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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
“아니 이 정도로 선 넘을 것까지야…….”
나나의 거센 항의에 나는 못마땅한 어투로 말했다.
허나 이어지는 나나의 말을 듣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가던이 25퍼센트 할인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난 비율이잖아요!”
“……그러네?”
다른 것도 아닌 가디스 던전으로 비유하니까 바로 감이 왔다.
가디스 던전은 무려 6만 5천원이라는 가격대를 3년 넘게 유지해온 뻔뻔한 게임이다.
여름 할인 때도 10퍼센트조차 할인하지 않았던 게임이 25퍼센트나 할인한다고 생각하니 그 비율이 얼마나 큰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유미 일행이 한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줘도 될 것 같지만…….’
다른 건 몰라도 아라크네를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유미의 원령 쇄도였다.
린크가 어그로를 세게 끌어준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나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나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그녀의 의견을 묵살하고 냅다 줘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리라.
유미 일행에겐 미안하지만 단가를 좀 낮춰야겠다.
“그러면 20퍼센트는 어때? 이 정도면 줄 만하잖아?”
유미 일행을 한 차례 흘겨본 뒤 나나에게 물었다.
받는 입장이라 뭐라 할 못하는 유미 일행이었지만 그들도 가급적 높은 보수를 받고 싶을 것이다.
이 무거운 태피스트리를 여기까지 들고 온 것도 그들이니까.
“15퍼센트! 그 이상은 절대 안 돼요! 다키님도 여기저기에 쓰셔야 되잖아요!”
하지만 나나는 그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지 거기서 5퍼센트나 더 깎아버렸다.
나나는 내 목적이 재앙신 토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모험에 드는 비용이 천문학적일 거란 것도 대략적으로 유추한 듯했다.
유미 일행에게 주는 돈을 최대한 줄이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거다.
그래도 뭐, 15퍼센트 무려 30만 아웬이다.
태피스트리 하나 값에 웃돈 좀 얹어준 금액인 것이다.
이 정도면 유미 일행도 만족할 수 있겠지.
“좋아. 너희들 지갑 가진 거 있지?”
“아, 네……! 여기 있어요, 선생님.”
내 말을 듣자마자 린크가 얼른 돈주머니를 꺼냈다.
나는 그 안에 1000아웬짜리 동전 300닢을 넣어주었다.
총수입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지만 초보 모험가인 그들에겐 이마저도 어마어마한 거금이리라.
그 증거로 유미 일행은 지갑에 들어온 금화 300닢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우, 우와…….”
“다음엔 좀 더 많이 쳐줄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해주라.”
“무, 물론이죠 선생님! 이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해요!”
“25만 아웬만 받아도 본전 이상이라 생각했는데 5만이나 더 주셨는걸요……!”
“맞아! 어차피 우리는 사부한테 특별 강습도 받기로 했잖아. 강습비 미리 냈다고 생각하지 뭐!”
내가 번 돈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서운해 할 법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이런 걸 보면 유미 일행도 참 착하고 순진한 것 같다.
일말의 시기심 없이 기뻐하는 그들을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자. 유미는 내일 아침에 길드로 나오고.”
정산을 마친 나는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린크도, 다나도 적잖게 아쉬운 기색으로 말했다.
“뭐야, 벌써 가게 사부?”
“어디 볼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응, 장원 공략 때문에 이것저것 할 게 있거든.”
내 말을 듣고 일행들은 더욱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들과 헤어지려니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비록 하루 밖에 같이 활동하지 않았지만 그간 서로에게 정이 많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계속 같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일.
린크와 다나는 아직 나와 함께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무리하게 날 따라다니는 것보다 적정한 사냥터에 가서 실력을 쌓는 것이 그들에게도 더 도움이 되리라.
“알겠습니다, 선생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릴게요. 선생님은 저희 은인이세요.”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해야 돼 사부……! 장원 같은 데서 죽지 마!”
린크는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듯 엄숙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반면 다나는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응원했다.
새삼 그들과의 인연이 각별하다는 것을 느낄 때, 조용히 있던 요르나도 입을 열었다.
“다키님한테는 정말 신세를 많이 졌어요. 절 구해주신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그래, 그래. 다음부턴 아무나 막 따라가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유미 일행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30만 아웬이나 생겼으니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새 장비를 구하고 스킬을 배우는 데만 한 나절은 걸리겠지.
이걸로 그들도 완전 초보자 딱지를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유미 일행을 보낸 후 나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다키님도 참……. 뉴들박이 마려운 건 알겠는데 너무 퍼주려 하면 곤란하다구요. 주의해주세요.”
“미안해. 이번엔 내가 좀 부주의했어.”
나나의 훈계에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나나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다 나를 걱정해서 그런 거다.
유미 일행한테 주는 돈이 줄어든다고 해서 딱히 본인 몫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순수하게 내 앞길을 위해서 신경 써주는 거라 할 수 있다.
내 사과에 나나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저한테 사과하실 건 없고요! 그보다 저희 이제 뭐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도 어느덧 길드 밖으로 나왔다.
광장에 들어선 나는 길드 뒤편의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엊그제 방문했던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나 너는 내일까지 새 스킬 좀 배워와. 이번 던전 공략에 꼭 필요한 스킬들이 있거든.”
“어떤 걸로 배워오면 될까요?”
“해주의 진이랑 보호의 장벽, 가급적 신념의 방패까지 배워오면 좋고.”
해주의 진은 말 그대로 저주를 해주하는 광역 스킬이다.
저주 스킬을 주로 사용하는 장원 몬스터들을 상대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해서 꼭 배워두는 편이 좋다.
해주의 진을 배워두지 않으면 신성한 유리방울이라는 아이템을 잔뜩 사가야 하는데 이게 엄청 비싸다.
개당 1700아웬이나 해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구할 수 있는 수량에도 한계가 있다.
법술을 배울 때도 헌금을 내야 하나 장기적으로 봤을 땐 이쪽이 훨씬 효율적인 것이다.
“해주진이랑 보장, 신방이군요! 확실하게 기억했어요!”
내가 언급한 스킬들을 자기 나름대로 기억한 뒤 힘차게 대답하는 나나.
나는 그녀에 몇 가지 더 조언을 하면서 돈주머니 하나를 넘겨줬다.
“보장이랑 신방은 여유 되면 배우고 해주진부터 우선적으로 배워. 그리고 이건 오늘 치 용돈.”
“헤엑……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주세요? 법술 배울 때 이만큼이나 들어요?”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혹시 몰라서 주는 거야. 남는 돈은 생활비로 써.”
해주의 진부터는 중급 법술로 분류될 거다.
신성한 빛이나 정화와 다르게 몇 시간 투자하는 걸론 배울 수 없겠지.
거기에 더해 보호의 장벽이랑 신념의 방패까지 배우려면 하루를 꼬박 신전에서 보내야 할 거다.
스킬을 배우는 내내 신전에 들어가 있어서 숙식 걱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돈 필요한 일은 있을 거다.
돈주머니를 챙겨 넣으면서 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키님은 어디 가시려고요? 이러니까 어디 멀리 가시는 것 같잖아요.”
“장비도 좀 맞출 겸 여신님들 좀 만나고 오려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여신님들은 당연히 헤베, 브릴린트를 말하는 것이다.
나나도 이를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듯 물었다.
“핫! 여신님이라면 다키님이 말했던 그 분들 말하는 거죠? 저도 보고 싶어요!”
나나에겐 이미 헤베와 브릴린트에 대해서 몇 번인가 언급한 적이 있었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흥미를 보였는데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더욱 관심을 가지는 듯했다.
“네가 여신님들한텐 무슨 볼 일인데?”
“그야 여신님이잖아요! 존나 예쁘고 야할 거잖아요! 한 번쯤 보고 싶은 게 당연하죠!”
나나의 입에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왔다.
벌써부터 불순한 의도가 가득해 보였지만 어차피 만나게 할 생각이었다.
나는 흥분하는 나나를 진정시키며 이야기했다.
“내일은 나나 너도 데려가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법술 배우는데 집중해.”
“네 다키님! 완벽하게 마스터 해놓고 있을게요!”
여신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기쁜지 나나는 거수경례와 함께 대답했다.
물론 이번 경례도 왼손 경례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럼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잘 하고 와.”
나나를 신전으로 보낸 뒤 나도 성문으로 향했다.
성소로 이동할 수 있는 온전한 여신상은 던전 근처에 있다.
아라크네를 쓰러뜨린 뒤 숨겨진 루트가 열려서 빠른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성문으로 가는 도중 남쪽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잡화점에 한 곳 들렸다.
말이 잡화점이지 고급스러운 마법 물품들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하나, 다름 아닌 차원낭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돈도 들어왔는데 더 이상 인벤 문제로 귀찮아할 필요 없지.’
인내하는 자의 신전에 이서 불경한 자의 둥지까지.
항상 던전을 클리어한 후엔 전리품 문제로 몸도 머리도 피곤했다.
한 번 더 그런 불편함을 겪을 바에야 쿨하게 투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가격 진짜 개오바네…….’
그런 생각으로 차원낭을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듣던 대로 엄청 비쌌다.
유미 일행이 말했던 것처럼 가장 싼 가방도 1만 아웬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본 건 커다란 상자 정도 용량을 가진 저가품이었는데 물건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야, 그래도 이왕 사는 거 아쉽지 않게 사자.’
상자 정도의 용량만 돼도 훨씬 많은 물건을 소지할 수 있을 거다.
허나 지금의 나는 지갑과 타협할 필요가 없다.
당장 170만 아웬이 들어왔는데 아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저기…… 사장님?”
“앗,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가방을 둘러보길 잠시 점주로 보이는 여성을 불렀다.
내 부름을 받은 여성은 활기차게 대답하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뭔가 연금술사 혹은 마도공학자 느낌이 물씬 나는 여성이었다.
밝은 핑크색 머리카락을 땋아 올렸고, 조그마한 안경을 썼다.
하얀색 망토 아래엔 미니스커트와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어 세련된 매력까지 갖췄다.
젊고 예쁜 여사장님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차원낭 추천을 부탁했다.
“차원낭 하나 사려고 하는데 어떤 게 괜찮은지 모르겠어서요.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마침 잘 됐네요. 모험가님한테 어울릴 만한 물건이 있거든요. 이쪽으로 와보실래요?”
부탁 받은 여사장님은 가게 안쪽으로 날 안내했다.
나한테 어울릴 만한 물건이라니.
마치 내가 뭘 하고 다니는 사람인지 알기라도 하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이 사장님, 내가 가게에 들어올 때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설마 여기까지 내 소문이 퍼진 건가?
“이쪽에 있는 게 대용량 차원낭들이에요. 던전 공략자들에게 특화된 물건이죠. 모험가님처럼 던전에 자주 들어가시는 분들에겐 딱일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내가 던전 공략자란 걸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내 업적을 익히 들었다는 소리겠지.
하기야 팬티 바람으로 던전을 클리어한 사람이 온 세상에 나 밖에 없을 텐데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다.
“크기는 아까 봤던 것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데 안쪽은 다른 건가요?”
새삼 내 유명세를 실감하며 마음에 드는 가방을 하나 집어보았다.
입구 쪽에 진열됐던 것들과 달리 사장님이 소개해준 가방들은 자그마한 슬링백 정도 크기였다.
얼핏 보면 밖의 가방들 보다 더 저가품으로 보였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네, 여기 있는 제품들은 고도의 아공간 마법으로 내부 공간을 몇 번이나 왜곡했답니다. 용량은 작은 창고 정도죠.”
작은 창고 정도라.
정확한 평수를 얘기해주진 않아 확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일단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물건이 건 확실하다.
이거 하나만 있어도 전리품 못 챙겨서 골치 아플 일은 없다는 뜻이겠지.
“그럼 이걸로 하나 주시겠어요? 가격이 어떻게 되죠?”
“모험가님께서 고르신 제품은 5만 아웬이에요. 방수도 뛰어나고 내구성도 좋아서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세상에, 5만 아웬이라니.
밖에 진열되어 있는 가방들 보다 5배나 더 비쌌다.
하지만 뭐, 원래 세계의 명품백도 이 정도 가격은 하니까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
흥정이라도 한 번 해볼까 했지만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나 감다키, 하루 만에 170만 아웬을 번 남자다.
고적 5만 아웬쯤이야 쿨하게 내줄 수 있다.
“여기 있어요.”
1000아웬짜리 동전 50닢을 세서 사장님에게 건네줬다.
사장님은 내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세었다.
동전 하나를 짚을 때마다 그녀의 손에서 푸른색 빛이 났는데 아무래도 마법의 일종인 모양이다.
위조 동전도 마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 세계관이구나.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문득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