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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서의 하룻밤
성벽에서부터 빗발치는 기둥만한 화살들.
생각만 해도 PTSD가 도지는 광경이지만 나는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불경한 자의 둥지를 클리어함으로서 나는 그 구간을 통과할 수단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 그것도 못 뚫을 거였으면 애초에 간다고도 안 했으니까.”
보상방에서 얻은 찢어진 태피스트리를 떠올리며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일행들은 한 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두 말 할 것 없이 어처구니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공성 병기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
아무리 날고뛰어도 수십 개의 발리스타가 일제 사격을 가하면 매우 높은 확률로 꼬챙이가 된다.
처음엔 다들 내 말이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됐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표정 위로 떠오른 불안감이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계속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니 또 다른 의문을 드러냈다.
어찌 저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을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은 대체 뭘까.
다들 그런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 중 린크가 긴장감어린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설마 요격을 돌파할 방법이 있으신 건가요……?”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살짝 알려줄게. 다들 모여 봐.”
테이블 한 가운데에서 머리를 일행들과 머리를 맞댔다.
그 후 남들은 못 들을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야 사부……?!”
“그,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숨겨왔던 정보를 공개하자 모두가 대경실색하며 날 바라보았다.
난 다른 테이블의 이목이 끌리지 않게끔 입 앞에 검지를 가져다대며 함구를 요구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이런 게 아니었으면 내가 왜 남쪽 던전 끝자락까지 들어갔겠어?”
애당초 불경한 자의 둥지를 공략한 것부터가 장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아직 재료만 가지고 있으니 완벽한 준비라곤 할 수 없지만 이미 반 이상 온 거나 다름없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최소한 성벽 밖에서 당할 일은 없겠네요…….”
“완전 사기잖아! 지금까지 개죽음당한 사람들이 불쌍해질 지경이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린크와 다나도 숨겨뒀던 정보를 듣고 금세 납득했다.
내가 지혜 잃은 장원을 클리어할 수 있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성문을 넘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 다음에도 뭔가 방법이 있는 거지?”
어느덧 다나는 신이 난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더 이상 나와 유미의 출전을 만류하지 않았다.
걱정과 불신을 전부 떨쳐낸 그녀는 오히려 영웅담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지. 일단 성벽을 넘으면 교차로가 하나 나오는데 거기엔 말이지…….”
다나의 텐션이 올라가서 그럴까.
거기에 취기까지 더해지니 나도 입이 가벼워졌다.
일행들의 불안감을 덜어줄 겸 계획을 되새기려 할 때였다.
“으흠! 흠! 다들 여기 좀 주목해보세요!”
“왜 나나야?”
“뭐야, 나나 씨! 한참 재밌어지려는데!”
나나가 술잔을 치켜들며 내 말을 끊었다.
이에 다나가 아쉬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항의하자 나나는 반쯤 훈계하듯 말했다.
“모처럼의 뒤풀이인데 너무 던전 얘기만 하고 있잖아요. 작전 회의는 나중에 하고 일단 먹고 마시죠!”
확실히 여관에 들어선 후로 너무 장원과 관련된 얘기만 하고 있다.
과한 던전 이야기는 뒤풀이의 분위기를 망칠 거다.
물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소곤소곤 말하긴 했지만 주점은 공략 회의를 진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던전을 클리어하고 보물과 명성을 얻는 것.
모험가라면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주점에서 비밀 정보를 함부로 입에 담는 건 너무나 부주의한 행동인 것이다.
“죄송해요…… 제가 한 얘기로 물고 늘어져서…….”
“나나 씨 말도 맞네. 술 마시러 왔는데 이런 얘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일행들도 이를 이해했는지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주위의 시선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나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가 옆 테이블로 새어나간 건 아닐지 걱정하는 것이었다.
나도 좀 더 조심해야겠다.
원래 세계에선 꺼라위키에만 들어가도 쉽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정보의 소중함을 몰랐다.
허나 게임 세계에선 다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들은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억만금을 내서라도 얻고 싶어 하는 정보도 있으리라.
당장 아테르니아의 공략법만 해도 그렇겠지.
다음에 이야기를 나눌 땐 어디 으슥하고 방음 잘 되는 곳에서 해야겠다.
“그러면 자세한 이야긴 나중에 할까?”
“그래요! 대신에 다 같이 섹스 썰이나 풀어 봐요! 우선 첫 경험이 언제였는지부터 이야기해보죠!”
“세, 섹……!”
깜빡이 없이 튀어나온 음담패설에 모두가 당황을 터뜨렸다.
유미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고 린크는 반사적으로 요르나의 귀를 막았다.
당황하지 않는 건 다나가 유일했다.
잠깐 이야기하는 사이에 또 취해버린 걸까.
다시금 취기를 되찾은 그녀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럼 나 먼저~! 내가 먼저 할게엣!”
“좋아요 김다나! 나이와 경험 횟수를 말해보세요!”
“야 애한테 뭘 시키는 거야……!”
다나의 목소리가 커지니 주위의 시선이 우리 쪽 테이블로 모였다.
급격히 부끄러워진 나는 나나를 말리려 했으나 다나는 이미 신나게 떠들기 시작한 후였다.
“이름 다나! 나이눈 올해로 스물이고…… 히끅! 남자 경험은 업스빈다!”
말하는 도중에도 다나는 손에 든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얼마나 술이 약하면 맥주 몇 잔 마시는 걸로 혀까지 꼬이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무렵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다나가 들고 있는 술잔을 맥주잔이 아니었다.
주황색의 투명한 액체가 들어간 자그마한 금속잔.
그것은 분명 과일주의 일종인 슈냅스를 따를 때 쓰는 잔이었다.
과일주라고 해서 달콤한 술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맥주보다 훨씬 독한 술이다.
다나가 저걸 왜 마시고 있는지는 자명했다.
그녀가 한 눈 파는 사이에 나나가 자기 술잔과 바꿔치기한 것이리라.
“스무 살에 처녀라니~! 아주 그냥 수녀님이 따로 없네요!”
“흐헤헷……! 상관없어! 이제 곧 졸업할 거니까!”
“진짜요~? 그러면 생각해둔 상대 말해 봐요! 말 못하면 그대로 원 샷 때리기!”
자기 술잔이 바뀐지도 모르는 다나와 은근슬쩍 술 게임까지 거는 나나.
정말 나나는 술 먹이기에 도가 튼 것 같다.
남이 취한 모습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밌는 걸까.
어찌됐든 이 이상 마시게 두면 좋을 거 없으리라.
술도 별로 못 마셔본 애가 독주를 원 샷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나야 너무 무리해서 마실 필요 없어. 그리고 쪽팔리니까 좀 앉자.”
“사, 사부……?”
다나의 양손을 붙잡으며 그녀를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러자 헤벌쭉거리던 다나가 갑자기 반쯤 풀린 눈으로 날 멀뚱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유난히 붉은데 술기운 때문인가?
하긴 맥주만 마셔도 취하던 앤데 40도 전후의 술을 마시면 훅 가겠지.
그녀의 몸 상태가 걱정된 나는 다나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힘들면 먼저 올라가 있을래? 내가 데려다줄게.”
“아, 그…… 그게…….”
“봐, 혀 꼬여서 말도 못하잖아. 안 되겠다 물 한 잔 마시고 진정을…….”
그렇게 내가 다나를 위해 냉수를 찾을 무렵이었다.
“이야~! 설마 섹스 하고 싶은 상대가 사부였어요?!”
“잘 어울리는구만 아가씨! 그대로 방까지 끌고 가버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여기저기서 추잡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취기에 절은 모험가들에게 다나는 좋은 안주거리였다.
그녀가 큰 목소리로 어그로를 끌자 어느덧 선술집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다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다들 좀 닥쳐……!”
물론 나나의 선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나를 부추기는 말 중 대부분은 나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내 호통에도 사람들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덧 나와 다나의 키스를 격렬히 바라기 시작한 선술집의 손님들.
우리는 그 한 가운데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 에이이이잇!!”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다나가 금속잔에 슈냅스를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구경꾼들 뜻대로 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물론 나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그것대로 즐거워했다.
독주를 한 가득 들이켠 다나는 순식간에 맛이 가버렸기 때문이다.
“아쉽네요~! 우리 20세 처녀 다나 양은 누구랑 떡치고 싶은지 말하기 싫답니다! 그러면 다음 타자!”
“저, 저요……?”
다나의 차례가 끝나기 무섭게 유미를 지목하는 나나.
아무래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 게임을 멈추지 않을 생각인 듯하다.
진지하게 말릴까 생각했지만 너무 과하진 않은 것 같으니 놔두기로 했다.
남들 다 즐기는데 혼자 진지 빨면서 그만하자 하면 찐따처럼 보이겠지.
일행들도 힘든 하루를 보냈으니까 충분히 즐길 필요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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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몇 시간.
자정이 넘어서야 우리는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나나가 한 번 불을 붙이니 술자리의 열기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종국에는 오늘 처음 만난 모험가들하고도 술잔을 맞대면서 파티를 즐기기까지 했다.
거듭 나나의 인싸력이 대단하다 느꼈다.
원래 세계에서도 대학교의 아이돌 뭐 그런 거 아니었을까.
난 대학을 다녀본 적 없지만 나나 같은 후배가 있었으면 많이 예뻐해 줬을 것 같다.
“흐이잉~ 아지익! 더 마실 수 있어어어엇! 나 아직 안 죽었다구우우우!”
“으으윽……! 다나야 제발 부탁인데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린다고……!”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다나가 주사를 부려댔다.
주량은 제일 약하면서 술은 나나처럼 마셔댔으니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다.
그녀는 완전히 필름이 끊겨버린 듯 온갖 기행을 해댔으며 이로 인한 피해는 린크가 고스란히 받았다.
그 역시 상당히 취하긴 했지만 다나만큼 이성이 날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예 정신이 나가버리면 같이 웃고 떠들 수 있을 텐데 애매하게 술이 들어가니 어지럼증만 호소하는 것이었다.
“남자 새끼가 고작 그거 마시고 앓는 꼴이라니. 한심해 죽겠네요.”
“쟤가 약한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한 거야…….”
비아냥거리는 나나에게 힐책하듯 말했다.
나나야 술이 워낙 세서 멀쩡한 거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누구나 린크 같은 꼴이 됐을 거다.
나 역시 어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고주망태가 돼서 나나한테 끌려가고 있었으리라.
“유미야, 이거 술집에서 산 건데 애들 자기 전에 한 병씩 먹여. 숙취해소에 좋대.”
“아, 네…… 감사해요 스승님.”
올라오기 전에 사둔 숙취해소 포션을 유미에게 건넸다.
원래 포션은 약사들이 판매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여관에선 취하고 인사불성이 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반강제로 취급하게 됐다고 한다.
손바닥 보다 조금 작은 녹색 포션인데, 개당 100아웬으로 싼 편은 아니다.
뭐, 당장 수중에 있는 돈만 해도 9만 아웬이 넘는데 인색하게 굴 필요 없지.
“그나저나 유미 쟝은 하나도 안 취했네요? 원래부터 술이 셌어요?”
유미의 안색을 본 나나가 문득 질문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유미는 취한 기미가 전혀 없었다.
어찌나 멀쩡한지 별로 안 마신 요르나처럼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나도 미성년자한테 술을 먹이게 하는 건 양심에 찔리는지 요르나는 잘 건들이지 않았다.
반면 유미는 다나랑 린크 만큼이나 엄청 마시게 했는데도 전혀 안 취한 것이었다.
“아마 할머니 영향일 거예요…… 신령님들은 술을 좋아하시거든요.”
“흐으음~ 요컨대 여우 할머니가 술을 좋아하니까 유미 쟝도 잘 마시게 됐다는 거네요?”
“네, 맞아요. 어렸을 적부터 아빠한테 조금씩 배운 것도 있지만요.”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유미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나도 유미한테 착 달라붙으면서 친근함을 표시했다.
“잘 됐네요~ 다키님도 술 잘 못 마셔서 심심했는데, 잘 마시는 친구가 생겨서 기뻐요!”
“그, 그러세요……? 저라도 괜찮으면 얼마든지 같이 마셔드릴 수 있긴 한데…….”
“그러면 앞으로도 종종 같이 마시죠! 이제부터 같은 파티기도 하잖아요!”
아예 유미를 끌어안으면서 말하는 나나.
처음엔 당황스러워한 유미였지만 그녀도 이 정도 스킨 쉽은 괜찮은지 딱히 저항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나는 결코 건전한 의도로 저러는 게 아니었다.
찡긋, 날 돌아본 나나가 윙크를 해왔다.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유미한테 술을 진탕 마시게 해서 나랑 그렇고 그런 상황을 만들려는 게 틀림없다.
‘저 녀석 또 쓸데없는 생각을…….’
괜한 짓 하지 말라고 나나에게 눈총을 보낼 때였다.