 거예요. 팔다리 잘리고 죽기 직전까지 몰렸을 때 저희 쪽에서 도와주면 생각이 바뀌겠죠.”

“그거 좋은 생각이긴 한데 너무 뻔하지 않아? 우리가 짜고 친 게 훤히 보일 텐데.”

“변명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어요. 정 안 되면 반쯤 시체로 만든 다음에 여신님이 손쓰면 되지 않나요?”

길드에서 보여준 살가운 모습과는 상반되는 이야기였다.

다키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상해도, 기억 조작도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다.

크림힐트의 말에선 그런 의지가 엿보였다.

그녀가 이상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크림힐트의 말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히힛, 나쁘지 않네~ 크림의 소환수라면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

“꺄하핫! 좋아! 아주 좋아 크림힐트! 바로 실행해 옮겨!”

여전사가 흥미롭다는 듯이 맞장구치자 스쿨드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각오해 오빠~ 날 차버린 대가는 아주 끔찍할 테니까~ 실컷 찢은 다음에 천천히 예뻐해 줄게~!”

============================ 작품 후기 ============================

얀데레 여신님과 권속들 너무나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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